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우리 역사의 형성과 고대 국가의 발전 한국사
차례 01 02 03 04 05 선사 시대의 문화 고조선과 여러 나라의 성장 삼국 및 가야의 성립과 발전 · · · 12 01 고조선과 여러 나라의 성장 · · · 22 02 삼국 및 가야의 성립과 발전 · · · 30 03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 · · · 42 04 고대 국가의 문화와 교류 · · · 56 05
04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 이 단원에서는 1.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과정과 민족사적 의의를 알 수 있다. 2. 통일 신라와 발해의 통치 제도를 파악할 수 있다. 3. 통일 신라와 발해의 사회와 경제를 이해할 수 있다.
1. 신라의 삼국 통일 왜인들이 신라 문무왕에게 포로로 잡힌 까닭은 무엇일까? (문무) 대왕이 왜인들에게 말하였다.“우리와 너희 나라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강역이 나뉘어 있는데 …… 무슨 까닭으로 금일 백제와 함께 죄악을 저질러 우리나라를 도모하는가? 지금 너희 군졸은 나의 손아귀 안에 들어 있으나 차마 죽이지 않겠다. 너희는 돌아가 이것을 너희 왕에게 전하라.”라고 하고 가는 대로 두었다. - “삼국사기” ▲ 대왕암(경북 경주) 왜인들이 신라 문무왕에게 포로로 잡힌 까닭은 무엇일까? [정답] 왜군은 백제 부흥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주류성이 함락되면서 신라의 포로가 되었다.
1. 신라의 삼국 통일 ⑴ 고구려와 수의 전쟁 ① 배경: 수의 중국 재통일(589) ② 고구려의 대응: 방어 체제 강화, 요서 지방 선제 공격 ③ 수의 공격 • 수 문제: 요동 방면으로 침공 시도 → 실패(598) • 수양제: 113만 대군으로 요동성 공격, 30만 별동대로 평양 공격 →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 대첩(612) • 수, 고구려 원정 실패 → 내란으로 멸망 ④ 당의 건국 • 고구려 영류왕, 당과 포로 교환하고 우호적인 관계 유지 • 당 태종의 고구려 압박 → 고구려, 천리 장성을 축조하여 당의 침략에 대비
1. 신라의 삼국 통일 한 걸음 더 6세기 말 동아시아 국제 정세 수양제는 돌궐과 토욕혼, 고창을 차례로 정복하면서 북방과 서역 일대를 장악하였고, 그 다음으로는 동방의 고구려를 넘보았다. 이에 고구려는 6세기 중엽 이래 충돌이 잦았던 북방의 돌궐과 은밀히 교섭을 진행하는 한편, 바다 건너 왜와도 적극적인 외교 교섭을 벌였다. 이에 6세기 말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고구려, 백제, 왜, 돌궐을 연결하는 남북 세력과 수, 신라를 연결하는 동서 세력이 대립하는 모습을 띠었다. ▲ 6세기 말 동아시아 국제 정세
1. 신라의 삼국 통일 수의 침공과 고구려의 방어 자료 보기 수는 고구려를 자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장애물로 여겼다. 이에 수양제는 113만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략했지만 3개월이 넘도록 요동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이에 우중문에게 30만 여명의 별동대를 주어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마저 을지문덕의 유인책에 빠져 살수에서 크게 패하였다. 결국 수는 고구려 원정에서 어떤 성과도 얻지 못하였다. 수양제는 그 뒤에서 두 차례 더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실패하였다. ▲ 수의 침공과 고구려의 방어
1. 신라의 삼국 통일 ⑵ 신라의 위기 ① 고구려의 공격 • 신라 북방에 대한 공세 강화 → 함경남도 지역의 영토 회복 • 연개소문의 정변: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 세운 뒤 정권 장악 ② 백제의 공격 • 무왕: 경상남도 서부 지역 일부 차지(624) • 의자왕: 대야성 등 40여 성 함락 → 낙동강 서쪽 옛 가야 지역 회복(642)
신라의 삼국 통일 1. ⑵ 신라의 위기 ③ 신라의 대응 • 진평왕: 한강 하류의 중국 교통로 방어, 중앙 관서 설치(위화부, 조부, 예부 등) • 선덕 여왕: 김춘추, 김유신 등 신흥 세력의 지지를 기반으로 즉위 ④ 김춘추의 외교 활동 : 대야성 함락 등 백제의 거센 공격 → 고구려에 군사적 도움 요청 → 고구려, 한강 유역의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며 거절
