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nd on 경호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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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on 경호의 선물

한바탕 출근 전쟁을 치른 후의 전철 안은 거짓말처럼 한산해졌다. 손님이라고 해봤자 나를 비롯해 10여 명도 채 안 되는 것 같았다. 출판사에 넘길 원고가 들어있는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느긋하게 조간신문을 펼쳐 들었을 때였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가 싶더니 한 여자가 전철 안으로 절뚝거리며 들어왔다.

"세상에",,,, 여자의 나이는 4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한쪽 다리는 심하게 절고 있었으며 얼굴은 화상의 흔적이 너무 끔찍해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난 공포영화 속에 나오는 괴물을 본 것처럼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애써 시선을 외면했다. 여자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자신 앞에 있는 승객 앞에 낡은 프라스틱 바구니를 조심스럽게 내밀며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저~~어",,,, 여자는 지금껏 지하철 안에서 보아왔던 여느 걸인들과는 어딘지 모르게 약간은 다른 듯 했다. 자신의 기구한 처지를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과장된 모션을 취해 손님들의 동정심을 유발시키지도 않았다. 그저 자리에 앉아있는 손님들 앞에 빈 바구니만을 조용히 내밀 뿐 이었다. 그러다 보니 누구 하나 선뜻 지갑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승객들 중 일부는 관심 없는 듯 시선을 돌리고 일부는 자는 척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한심하군,,,, 저래서야 어디 밥이나 제대로 빌어 먹겠어',,, 여자는 잠시 후 내 앞으로 다가왔다.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적잖은 고민에 사로잡혔다. 오늘은 출판사로 중요한 원고를 계약하러 가는 날이다. 그런데 아침부터 걸인과 마주한다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나마저 몰인정하게 외면하자니 여자가 너무 가여울 것만 같았다.

더구나 여자는 오늘 처음 구걸을 나온 것 같은데,,, 들고 있던 신문지를 바짝 잡아당기며 잠시 갈등하고 있을 때였다. 여자가 내밀었던 바구니를 성급히 다시 가져가며 나지막이 말했다. "죄,,,죄송합니다.,,," 여자를 다시 본 것은 그로부터 약 1주일 후였다. 출판사에 가기 위해 서울행 1호선 국철을 탔을 때였다. 그녀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차례대로 돌아가며 승객들 앞에 바구니를 내밀고 있었다.

백원 짜리 동전만이 몇 개 들어있는 낡은 바구니를,,, 승객들의 반응은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냉담했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도 실망하거나 낙담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밝게 웃으며 인사의 말을 건네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죄송했습니다.,,, 오늘 하루 좋은 일만 있으세요.,,,"

전철이 부천 역에 막 정차하려 할 때였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1천원짜리 지폐 한 장을 움켜쥐고 있는데 갑자기 저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잡상인 단속 반원들이 뜬 것이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들고 있던 바구니를 순간적으로 놓쳐 버렸다. 그러자 얼마 되지 않던 동전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와르르 바닥에 흩어졌다. 계속 딴전을 피듯 그녀를 외면하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동전이 떨어진 바닥으로 쏠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승객들은 모두 안타까운 표정들이었다.

여자가 달려오는 단속반원들과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였다. 한 아주머니가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주우며 승객들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뭣들해요?" 전철에 탄 승객들은 누가 먼저라 할 거 없이 허리를 숙여 자신 앞에 떨어진 동전들을 줍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앉았던 젊은이들 둘은 그 사이 단속반원들이 못 넘어오게 칸막이 문을 있는 힘껏 잡아당기고 있었다. 울먹이던 여자의 얼굴에는 어느새 안도감과 함께 엷은 미소가 미세하게나마 번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거의 주워 여자에게 건네주었을 때였다. 여자가 갑자기 울음보를 터트렸다. 동전만이 몇 개 들어있던 바구니에는 어찌 된 일인지 천원짜리는 물론이고 만원짜리 지폐 몇 장까지 수북이 쌓여져 있었다. 나를 비롯하여 전철 안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전을 주우면서 자신의 주머니에서 지폐 한 장씩을 꺼내 함께 바구니에 넣은 것이다. "여,,,러분 고,,,고맙습니다....정말로,,,,"

그로부터 약 1년 여 동안 난 여자를 볼 수 없었다. 글을 쓴다는 핑계로 잠시 시골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조석으로 찬바람이 솔솔 불어오던 어느 초가을이었다. 난 참으로 오랜만에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그 동안 집필한 원고를 들고 출판사로 가던 길이었다.

