일제식민통치의 실상
Ⅰ.무단통치기(1910년대) 1. 조선총독부 -한국의 통치기관으로 설치 ① 조선총독-현역 육해군 대장으로 임명 ② 일본국왕의 직속기관 ③ 입법,사법,행정,군사통수권을 소유한 무제한의 권력행사 ④ 현역군인출신의 총독 폭압적이고 강제적 성격을 보여줌 1910년대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각종 억압기구에 의거해 모든 분야에 걸쳐 전개한 폭력적인 억압정치. ⑤ 물리적 기반—헌병경찰.군대
Ⅰ.무단통치기(1910년대) 2. 각종 법령을 통한 통제 1) 교육에 대한 탄압 : 일제의 식민지교육의 목표 한국 민족의 주체성 파괴, 수동적 비주체적 인간형, 일제의 식민지 노예로 전락시키기 위한 교육 ① 제 1차 조선교육령(1911년) “보통교육은 보통의 지식기능을 가르치며 특히 일본제국의 국민되는 성격을 함양하고 일본어를 보급함을 목적으로 한다” “조선에는 대학은 두지 않으며 전문학교에 의한 전문교육을 실시한다” 일제는 교사들에게 칼을 채우고 군복에 준한 제복을 입게 하면서 한국학생들에게 식민지 노예의식을 교육하여 한국민족을 “동화” 라는 이름아래 말살하려고 획책하였다. ② 사립학교 규칙(1911년,1915년) : 사립학교의 통제가 목적
Ⅰ.무단통치기(1910년대) 2) 민족산업에 대한 탄압 ① 회사령(1910년) “회사의 설립은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조선총독은 사업의 정지, 금지,지점의 폐쇄, 회사의 해산을 명할 수 있다” 국인 자본을 억제하고 했던 당시 일제 식민통치의 기본방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법령 1910년부터 1919년까지의 회사설립건수를 살펴보면 한국인이 설립한 회사는 63개에 불과한 반면 일본인이 허가 받은 회사는 652개였다. ② 조선광업령(1915년) “광업권에 대한 등록허가를 실시하고 이를 어길 경우 형벌을 가하며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일제가 등록된 광업권을 취소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이 경영하던 광산중에서 품질이 좋고 경제성이 높은 광산에 대해서는 광업권의 등록을 거부하고 등록후에 경제성이 있거나 높다고 판단되는 광산에 대해서는 등록을 취소하는 방법으로 이를 약탈하였다.
Ⅰ.무단통치기(1910년대) 3. 토지조사사업 1) 토지조사사업의 목적 명목상의 이유: 지세부담 공평. 소유권보호.토지이용을 자유롭게하여 토지생산성 증대.매매양도의 원활 실제적인 이유 : 식민지지배 비용을 식민지에서 조달, 수탈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계획, 조선의 경제를 완전한 식민지경제로 전환하기 위한 계획 ① 식민지지배를 위한 재정수입의 확보 식민지배의 경비조달의 가장 안정적인 수입(지세) 확실한 재정수입의 확보 1910년대 우리나라의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 지세를 늘리는 것이 가장 뚜렷한 세원의 확보 ② 일본인에게 토지소유의 법적 근거 마련 일본인은 토지를 지배하지만 소유권은 없었다. 일본인들로 하여금 토지소유의 법적 근거마련
Ⅰ.무단통치기(1910년대) ③ 토지조사사업의 방법 토지면적조사.필지별 소유권조사 임야조사사업(산지,임야,황무지 등) ④ 토지조사사업의 수탈성 “신고주의” 원칙 : 신고를 하지 않으면 소유권을 인정받지 못함 반일감정.홍보부족.억울한 피해를 보게된 원인 ⑤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농경지 13만 정보, 임야 1,369만 정보의 토지를 약탈. 이것은 당시 국토면적의 약 60%에 해당 조선총독부의 지세수입의 원천을 대폭확대시킴. 과세 면적의 확대를 통한 재정수입을 대폭증가 일제는 국내최대의 지주가 되었으며 한국농민을 가장 철저하게 수탈하는 가장 가혹한 지주가 되었습니다. 지주들을 위한 개혁:경작권,개간권,도지권등을 부정.지주의 권리만을 인정