1. 신라의 삼국 통일 ⑶ 고구려와 당의 전쟁 ① 배경: 연개소문의 대당 강경책 고수 → 당 태종의 고구려 공격(645) ② 전개: 요동성 함락 → 개모성, 백암성, 비사성 차례로 함락 → 안시성 싸움에서 당의 대공세를 견뎌내고 승리 → 이후에도 랴오허 강과 압록강 어귀 방면으로 침략해 왔으나 모두 방어 ③ 승리 요인 • 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의 방어 체제 • 잘 훈련된 군대와 고구려인의 강한 정신력
1. 신라의 삼국 통일 ⑷ 백제, 고구려의 멸망 ① 나 ∙ 당 연합의 성립 • 신라: 당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 물리치려 함. • 당: 신라와 군사 동맹 체결하여 고구려 무너뜨리려고 함. ② 고구려, 백제의 멸망과 부흥 운동: 지도층의 내분으로 실패 구분 멸망 부흥 운동 백제 나 ∙ 당 연합군의 사비성 함락(660) → 당, 웅진 도독부 설치 복신과 도침(주류성), 흑치상지(임존성) → 부여풍 합류 고구려 연개소문 사후 지배층의 내분 → 평양성 함락(668) 검모잠(한성), 고연무(오골성) → 안승을 추대하여 부흥 운동 전개 고구려 유민은 대부분 발해에 흡수
신라의 삼국 통일 1. 한 걸음 더 고구려 멸망의 원인 정권을 장악했던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치열한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다. 연개소문의 맏아들이었던 남생이 대막리지가 되어 지방의 성을 순시하는 동안 둘째인 남건과 셋째인 남산이 정변을 일으켜 남생의 아들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에 남생은 당에 구원을 요청하여 당군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나 ∙ 당 연합군은 이러한 지배층의 내분과 권력 쟁탈전의 상황을 이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수 양제가 동쪽 정벌에 나서서 이기지 못한 것은 인심이 이반하고 원망에 찼기 때문입니다. 옛날 태종께서 동쪽 정벌에 나서서 이기지 못한 것은 고구려가 내부의 틈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 지금 고구려의 왕인 보장은 나약하여 권신들이 마음대로 왕명을 농락하고 있습니다. 연개소문이 죽자 남건의 형제들은 안에서 서로 공격하고 빼앗습니다. 남생은 마음을 다하여 우리의 향도가 되었습니다. - “삼국사기”
신라의 삼국 통일 1. ⑸ 나 ∙ 당 전쟁 ① 배경: 공주에 웅진 도독부 설치, 평양에 안동 도호부 설치, 경주에 계림 도독부 설 치 → 당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함. ② 신라의 대응: 백제의 옛 땅 80여 성 함락, 가림성 공격 → 나 ∙ 당 전쟁 시작 ③ 나 ∙ 당 전쟁의 전개: 매소성 전투(675), 기벌포 전투(676)에서 신라 승리 → 당, 안동 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기고 물러남. → 신라, 당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삼국 통일 완성
1. 신라의 삼국 통일 나 ∙ 당 전쟁 다시 보기 자료 보기 나 ∙ 당 전쟁은 수 ∙ 당과 고구려 전쟁의 연장 선상에 있으며 고대 동아시아 세계 질서의 확립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이는 신라가 단순히 당을 몰아낸 것에 그치지 않았으며, 당의 일원적 세계 지배 야욕을 좌절시키고, 이후 당과 주변 세계의 공존이라는 새로운 세계 체제를 이끌어 낸 국제 전쟁이었다. ▲ 나 ∙ 당 전쟁
1. 신라의 삼국 통일 삼국 통일의 의의와 한계 자료 보기 의의 한계 우리 민족과 중국 간의 세력 균형(압록강 일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민족 통일 민족 문화의 바탕 마련 → 신라의 소박한 문화 + 웅장한 고구려 문화 + 세련된 백제 문화 → 찬란하고 정제된 통일 신라 문화 이룩 당이라는 외세 이용 요동 지역 상실 (대동강 이남에 한정) → 불완전한 통일
2. 통일 신라의 발전 통일 신라의 재상은 어떤 직책이었을까? 원화 7년(812)에 중흥(애장왕)이 돌아가니 재상 김언승을 세워 왕(헌덕왕)으로 삼았다. …… 아울러 재상 김숭빈 등 세 사람에게 문극(두 갈래 창)을 내려 주었다. - “구당서” ▲ 회의 중인 재상들(상상화) 통일 신라의 재상은 어떤 직책이었을까? [정답] 통일 신라에서는 상대등, 병부령, 집사부 중시(시중) 등을 재상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국정 운영의 최고 책임자였으나, 제도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다.