그녀의 옆구리엔 전에 없던 낡은 중고 카세트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그곳에선 귀에 익은 찬송가가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얼굴에 난 화상을 가리기 위해 길게 늘어뜨렸던 앞머리는 답답하다 할 정도로 더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그녀의 등 뒤에는 내 눈을 의심케 하는 전혀 뜻밖의 것이 매달려 있었다. 아기였다. 그것도 이제 갓 돌을 넘긴 듯한 갓난아기,,,, '그 사이에 애를 낳았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몰라보게 성장해갔다. 마치 밤낮없이 물만 빨아들이고 있는 시루 안 콩나물처럼,,, 반면, 그 아이를 등에 업고 다니는 그녀는 그에 비례하여 점차 힘에 부쳐 하기 시작했다. 얼굴에선 땀이 마를 날이 없었고, 절뚝거리는 다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위태롭기만 했다.

하지만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아이에 대한 그녀의 헌신은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복잡한 전철 안에서 아이가 아무리 칭얼대고 울고불고 난리를 쳐도 얼굴 한번 찡그리는 법이 없었다. 아이가 조금이라도 뒤척이는가 싶으면 어느새 품안으로 끌어내려 말없이 젖을 물렸고 소변이라도 누웠다 싶으면 얼른 전철 바닥에 주저앉아 새것으로 갈아 입히고는 했다.

한번은 그녀가 들고 있던 동전 바구니를 아이가 갑자기 채들인 적이 있었다. 대개 그러한 경우 순간적으로 짜증을 낼 법도 하련만 그녀는 불편한 한쪽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동전들만 말없이 주울 뿐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의 그러한 행동조차도 못내 사랑스러운 듯 살포시 한 번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그러자 내 옆 자리에 앉아있던 할머니 한 분이 탄식하듯 혼잣말처럼 그런다. "저 놈이 ,,, 지 에미를 잡네, 잡어..."

아이가 저 혼자 충분히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 큰 아이를 등에 업고 다녔다. 놀이기구라도 탄 것처럼 연신 뒤척여 대는 그 큰 아이를,,, 그녀는 구걸을 하는 도중에 얼마나 힘에 부쳤던지 몇 번이나 바닥에 털썩 주저앉곤 했다. 그때마다 아이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말 타는 흉내를 내기도 했고, 빨리 일어서라며 양 볼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는 아이를 바라볼 때마다 짓는 특유의 그 사랑스런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어떤 때는 아이가 아무 생각 없이 바닥에 소변이나 대변을 싸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도 그녀는 바닥에 쌓여있는 오물들을 말없이 훔칠 뿐 아이를 나무라거나 혼 내키는 법이 없었다. 다급할 때는 화상의 흔적을 가리기 위해 목에 두르고 있던 수건을 벗어서,,,

'저 여자, 저거 ... 아무리 자식이라지만,,,' 이제 승객들은 머리가 유난히 크고 뚱뚱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전철 안에 나타나면 으레 그녀가 뒤이어 등장할 것이라 지레 짐작했다. 녀석은 커가면서 정말이지 아무도 못 말릴 천하의 개구쟁이로 변모해갔다. 저 혼자 신나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요즘 한창 잘 나가는 개그맨 흉내를 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승객들을 상대로 엉덩이 춤을 추어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 승객들 중 일부는 몹시 당혹스러워 하거나 난처한 표정을 짓기도 하는데, 거의 대부분은 녀석의 재롱을 지켜보며 유쾌하게 웃거나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새하얀 박꽃처럼 티 없이 말고 깨끗한 웃음에,,, 그 누구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뻔뻔함과 배짱... 거기에다 자기 엄마 하나만은 끔찍이도 챙기는 나이답지 않은 효심... 이제 누가 뭐래도 녀석은 전철 안의 최고 재롱둥이이자 엔돌핀이었다. "허허 고놈 참! 하는 짓마다 어쩜 저리도 앙증맞고 귀여울까?"