Ⅰ.무단통치기(1910년대) 4. 무단통치의 과정과 영향 국권회복운동을 무력으로 진압 헌병을 동원 전국토를 감시와 통제로 하는 무단통치를 실시 조선을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략적 거점으로 생각 조선의 안정. 민족적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 3.1운동은 이러한 무단통치에 대한 거족적인 저항 일제의 억압과 통제에 대한 약탈에 대한 민족적 저항
Ⅱ.문화정치기(1920년대) 1. 문화정치의 본질 ① “문화의 발달과 민력(民力)의 충실” 1) 문화정치에 대한 선입견 ① “문화의 발달과 민력(民力)의 충실” ② 조선일보.동아일보창간등 유화적인 제스처. ③ 식민지배의 원칙에는 변화없음 ④ 민족말살정책.동화주의 정책은 변화없음 ⑤ 일종의 분열정책. 상황의 변화에 따라 통치전략을 수정한 것에 불과. 2) 총독부의 관제개혁 ① 총독:무관뿐만 무관도 임명표방 1945년까지 6명의 총독 중 모두 무관임명 ② 헌병경찰제도-보통경찰제도 경찰과 군대는 더욱 증강시킴(군대:2400명증강) 경찰서: 736개(1919년)-2,746개(1921년), 경찰:6387명(1919년)-20,134명(1921년)
Ⅱ.문화정치기(1920년대) ③ 치안유지법공포—민족운동탄압이 목적 ④ 특고경찰.밀정제도를 만듬 경찰.특고형사.사복순사.밀정 등 3) 민족분열정책 ① 친일파육성 조선민중내에 친일파육성 필요성을 절감함 사회지도층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친일파육성 사회단체에도 친일파를 침투시켜 친일단체로 만듬 ② 문화운동과 자치론 민족운동을 문화운동으로 유도시켜 독립전쟁론을 약화시킴 종교운동.수양운동.생활개선운동.농촌계몽운동 문화운동은 저항성이 결여될 때 타협주의적 성격을 갖게 됨
Ⅱ.문화정치기(1920년대) 2. 산미증식계획 1) 누구를 위한 증식인가? 명목: 조선내의 수요증가에 대비, 농촌경제향상, 조선경제의 향상 ① 일본의 문제 : 제1차세계대전:일본아시아시장 점령 일본: 산업화, 도시화, 설비투장증대, 국제무역증대 1918년:일본국내의 설비투자의 과잉상태, 도시인구집중, 일본국내 쌀폭동, 저곡가정책필요. ② 조선:안정적이고 영구적인 쌀공급지 ③ 1929년 세계경제공황으로 일본농산물 폭락 쌀수입 반대, 1934년 산미증식계획 중단 2) 농촌의 현실 ①증산 : 1917년: 1,400여 1934: 1,700만석(+300여만석) ②반출 : 1917년:220만석 1934년: 870여만석(+650여만석). ③ 지목변경(밭-논): 쌀부족, 잡곡부족 ④ 쌀생산량은 증가 되었는데 농민들은 더 궁핍한 생활을 영위
Ⅱ.문화정치기(1920년대) Ex) ‘내외사정’-일본인이 쓴 글 우리가 농촌에서 견문한 것은 아무리 말해도 상상할 수 없는 사실이 많다.(중략) 우리가 견문했던 가난한 농민의 식량을 참고로 봐도 잡곡 한 홉 정도에 풀뿌리나 나무껍질을 섞어 끓여서 먹는다. 봄에는 풀의 새싹을, 겨울에는 뿌리를 채굴한다. 나무껍질을 잘게 하거나 도토리 열매로 가루를 낸 후 물을 넣어 만들고 소금을 쳐서 먹는다. 어떤 지방에서는 고령토를 먹는 예도 있다. 그 상태는 일본에서는 전혀보이지 않는 비참하고 진기한 현상이다.(후략) -> 산미증식계획은 일본의 식량문제해결과 과잉투자문제 해결을 위해 조선농민을 굶주림으로 몰아넣은 식민지 경제정책.