2. 통일 신라의 발전 ⑴ 통치 체제의 개편 ① 무열왕: 최초의 진골 출신 왕, 무열왕 직계 후손의 세습 체제 확립 ② 문무왕: 삼국 통일 완성 ③ 신문왕(7세기 후반): 귀족 세력 억압, 각종 제도 정비 → 전제 왕권 강화 중앙 정치 제도 집사부와 시중의 권한 강화 → 화백 회의, 상대등 기능 축소 지방 행정 제도 • 9주: 옛 삼국 땅에 3개 주씩 설치, 군 ∙ 현(지방관)-촌(촌주) 파견 • 5소경: 수도 보완, 각 지역의 정치 ∙ 문화적 거점 역할 군사 제도 • 9서당: 중앙군, 신라인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말갈인 포함 • 10정: 지방군, 1주에 1정씩 설치(한주에는 2정 설치) 토지 제도 • 녹읍 폐지: 진골 귀족의 경제적 기반 약화 → 왕권 강화 • 관료전 지급 → 경덕왕 때 녹읍 부활 교육 제도 국학 설치 → 귀족 자제들에게 유학 가르치고 관리 양성
2. 통일 신라의 발전 ⑵ 신라 말의 사회 동요 ① 경덕왕의 개혁 정책 • 녹읍 부활, 지방 행정 구역 명칭 정비 • 관직명 개정, 관리 휴가 일수 대폭 축소 ② 혜공왕: 진골 귀족들의 왕위 쟁탈전 격화 → 왕권 약화, 지방 세력의 성장 ③ 지방 세력의 반란 • 김헌창의 난: 국호 ‘장안’, 연호 ‘경운’→ 5개 주, 3개 소경의 합세로 실패 • 장보고가 신무왕의 즉위에 관여 ④ 원성왕(독서삼품과 실시), 헌덕왕(인사 제도 개혁)의 개혁 → 성과 거두지 못함.
2. 통일 신라의 발전 통일 신라 불교 예술의 정수 탐구 활동 ▲ 경주 불국사(경북 경주) ‘부처의 나라’라는 뜻의 불국사는 부처가 사는 이상적인 모습을 표현하였으며, 통일 신라의 높은 불교문화 수준을 보여 준다. ▲ 경주 석굴암 석굴(경북 경주) 석굴암은 신라인의 정교한 건축 · 조각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불상의 배치와 둥근 천장은 신라인의 수학적 지식이 고도로 발달했음을 반영한다. ● 경덕왕 시기에 불국사, 석굴암과 같은 불교 예술이 나타난 원인을 발표해 보자. [예시 답안] 불국사와 석굴암은 8세기 중엽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기상 이변에 따른 생산 감소, 질병 창궐과 민심 이반을 불력으로 막아보고자 국가적인 불사를 일으킨 것이라고 보인다. 또한 당시 신라의 문화 수준이 전성기에 다다라 있었으므로 최고의 불교 예술이 나타날 수 있었다.