언제부터인가 전철을 타면 주변부터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녀석을 찾기 위해서다. 아직 제대로 말 한번 붙여 보지는 못했지만 지루하고 짜증나는 전철 안에서 녀석을 보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고 어떤 알 수 없는 설레임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때는 녀석이 무심결에 저지른 행동하나 때문에 나까지 안타깝고 속상할 때도 종종 있었다.

녀석은 전철 안에서 또래 아이들을 발견하면 자신이 먹던 과자나 초콜릿 등을 주저 없이 내어 주곤 한다. 그러면 거의 대부분의 아이들은 별 생각 없이 녀석이 주는 음식들을 받아먹으려고 하는데, 그때마다 항상 옆에 있던 엄마들이 문제다. 녀석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면 마치 큰일이라도 날것처럼 한바탕 난리가 나기 때문이다. "야 너 저리 못 가! 더럽게..."

난 그때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면 그녀의 눈망울은 순간이기는 하지만 심할 정도로 흔들리곤 했다. 방금 전 보트가 휘젓고 간 호수의 잔영처럼,,, 한없이 불쌍하고 가여운 그녀에게 있어 녀석은 분명 하나님이 보내주신 가장 값진 선물이면서 기쁨이 틀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고된 삶을 더욱 고되게 만드는 무거운 십자가이기도 했다. 난 녀석의 얼굴을 보면 반갑기도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녀석으로 인해 그녀가 곤란한 상황에 빠지거나 힘에 부쳐 할 때면 특히 더,,,,

그런데 얼마 전에 있었던 작은 사건 하나로 인해 난 완전히 녀석의 왕 팬이 되도 말았다. 단속반원들이 나타나 그녀를 막 전철 밖으로 끌어내리려 하던 어느 날이었다. 녀석이,,, 그 코딱지만한 녀석이.... 단속반원들의 앞을 떡 하니 가로막으며 이렇게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저리 가! 우리 엄마야! 누구든 우리 엄마한테 손만 대면 내가 그냥 안 둘 거야"

강원도에 첫 눈이 내렸다는 소식을 접했을 무렵부터 어쩐 일인지 두 모자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혹시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그들의 행방에 대해 은근히 걱정하던 어느 추운 겨울날 아침이었다. 그 동안 계속 보아왔던 1호선 국철이 아닌 2호선 교대 역 앞 계단에서 우연히 녀석을 보게 되었다. 녀석은 차가운 바닥에 쪼그려 앉아 중풍환자처럼 바르르 떨며 저 혼자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 동안 전혀 씻지를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동상에 걸려서 그런지는 몰라도 손등이며 얼굴 등이 새까맣게 죽어 있는 상태로,,, 난 녀석을 일단 가까운 분식점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 후 따뜻한 우동 한 그릇을 시켜주며 물었다. 엄마는 어디 가고 왜 너 혼자 나왔느냐고,,, 그러자 녀석이 울먹이며 그런다. "엄마... 지금 아파... 아주 많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녀석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동을 보자 허겁지겁 입안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갑자기 멈칫하더니 들고 있던 나무젓가락을 슬그머니 바닥에 내려놓았다. 너무 배가 고파 아무 생각 없이 우동을 먹기는 했는데... 집에 혼자 두고 온 엄마가 불현듯 생각난 듯 싶었다.

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녀석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녀석과... 그녀와... 무슨 인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내가 그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줘야 할 때가 온 거 같다는... 왠지 그래야만 될 것 같다는... "배고프면 더 먹어... 엄마 걱정은 하지 말고..."

생전 처음 쪽방이라는 것을 보았다. 한 평 반정도 될 듯한 방안에는 잡다한 집기 약간과 낡은 이불 두 채, 그리고 중고 TV 한대가 전부였다. 거기에다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바깥 공기보다 더 차가운 냉기가 숭숭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며 벽이며 천장은 온통 까만 곰팡이로 도배하다시피 했다. 그녀는 심한 몸살감기에 영양실조까지 겹친 상태 같았다.

그 비대한 몸에 영양실조 라니... 우선 연탄을 사다 불을 지피고 도배지 대신 달력을 찢어 곰팡이로 가득한 벽면부터 덮었다. 찬 바람이 비집고 들어오는 창문은 근처 슈퍼에서 얻은 두터운 라면박스로 단단히 틀어막았다. 그러자 냉랭하던 방안엔 아쉬운 대로 약간이나마 훈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휴... 이제 좀 사람 사는 집 같네..." 그녀는 근처 약국에서 조제해온 약을 먹이기가 무섭게 또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마도 속이 허해서 더 처지는 것 같았다.