Ⅲ.황국신민화정책기(1930년대후반-1945년) 1. 시대적 상황 2. 황국신민화정책 국가총동원법(1937년 중일전쟁이후) 조선은 일본의 침략전쟁 수행을 뒷받침하기 위한 전시동원체제로 전환 황국신민화정책-민족말살정책 만주사변(1931년).중일전쟁(1937년) 조선인의 인적,물적수탈.전시체제로 전환. 조선을 군수공업기지로 재편.병참기지화추진 내선일체 : 전쟁은 일본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선도 전쟁에 참여. 일본=조선 2. 황국신민화정책 1) 황국신민의 서사 ① 아동용 * 나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다. * 나는 마음을 합해 천황폐화께 충의를 다한다. * 나는 인고단련하여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된다.
Ⅲ.황국신민화정책기(1930년대후반-1945년) ② 학생,일반용 * 우리는 황국신민이며 충성으로서 군국에 보답하자. *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자 *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의 힘을 키워서 황도를 선양하자. 2) 신사참배 애국일지정(매월1일) : 신사참배강요 궁성요배 황국신민체조 3) 창씨개명 학교입학거부, 행정사무처리거부 민족말살정책 4) 강제동원 강제동원 : 징병, 징용, 일본군위안부(정신대), 보국대 국가총동원법 군대식규율로 통제 기밀누설을 이유로 학살
* 3.1운동 가. 배경 국제적 배경 - 제 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새로운 국제 질서 형성, 소련이 등장하여 약소민족에 대한 지원표명,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국외독립운동 - 김규식(신한청년단) 파리강화회의 참석, 대한독립선언서(길림성),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국내정세 - 1910년대 저항 에너지의 축적, 천도교·기독교·불교 등 종교 지도자들과 학생들이 연합하여 준비. 고종의 죽음을 계기로 촉발됨. 구분 주도계층 활동지역 활동내용 형태 1단계 종교계 대표, 학생 주요도시 독립선언서 제작·배포, 만세시위 시작 비폭력/외세의존적 2단계 교사, 학생, 상인, 노동자 전국도시로 확신 만세 시위의 확신, 상인·노동자들의 철시·파업 비폭력 3단계 농민층 농촌으로 확산 면사무소·친일지주 등 습격, 무력투쟁 전개→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제암리 학살사건, 유관순의 순국) 무력저항
* 3.1운동-2 다. 역사적 의의 민족의 저력을 국내외에 과시, 실력 양성 운동 전개 독립운동의 활성화: 국회 무장 독립투쟁과 노동자·농문 운동의 활성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의 계기 독립운동의 이념적 분화 및 확산, 이후 민족해방투쟁의 사상적·인적 저수지 역할을 함. : 비타협적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장/타협적 민족주의자 등장 일제 식민통치의 변화: 헌병 경찰 통치 → 문화통치로 전환
* 1920년대 민족해방투쟁 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임시정부의 수립(1919.4.13) - 민주공화국을 정체로 하여 상하이에 수립됨. 임시정부의 활동 - 연통제·애국공채로 행정조직 및 독립운동자금 모금, 외교활동(주파리위원부, 구미 위원부), 독립신문(독립운동 소식, 독립의식 고취) 및 사료편찬소(한일관계 사료집 간행, 일제침략의 부당성 독립의지 천명)설치, 군사활동(군무부 설치, 광복군 편성) 나. 사회주의 진영의 저항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 -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재러한인들을 중심으로 해외에서 확산됨. 소련의 약소민족 지원책으로 3.1운동 이후 청년, 지식인 중심으로 보급되기 시작. 해외에서 이르쿠츠크 공산당과 한인사회당의창당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의 창당(1925년) 사회주의계의 활동 - 1926년 6.10만세운동, 민족해방투쟁의 전개, 노동운동 확산에 기여 - 청년, 여성, 노동자, 농민조직의 결성 - 조선노동총동맹 조직(1927년), 원산노동자 총파업(1929년)