2. 통일 신라의 발전 ⑶ 후삼국의 분열 ① 지방 호족의 등장 • 출신: 촌주 출신, 중앙 귀족 출신, 해상 세력, 군사 세력 등 • 특징: 성을 쌓고 스스로 성주 ∙ 장군이라 칭함, 선종 승려 ∙ 6두품과 연계하여 통치력 확대, 많은 토지와 사병 보유 ② 6두품 세력의 반발: 관직 승진 제한 → 골품제 모순 비판 → 지방 호족과 연합 ③ 새로운 사상의 등장 • 선종: 개인의 정신 수양(참선과 수행) 중시 → 승탑과 탑비 유행, 호족의 후원 • 풍수지리설: 도선이 전래, 지방의 중요성 강조(중앙 정부의 권위 약화)
2. 통일 신라의 발전 ⑶ 후삼국의 분열 ④ 후백제와 후고구려 건국 ⑤ 신라의 상황: 10세기경 영남 지방 일대로 축소, 경주 인근 호족들 고려에 귀부 정책 후백제 후고구려 건국 견훤(서남해역 지역 군인 출신) 궁예(신라 왕족 출신) 수도 완산주(전주) 송악(개성) 성장 • 전라도, 충청도의 곡창 지대 • 신라 압박하여 대야성(합천) 함락, 신라의 수도를 침략하여 경애왕 살해 • 영토: 경기도, 강원도 및 충청북도 일대 점령 → 황해도 일대, 평양성까지 확대 • 철원으로 천도, 국호를 마진 → 태봉 • 광평성 등 관부 설치 • 신정적 전제 왕권 지향
통일 신라의 발전 2. 한 걸음 더 후백제를 세운 견훤 옛날 광주 북촌의 한 부잣집에 용모가 단정한 딸이 하나 있었다. 딸이 아버지께 말하기를 “밤이면 붉은 옷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들어와 자고 갑니다.”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긴 실을 바늘에 꿰어 두었다가 남자의 옷에 찔러 두어라.”라고 하니 딸은 그대로 하였다. 날이 샌 뒤에 그 실을 따라가 보니 북쪽 담 밑에 사는 큰 지렁이의 허리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그로 인해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15살이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 -“삼국유사” 견훤은 상주 가은현(경북 문경)에서 태어났으며 신라군에 들어가 서남 해안을 지키던 군인이었으나 서해안의 해상 세력과 도적떼 등을 흡수해 완산주(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일반적으로 영웅은 하늘이나 용의 자식으로 미화되는 것에 반하여, “삼국유사”에 실린 견훤의 출생 이야기를 보면, 지렁이의 자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2. 통일 신라의 발전 한 걸음 더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 궁예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헌안왕이며 어머니는 헌안왕의 후궁이었다. ……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고 이름 하였다. 선종이 스스로 왕이라고 하고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전에 신라가 당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궁예는 신라 왕족 출신이었으나 중앙의 권력 다툼에 희생되어 신라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강했다. 그는 왕건 부자를 비롯한 중부 지역의 일부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송악을 도읍으로 정하고, 후고구려를 세웠다. 그는 후에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고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며 새로운 사회 건설을 추구했으나, 결국 왕건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발해의 발전 3.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을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이다.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 유득공,“ 발해고”서문 ▲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 동모산 발해는 어느 나라를 계승하였을까? [정답] 발해는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세운 국가로 고구려를 계승하였다.