녀석에게 내일 다시 찾아온다는 약속을 하고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 할 때였다. 산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돼지 저금통 하나와 옆구리에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낡은 돼지저금통 두 개가 낡은 TV 위에 나란히 놓여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새 돼지저금통엔 동전만이 절반정도 차 있었고 낡은 돼지 저금통엔 동전과 지폐가 거의 같은 비율로 꽤 많이 채워져 있었다. 난 싱긋 웃으며 지나는 말처럼 녀석에게 한마디 했다.

"우와, 너 되게 부자다! 돼지저금통이 두 개나 되고..." 녀석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한번 저었다. 그러더니 동전만이 들어있는 새 저금통을 손으로 가리키며 그런다. 저건 자기 엄마 거라고... 자기 엄마...그 동안 전철 안에서 사람들에게서 돈을 받을 때마다 지폐는 생활비로 쓰고 동전은 따로 저 돼지저금통에 모았다고... 그런 후 저금통에 동전이 가득 차면 그 돈으로 떡국을 만들어서 이웃에 혼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돌아가면서 식사대접을 해 주었다고...

자기들도 비록 가난하여 하루 세끼 입에 풀칠 하기도 힘든 형편이지만 도움을 받았으면 당연히 남에게 베풀며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면서...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 지는 느낌이었다. 녀석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그 옆에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지저분한 돼지저금통은 또 무엇이냐고... 그러자 녀석은 대답은 안하고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만 한동안 계속해서 실실 지어 보였다. "그건... 비밀이야, 비밀...히히...

녀석의 이름은 경호... 경호였다. 우린 금새 친구가 되었다. 유난히 붙임성 많던 녀석은 날 친형처럼 잘 따랐으며 난 어려운 환경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그 누구보다 씩씩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녀석을 친 조카 이상으로 예뻐 해 주고 아껴주었다. 봄이 다시 찾아오고 남쪽 나라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는 뉴스를 막 접할 무렵이었다.

시골로 내려가 경호와 그녀를 소재로 한 소설을 어느 정도 써 나가고 있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잔뜩 젖어 있는 전화 속 목소리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그녀였다. "도...도와주세요...저를 좀..." 경호의 생모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경호에 관한 비밀들에 대해 담담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경호는 자신의 애가 아니라고... 어느 날 전철 안에 버려졌던 경호를 자신이 발견하고는 지금껏 남몰래 데려다 키운 것이라고... 호적에 이름도 올리지 않은 채... 그런데 그 동안 한번도 찾지 않았던 경호의 생모가 어떻게 알았는지 갑자기 나타나 경호를 자신이 데려가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 앤 ... 제게 전부예요... 그 애가 없으면 전....전..."

그녀의 간절한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경호는 얼마 후 생모의 집으로 보내졌다. 보내졌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빼앗겼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갔다. 생모란 여자에 의해... 그녀는 더 이상 살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무기력 하게 방안에 누워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은 채 시름시름 야위어만 갔다. 처음 한동안은 경호 이름을 부르며 헛소리도 하고... 미친 듯 울부짖기도 하고... 마른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상을 지르기만 하더니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자리에 누워 말없이 눈물만 떨구기 시작했다. 착한 그녀...너무도 착한 그녀다. 그렇게 고통스럽고 힘들어 하면서도... 경호가 보고 싶어 밤마다 피 눈물을 토해내면서도 하루는 내게 그런다. "우리 경호... 그래도... 보내줘야겠죠? 그 애를 위해서는... 아무래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 이런 가난하고 바보 같은 엄마보다는 ...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살기보다는... 그 쪽으로 보내서... 그래서... 한번만이라도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것이... 그런 것이... 아무래도..."

초복 지난 지 약 보름정도 흘렀을 무렵이다. 고심 끝에 경호가 다닌다는 초등학교를 한번 찾아갔다. 수업이 끝난 후, 힘없이 교문 밖으로 걸어 나오던 경호는 날 보자 와락 눈물부터 쏟아냈다. 집에 가고 싶었다고... 엄마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다고... 그런데 왜 이제서야 왔냐고... 녀석은 내게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 한동안 계속해서 엉엉 소리 내어 울기만 했다.