* 1920년대 민족해방투쟁-2 다. 민족 유일당 운동/의열투쟁의 전개 신간회 운동(1927년 결성) - 이념을 초월한 단일화된 민족운동 추진, 비타협적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계의 결합 국외에서도 민족유일당운동의 전개됨. 의열투쟁의 전개 - 의열단의 활동(김원봉) : 박재혁 의거(부산경찰서에 폭탄 투척), 김익상 의거(조선 총독부에 폭탄 투척), 김상옥 의거(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 김지섭 의거(도쿄 궁성 폭탄 투척), 나석주 의거(동양 척식 주식회사) - 한인 애국단(임시정부)의 활동 : 이봉창 의거(일왕 마차에 폭탄투척), 윤봉길 의거(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왕 탄생 기념식에 폭탄 투척)
* 1930~40년대의 국내 사회주의 운동과 한일무장투쟁 가. 이재유의 경성재건그룹,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재건그룹 1~4차에 걸친 조선공산당의 붕괴 후 공산당 재건을 위한 투쟁 전개 광범위한 노동운동/학생운동의 전개 지도자 이재유의 수차례 탈옥과 대중적인 지도력으로 조직 확장 핵심인물들의 검거와 지도자 이재유의 옥사로 조직붕괴 나. 해외 항일무장투쟁의 전개 1930년대 전반: 만주사변 이후 중국의 호로군과 연대함 1930년대 후반: 동북 항일연군 내의 항일유격대가 함경도 보천보에 들어가 경찰 주재서, 면사무소 파괴(김일성의 지도) 1940년대: 김구, 지청천 등은 신흥 무관학교 출신의 독립군과 중국 대륙에 산재하여 있던 청년들을 모아 한국광복군 창설. 김원봉의 민족혁명당과 연대.
* 이재유 프리즌 브레이크의 달인, 이재유(1905~1944) 이재유는 함경남도 삼수의 화전민 출신이었다. 삼수와 서울, 개성을 오가며 입학과 퇴학을 반복하면서 사회과학연구회 등을 조직하다가 1926년 동경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전문부 사회과에 적을 두었으나 학비 때문에 퇴학하였다. 일본유학시절부터 적극적으로 공산주의운동과 노동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후 각종 노동조합과 재동경조선청년동맹, 신간회 동경지회 조선공산당 일본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에서 활동하였다. 3년의 동경생활동안 70여 차례 검거될 정도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재유는 20세에 서울에 상경하고, 12년 옥살이를 하다 40세가 안되어 사망하였으니, 겨우 8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재유가 보여준 활동은 모든 운동이 압살당하고 전향자가 속출한 1930년대 중후반에 커다란 희망이 되었다. 이재유는 지식인중심의 전위적인 운동과 국제적인 권위에 기대어 교조적인데다 파벌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던 기존 공산주의 운동과 전혀 차원이 다른 운동을 하였다. 현장투쟁을 중심으로 대중의 자발성에 기반한 조직을 건설하였으므로 그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대중운동이었다. 이재유는 섣불리 공산당 재건이나 공산주의 운동의 대표성을 주장하지도 않았고, 노동운동과 대중투쟁에 집중하여 트로이카식 운동을 전개하였다. 트로이카는 학생운동과 노동쟁의를 지원ㆍ지도하기 위하여 3인의 그룹이 구성되면 그 3인 중 1인이 또 다른 그룹의 3인이 되어 지도하는 형식이다. 때문에 조직의 주된 활동은 투쟁하는 대중에 대한현장의 특수성에 의거한 지원과 응원이 중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재유는 경성트로이카운동의 최고지도자로써 수많은 동지들과 함께 서울 일원의 많은 학생운동과 노동쟁의를 지원하였다. 이재유는 수많은 수배와 투옥을 반복하였다. 엄혹하고 강압적이었던 일제강점기의 감옥에서 3차례 탈옥에 성공하여 적극적으로 투쟁을 전개하였다. 많은 운동가들이 일제군국주의체제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하고 은둔과 도주만으로 신념을 지켰을 때, 이재유는 변함없이 신념을 지켰다. 그는 강철같은 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친화력이 강하고 인간적인 사람이기도 하였다. 세 번째 탈옥이 일제 순경을 감화하여 이루어졌다는 데에서 그런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이재유가 함께 활동하던 이관술, 이현상, 김삼룡 등은 이후 해방공간에서 좌익의 핵심이 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재유는 1936년에 마지막으로 투옥된 후 6년을 언도받았으나 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만기가 넘어서도 계속 감옥생활을 지속하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4년 10월 26일에 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