3. 발해의 발전 ⑴ 발해의 건국과 발전 ① 건국: 요서 지방의 영주에서 거란족 이진충 반란 → 대조영, 걸사비우 등이 동 쪽으로 탈출하여 동모산 부근에서 발해 건국(698) ② 무왕: 연호 ‘인안’ •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 노력, 일본과 외교 관계 수립 • 당과 흑수 말갈의 유대 강화 → 장문휴, 산둥 반도 공격(732) ③ 문왕: 연호 ‘대흥’ • 당과 친선 관계 수립하여 당의 선진 문물 수용, 신라와 교류(신라도) • 영토 확장: 북으로 쑹화 강 유역, 동으로 연해주 지역 차지 → 상경 천도 ④ 선왕: 영토 확장(북으로 헤이룽강 하류 점령, 서쪽으로 요동 지방, 남쪽으로 함 흥 일대까지 차지) → 해동성국
발해의 발전 3. 자료 보기 발해의 최대 영역과 5경 발해의 첫 수도는 지린 성 둔화의 동모산 일대였다. 무왕은 중경 현덕부(지린 성 허룽)로 천도하였다. 문왕은 756년에 상경 용천부(헤이룽장 성 닝안)로, 780년대 후반에는 동경 용원부(지린 성 훈춘)로, 794년에는 다시 상경으로 환도하였다. 이후 발해는 926년 망할 때까지 상경을 수도로 삼았다. 한편 문왕이 중경-상경-동경-상경으로 이렇게 자주 천도한 까닭은 발해의 중심 권역과 지방의 연계망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 발해의 최대 영역과 5경
3. 발해의 발전 ⑵ 통치 체제의 정비 ① 중앙 정치 제도 • 3성 6부: 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의 3성 아 래 6부 설치 • 특징: 당의 제도를 수용했지만 명칭이나 운영 방식은 독자성 유지 ② 지방 행정 제도: 5경 15부 62주 107현으로 나누어 통치(지방관 파견), 말단 행정 단위 인 촌락은 토착 세력이 다스림 ▲ 발해의 중앙 통치 조직
3. 발해의 발전 ⑵ 통치 체제의 정비 ③ 민족 구성의 특징 • 지배층에는 고구려인이 많았고, 피지배층은 대부분 말갈인 • 말갈인 중에서도 발해 건국 과정에 참여하여 지배층이 된 경우 있음. ④ 멸망: 거란의 공격으로 멸망(926) → 거란, 동단국 세웠으나 수도를 랴오양 으로 옮기면서 발해의 옛 땅 포기 ⑤ 발해 부흥 운동: 압록강 유역에서 후발해국(926), 정안국(980년대) 등 건국
3. 발해의 발전 발해와 고구려와의 관련성 자료 보기 발해 무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여러 번국을 아우르게 되어 고구려의 옛 터전을 되찾고 부여의 풍속을 소유하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이 밖에 일본, 중국 등에 남아 있는 여러 기록에서도 발해 왕실이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일본이나 중국에 있던 고구려 왕실의 후손들도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고학적 증거도 이러한 사실들을 뒷받침한다. 정혜 공주 무덤은 대형 굴식 돌방 무덤으로서 고구려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 정혜 공주 묘
3. 발해의 발전 한 걸음 더 백두산 화산 폭발과 발해 멸망 발해가 백두산의 화산 폭발로 인해 멸망했다는 주장이 있다. 연해주와 일본 홋카이도의 유적에서 검추된 화산재로 보아 10세기 초에 백두산 화산이 분출한 것은 분명하다. 만약 백두산의 화산 폭발이 발해 멸망 직전에 있었다면 화산재로 인해 작물의 수확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을 가능성이 높고, 이것이 발해의 재정에 어려움을 초래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폭발 시기가 명확하지 않아 이를 멸망의 원인으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 백두산 천지