그러면서 그 동안 몇 번이나 예전 집을 찾아가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길을 잃어버려 파출소에 가야만 했다고... 자기 엄만 잘 있냐고...어디 아픈 곳은 없냐고... 당장 엄마 있는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한동안 난리가 아니었다. 이런 경호를 겨우 진정시켜 놓았을 때였다. 갑자기 코끝으로 심한 악취가 스며 들어왔다. "이...이게 무슨 냄새지?

경호의 가방에서 나는 냄새였다. 가방을 벗겨서 뚜껑을 한번 열어보자 검정 봉지 하나가 보였다. 이게 뭐지... 몇 겹으로 친친 동여매져 있는 봉지 안에는 뜻밖에도 닭다리 두개가 들어 있었다. 그것도 양념이 심하게 부패되어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그런 닭다리로... 내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경호가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그런다. "그거... 저 번에 ... 새엄마가 나 먹으라고 사준 거야... 근데 ... 엄마 생각나서 먹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새 엄마가 화장실에 갔을 때 몰래 봉지에다 담아서 가방에 넣어두었던 건데... 나중에...우리 엄마 만나면 그때 줄려고... 우리 엄마... 통닭 짱으로 좋아하거든...“ 경호를 집으로 데려다 주고 오는 길이었다. 망설임 끝에 평소 친분이 있는 변호사 선배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간의 일들을 설명하고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 였다.

그간의 얘기를 다 들은 선배가 그런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봤을 때 경호를 다시 그녀 곁으로 데려올 가능성은 거의 불가능 하다고... 그래도 난 몇 번이고 계속해서 간곡히 부탁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경제적 능력도, 환경도 다 중요하지만 누가 더 경호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키울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이젠 착한 사람들도 행복해져야 한다고... 이제 더 이상 아파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고...

그러자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선배가 담배 하나를 피워 물며 담담하게 다시 말문을 연다. "솔직히 이 싸움에서 이길 자신이 없다... 하지만 최선을 다 한다면...어쩌면 그것 정도는...." 사정이 딱하다며 무료로 변호를 맡아 주었지만 선배는 정말이지 최선을 다 했다. 1차 공판에서 쉽사리 결론 날 것을 선배 스스로가 최선이라고 생각한 3차 공판까지 어렵사리 끌고 갔다. 드디어 운명의 날이 찾아왔다.

생모에게 양육권이 부여될 것이 거의 확정적인 가운데 법원에서 이례적으로 경호를 출석하여 의견을 묻기로 했다. 만약 경호가 판사 앞에서 그녀와 살고 싶다는 확고한 답변만 해준다면 양육권은 몰라도 그녀의 조그마한 소망인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경호와 만나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양쪽 변호인들의 최후 진술이 모두 끝난 가운데 판사가 드디어 경호에게 물었다. "그래 경호는 지금의 엄마와 예전에 살던 엄마 중에서 누구와 살았으면 좋겠어?"

경호는 그녀와 생모 사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난 녀석이 주저 없이 그녀를 선택 하리라 확신했다. 그런데 경호 녀석... 어쩐 일인지 망설이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 동안 그녀와 구걸을 다니며 사람들에게 수도 없이 치이고 무시당하며 살았던 경호다. 그러다 이제 겨우 사람답게 사는 생활에 막 길들여지려던 참이었는데...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난하고 힘겨웠던 어두운 과거의 삶 속으로 다시 되돌아간다는 것이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닐 듯 싶었다.

그래도 난 경호를 믿고 싶었다. 지금껏 그녀가 경호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고 희생했던 것처럼... 이제 경호도 그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줄 때가 된 듯싶었다. 예전에 내가 두 모자를 위해 그러했던 것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는 상태에서 잠시 두 눈을 감고 있는데 경호가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서서히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전... 지..지금이 좋아요...거지로 살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죽어도..."