4. 통일 신라와 발해의 사회 ∙ 경제 신라 귀족들의 경제 기반으로 언급된 ‘녹’은 무엇일까? 재상의 집에는 녹(祿)이 끊어지지 않고 노비가 3천 명이며 갑옷 입은 병사와 소, 말, 돼지도 이에 맞먹는다. 가축은 바다 속에 있는 섬에서 방목하다가 필요할 때 활로 쏘아서 잡았다. 곡식을 남에게 빌려 주어 늘리는 데 기간 내에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았다. - “당서” ▲ 신당서 신라 귀족들의 경제 기반으로 언급된 ‘녹’은 무엇일까? [정답] 녹에는 녹읍이나 녹봉뿐만 아니라 관료전도 포함되었다. 아울러 당시의 귀족은 국가에 공을 세운 대가로 식읍을 받았으며, 엄청난 규모의 사유지와 목장, 그리고 노비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4. 통일 신라와 발해의 사회 ∙ 경제 ⑴ 토지 제도의 개혁 ① 배경: 삼국 통일 전쟁 비용 증가에 따른 재정 운영의 어려움 ② 내용: 전국의 토지 측량하여 각 촌락별 토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 • 신문왕 - 문무 관료전 지급(687): 통일 이후 더 많은 권력과 직무 담당하게 된 고위 관리와 외관 등에게 경제적 대우 추가 - 녹읍 폐지, 녹봉 지급: 녹읍을 지급받은 관리가 해당 지역의 땅과 주민을 총 체적으로 지급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실시 • 성덕왕: 백성에게 정전 지급 → 국가의 공민에 대한 조세 및 부역 수취의 정당성 확보 ③ 경덕왕 때 녹읍 부활(757): 기존의 녹읍이 아닌 지역별로 할당된 녹봉의 성격
4. 통일 신라와 발해의 사회 ∙ 경제 ⑵ 조세 제도의 개편 ① 통일 신라의 조세 제도 개편 • 변화: 삼국 시대에 비해 인두세 사라지고 전조(田租) 부과 • 전조: 토지의 면적(곡물의 생산량을 기준으로 하는 결부제 적용)에 따라 부과, 생산량의 1/10 수취 • 특산물과 부역: 민호를 9등급으로, 인구를 연령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 - 특산물 : 각 민가에서 베(布) 등의 특산물 납부 - 부역 : 15세 이상 60세 미만의 정남을 대상으로 각종 부역에 동원 ② 발해의 조세 제도 • 고구려계 주민들은 주현제로 편제, 말갈계 주민들은 부족이나 부락별로 편제 - 고구려계 주민: 공식적인 행정 체계에 따라 조세, 부역 수취 - 말갈계 주민: 각 촌락의 수령을 통해 간접적으로 수취
4. 통일 신라와 발해의 사회 ∙ 경제 ⑶ 농업 활동 ① 통일 신라의 농업 활동 • 주요 생산물: 벼를 비롯한 공물, 채소와 과일, 육류, 수산물 • 상류층: 육류와 수산물 선호 → 섬에 목장 설치해 가축 기르기도 함. • 정부 - 논, 밭, 삼밭의 결수 조사 ∙ 기록 - 말, 소, 뽕나무, 잣나무, 호두나무 등도 별도로 파악 ② 발해의 농업 활동 • 특징: 기후가 차서 논농사에 불리 → 밭작물 주로 재배(조, 보리, 기장, 콩 등) • 특산물: 노성의 쌀, 책성부의 콩으로 만든 된장, 목축 성행(사슴, 돼지, 말 등)
4. 통일 신라와 발해의 사회 ∙ 경제 발해의 특산물 자료 보기 발해는 땅이 넓고 바다에 면해 있어 다양한 농산물, 축산물, 해산물, 광물 등이 생산되었다. 그 중에서도 콩, 돼지, 말은 인근에서 가장 유명하였다. ▲ 한카 호 중국과 러시아 경계에 있는 호수이다. 발해 시기에는 미타 호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붕어 산지로 유명하였다. ▲ 발해의 특산물
4. 통일 신라와 발해의 사회 ∙ 경제 ⑷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 ① 통일 신라 • 수공업: 공장부가 전국의 수공업 관장, 국왕이나 왕실 수요품 생산하는 관청 • 상업: 서시, 남시 개설(7세기 말), 감독 관청 설치(상행위 감독, 도량형 진위 판별) • 대외 무역: 당, 일본에 외국 물품 중계 무역, 국내에서 생산된 공산품 수출 ② 발해 • 수공업: 삼채 도자기가 유명 • 상업: 고구려와 비슷한 도량형 사용, 당과 일본의 화폐 출토(교역의 증거) • 대외 무역: 당, 일본 등과 교역하면서 경제적 이득 추구
4. 통일 신라와 발해의 사회 ∙ 경제 ⑸ 통일 신라의 사회 모습 ① 태종 무열왕 • 진골 출신의 왕 등장 • 유교 정치 이념의 도입: 불교식 왕명 → 중국식 시호 제도 ② 신분 표시 방식의 변화: 경위(수도 거주민)와 외위(지방민)의 구분 철폐 ③ 귀족의 생활: 대토지와 목장 소유, 관료전과 녹읍 또는 녹봉 → 경제적 여유 ④ 농민의 생활 - 연수유전 ∙ 답 소유하고 경작 - 민정 문서 통해 각 호별 인구 증감이 철저하게 관리 - 촌락별로 부과된 각종 조세와 부역의 의무(자기 토지의 소유권 보장) ⑤ 천민인 노비의 숫자는 많지 않았음.
4. 통일 신라와 발해의 사회 ∙ 경제 신라 수도 경주의 모습 탐구 활동 경주의 민가 자료 1 왕이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서울(경주)의 민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노래와 풍악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왕이 시중 민공을 돌아보며 말하기를“내가 들으니 지금 민간에서는 집의 지붕을 기와로 이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밥을 숯으로 짓고 나무로 짓지 않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하니 민공이 대답하기를“신도 일찍이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 -“ 삼국사기” ▲ 9세기경의 경주 복원도(국립 민속 박물관)
4. 통일 신라와 발해의 사회 ∙ 경제 신라 수도 경주의 모습 탐구 활동 경주의 35 금입택 자료 2 “신라 전성 시대의 서울(경주)에는 17만 8천 9백 36호, 1천 3백 60방(坊), 55리, 35개의 금입택(金入宅, 부유한 큰 저택)이 있었다. 이것은 남택, 북택, 오비소택, 본피택, 양택, 지상택(본피부), 재매정택(김유신의 종택), 북유택, 남유택(반향사 아랫마을), 대택, 빈지택(반향사 북쪽), 장사택, 상앵택, 하앵택, 수망택, 천택, 양상택(양부 남쪽), 한기택(법류사 남쪽), 비혈택(법류사 남쪽), 판적택(분황사 윗마을), 별교택(개천 북쪽), 아남택, 김양종택(양관사 남쪽), 곡수택(개천 북쪽), 유야택, 사하택, 사량택, 정상택, 이남택(우소택), 사내곡택, 지택, 사상택(대숙택), 임상택(청룡사 동쪽으로 못이 있음), 교남택, 항질택(본피부), 누상택, 이상택, 명남택, 정하택이다.” -“ 삼국유사”
4. 통일 신라와 발해의 사회 ∙ 경제 신라 수도 경주의 모습 탐구 활동 사절유택 자료 3 “봄에는 동야택, 여름에는 곡량택, 가을에는 구지택, 겨울에는 가이택이다. 제49대 헌강왕 때에는 성안에 초가집이 하나도 없었으며, 추녀가 맞닿았고 담장이 이웃집과 이어졌다. 노래와 풍류 소리가 길에 가득 차서 밤낮 그치지 않았다.” -“ 삼국유사” 1. 금입택과 사절유택의 성격을 알아보자. [정답] 금입택은 막대한 권세를 누리던 신라 왕경의 유력 진골 35인의 저택이다. 사절유택은 귀족들이 계절에 맞추어 놀러 다니던 별장을 가리킨다. 2. 위의 자료를 토대로 신라 귀족의 생활 모습을 재구성해 보자. [예시 답안] 신라 수도 경주에는 기와집이 즐비하고 유력자들의 금입택이 있었으며 그중 상당수는 계절별로 별장을 지어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는 당시 신라 귀족들이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4. 통일 신라와 발해의 사회 ∙ 경제 ⑹ 발해 사회의 도시와 촌락 ① 신분: 왕족과 귀족, 평민, 하층민(부곡, 노비)으로 구성 • 지배층: 왕족인 대씨와 귀족 • 평민: 성이 없었으며, 편호 또는 백성이라고 불렀음. • 천민: 성이 없었으며, 중앙 귀족이나 지방 수령 등에게 예속 ② 토인: 발해의 고구려인 • 도독, 자사, 수령과 같은 지방 행정직의 대부분을 차지 • 말갈 부락에서도 촌장이 되어 마을 직접 지배, 평민이나 기술직 종사자도 많았음. ③ 가족 제도: 일부일처제 ④ 장례: 왕족이나 귀족(능묘, 능원에 매장), 평민(공동묘지), 합장의 풍속
중단원 마무리 통일 신라의 지방 행정 조직에 대하여 써 보자. [예시 답안] 통일 신라의 지방 행정 조직은 크게 주 · 군 · 현으로 구성되었다. 수도(왕경)를 제외하고 큰 고을은 9주와 5소경으로 지정되었다.