난 경호와 그녀를 주인공으로 해서 쓰던 소설 원고를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그녀는 오히려 잘 된 일이라며 담담해 했지만 난 한동안 경호녀석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로 지독한 삶의 회의감에 빠졌다. 그냥 모든 것이 다 귀찮아져서 시골로 내려가 술과 낚시로 세월을 허비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프다고 ... 죽기 전에 멀리 서나마 경호 얼굴 한번만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전화를 끊은 후 창 쪽으로 물끄러미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저 멀리 언덕 위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낯익은 캐럴송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내일이 벌써 크리스마스 날이네..." 전날, 하늘이 유난히 낮게 내려왔다 싶더니만 새벽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난 서둘러 서울로 향하는 첫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창 밖을 바라보니 참으로 많은 기억들이 아련한 흑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전철 안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의 기억부터 법정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경호의 모습까지... '세상에는 이런 인연도 다 있구나‘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했다. 버스가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눈이 하도 많이 와 걷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였다. 그녀를 찾아갈까 하다가 우선 경호부터 만나보기로 했다. 그녀가 지금 앓고 있는 병은 경호를 보아야만 나을 수 있는 병이기에...

'자기가 배 아파서 나은 자식도 아닌데...그렇게도 좋을까...그런 배신자 녀석이...그녀는... ‘ 서너번 길게 눌렀을 때였다. 그녀의 생모는 내가 누군지 확인하더니 일단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집안은 지나칠 정도로 깔끔하고 단정하게 정돈 되어져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 여자 결벽증이 있나... 거기에다 그 동안 불 한번 지핀 적이 없는 것처럼 실내 공기는 무척이나 차가우면서도 건조했다.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풀풀 새어 나올 정도로... 소파에 앉아 꽁꽁 언 손을 비비고 있는데 경호 생모가 커피 두 잔을 타 가지고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난 김이 은빛 실안개처럼 피어 오르는 커피잔을 양손으로 끌어안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겨...경호는... 지금 집에 없나요?"

그녀는 대답대신 보일 듯 말듯 살짝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웃음을 보이려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라는 것이 쉽게 설명이 안 될 정도로 무척이나 어색하고 쓸쓸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아무 말 없이 커피 잔에 입을 갖다 대던 그녀가 갑자기 털썩 고개를 떨구며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깨만 약간 들썩이는가 싶더니 나중엔 아예 통곡을 했다.

그렇게 얼마를 섧게 울었을까. 그녀는 말없이 방안으로 들어가더니 쇼핑백 하나를 들고 나왔다. 그러더니 쇼핑백을 내 앞에 내려놓으며 정말이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겨...경호...죽었어요...얼마 전에..." 우린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기나긴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그녀였다.

사실은 경호... 한창 양육권 분쟁을 하던 무렵에 갑자기 쓰러졌다고... 큰 병원에 가서 검사해 보니 악성 종양이 온 몸에 퍼져 얼마 못 살거라 그랬다고... 처음에는 이 사실을 경호에게 숨겼었는데 얼마 가지 못해 결국은 경호도 결국 알게 되었다고... 그러면서 그런다... 그 전에는 자신을 키워준 엄마가 보고 싶다며 매일 같이 밥도 안 먹고 울기만 하더니... 그 사실을 알고부터는 만나게 해 주겠다고 해도 오히려 싫다고...

자기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키워준 엄마가 많이 속상해 할거라고... 그러니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절대로 알려서는 안 된다고... 그 어린 것이 수도 없이 신신당부 하고 부탁을 했었다고 한다. 마지막 3차 공판 때 판사 앞에서 그렇게 말했던 것 역시 자신이 죽을 것을 이미 알고는 키워준 엄마에게 슬픔을 주지 않기 위해 그리 말한 것이라고... 그것 때문에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키워준 엄마에게 미안해 했었다고... '아! 경호... 이 나쁜 놈아!'

경호 생모가 건네준 쇼핑백을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안에는 경호가 쓴 듯한 몇 통의 편지와 토끼 모양의 분홍색 머리핀 그리고 언젠가 경호의 집에서 본 적이 있는... 옆구리에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큼지막한 돼지저금통 하나가 다소 곳이 들어 있었다. 난 망설이다가 유난히 손때가 많이 탄 듯한 한 통의 편지를 꺼내 조심스럽게 뜯어보았다. 금새 눈가가 흐려져 갔다. 기분 같아서는 소리 내어 울고만 싶어졌다. 경호 녀석이 너무나 어른스러워서.... 녀석의 그 해맑은 웃음이 너무도 그리워서...

'아! 경호야!'... Photograph by Park Si 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