2. 다음 글을 바탕으로 발해의 주민 구성에 대하여 서술해 보자. 중단원 마무리 2. 다음 글을 바탕으로 발해의 주민 구성에 대하여 서술해 보자. * 조건_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중심으로 서술할 것 그 나라는 사방 2천 리에 이른다. 주와 현 및 객사와 역참이 없고 곳곳에 촌락이 있는데 모두 말갈 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이 많고 토인이 적다. 모두 토인으로 촌장을 삼는데, 큰 촌은 도독이라 하고, 그 다음 촌은 자사라고 하며, 그 아래는 백성들이 모두 수령이라 한다. - “유취국사” [예시 답안] 발해의 백성은 말갈인과 토인으로 구분되었다. 토인은 고구려인으로, 지방 행정 구획에서 상위직을 대부분 차지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유민 전부가 집권층은 아니였고, 문벌 및 건국 사업의 참여 여부에 따라서 일반 양민 또는 기술직에 속하는 층도 적지 않았다. 말갈족 중에서도 건국 과정에 참여한 집단은 고구려 유민에 준하는 신분을 보장받았다.
문답식으로 풀어 보는 민정 문서 1933년 10월에 도다이 사에서“화엄경론질”의 겉장을 수리하던 중 신라 시대 4개 촌의 사정을 기록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2매로 이루어진 문서에는 4개 촌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지방 관리가 3년마다 촌의 상황을 조사하여 정리한 상황을 보여 준다. 오늘날 충북 청주 부근 4개 촌의 사정이 ① 촌의 이름과 넓이, ② 가구, ③ 인구, ④ 우마, ⑤ 토지, ⑥수목 등의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 민정 문서(일본 도다이 사 쇼소인)
가구 수를 어떻게 산정하였을까? 문답식으로 풀어 보는 민정 문서 신라에서는 개별 가구 1~3개를 합하여 공연(孔烟)이라고 하였으며, 각 촌에는 10~15개의 공연이 있었다. 공연당 인구는 8~12명 정도였다. 공연은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9등호제로 구분되었다. 신라는 이를 촌락별 점수인 계연(計烟)으로 환산하여 특산물 공납을 부과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2. 촌락의 인구는 어떻게 표시하였을까? 문답식으로 풀어 보는 민정 문서 촌민은 크게 양인과 노비,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 그 숫자를 기재하였다. 양인 남자는 15~60세의 남자를 정(丁)이라 하고, 양인 여자도 기록하였다. 전체 인구 462명 중에 노비가 25명으로 5.4%에 불과하였다.
3. 토지는 어떻게 기록하였을까? 문답식으로 풀어 보는 민정 문서 각 촌락에는 지목별로 토지 결수가 기재되어 있는데, 지목으로는 연수유전 · 답, 관모전 · 답, 내시령답, 촌주위답, 마전 등이 있다. 연수유전 · 답은 백성의 토지이고, 마전은 삼베를 공납으로 수취하기 위하여 설정한 토지이며, 나머지는 국가 직역과 관련된 토지이다. 네 촌락에는 총 310결과 248결 정도의 연수유전 · 답이 있어서 이를 기준으로 조세 액수가 결정되었다.
4. 가축과 나무의 숫자는 얼마나 되었을까? 문답식으로 풀어 보는 민정 문서 촌락 문서에는 공연당 2~3마리 정도의 많은 소와 말이 기재되어 있다. 이는 경작 활동에 소가 절대적으로 많이 필요하고, 이들 촌에 군마의 사육 의무가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촌락 문서에는 뽕나무, 잣나무, 호두나무 등의 숫자가 자세히 기재되어 있다. 이들 나무에 대한 파악은 특산물 납부를 위한 기준을 설정하는 것과 관련 있다.
통일 신라가 민정 문서를 작성한 목적을 발표해 보자. 문답식으로 풀어 보는 민정 문서 통일 신라가 민정 문서를 작성한 목적을 발표해 보자. 활동 [예시 답안] 통일 신라는 조세를 원활하게 수취하기 위하여 촌락 문서를 작성하였다. 통일 신라의 조세는 전조(田租), 특산물, 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므로, 그 대상이 되는 전답의 수, 양인 남자의 정(丁)을 기준으로 한 인구수, 가구당 경제 능력, 가축과 나무의 숫자 등과 그 증감 상황을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