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전의 한인 공산주의 운동 상황(1) 한인의 초기 공산주의 운동 시작 : 1917년 러시아혁명 후 / 시베리아 ’18.1월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결성 김철훈 중심 귀화한 이르쿠츠크 러시아 한인 ’18.6월 ‘한인사회당’ 결성 이동휘 중심의 귀화하지 않은 한인 두 조직의 차이점(반일독립 목표 동일) 김철훈 일파 : 볼셰비키 전선 동원 우선시 이동휘 일파 : 항일투쟁 전개 일차 목표
해방이전의 한인 공산주의 운동 상황(2) 1921. 1월 “한인사회당”, 상해로 근거지를 옮겨 ‘상해파 고려공산당’ 조직(이동휘,1919.8 임정 초대 국무총리) 1921. 5월 김철훈, ‘이’공산당 한인지부+이동휘파 이탈자 ‘이르쿠츠크고려공산당’ 조직 레닌 정권 의도, 통일된 한인을 대일방위전선 이용 두조직에 자금 제공 → 레닌정권에 경쟁적 밀착 →한인 독립운동조직에 심한 분열 ‘22.12 양파 합동을 종용→실패, 새로운 공산당을 만들기로 결정 12월 ‘코르뷰로’(코민테른 遠東總局내 고려국), ’24.3월 ‘오르그뷰로’(원동총국내 조직국)를 설치하고 국내당 결성에 착수 ※레닌, 단기목표-러시아 안전, 장기- 식민지민족의 독립투쟁과 반제투쟁 이용 ‘볼셰비키 혁명의 세계화’
조선공산당의 결성/해체과정(1) ’23. 6월, 서울에 ‘코르뷰로 국내부’ 확보한 코민테른은 좌익단체 정비, 이를 기반으로 ’23. 6월, 서울에 ‘코르뷰로 국내부’ 확보한 코민테른은 좌익단체 정비, 이를 기반으로 ’25.4.17 조선공산당 결성(코민테른 조선지부)/김재봉 ’25.4.18 고려공산당청년회(고려공청)결성/박헌영 ※국내 사상단체(화요회, 북풍회, 서울청년회, 무산자동맹)중 화요회가 주동 ★코민테른: 레닌 주도로 1919년 모스크바에서 창립된 국제적인 공산주의 조직/독∙소 전쟁 발발로1943년 해산 제 1차 조선공산당 사건(’25.11월) 김재봉/박헌영, 조직확대/공청원 모스크바 파견 및 훈련 진행 중 계획 탄로 전원 검거(신의주) 제 2차 조선공산당 사건(’26.6~8, 101명 검거) ’25.12월 제 2차 조선공산당/고려공청 결성 및 ’26년 6.10만세운동 참가 “3.1운동 재현”시도, 거사직전 탄로, 일망타진
조선공산당의 결성 / 해체 과정(2) 제 3차 조선공산당 사건(’28.2월) 제 4차 조선공산당 사건(’28.3월) 상해/서울파/ ’26년 대거 귀국한 일본 유학생 구룹(일월회) 등이 당 재건 시도 / 주도권 싸움(32명 검거), 지도부 붕괴 제 4차 조선공산당 사건(’28.3월) 3차 사건 시 검거 모면자 + M-L파 공산주의자 들 중심 제4차 조선공산당결성, 일제 검거작전 (170여명 검거), 지도부 붕괴 ※조선공산당, ’25. 4월 창당이래 4년 단명 끝 ⇒그 후 코민테른의 재건지령 의거, 지하 재건 전개, 해방 시까지 재건 못함
해방 전 김일성의 활동(1) 김일성의 출생/성장 출생 : 1912.4.15 현 만경대(평남 대동군)에서 출생, 3형제 중 장남, 집안은 지주집안의 묘지기 태어날 때 이름 : 김성주(金成柱), 기독교 집안, 부 김형직(숭실중졸, 서당교사, ‘조선국민회’참가 투옥), 모 강반석(장로의 딸) ’19년 만주로 가족 이주, 23년 평양 창덕학교 입학 (부모의 뜻, 평양 복귀) ’26 만주 화성의숙, ’27년 길림의 육문중학 입학 공산주의 사상 공부, ‘조선공산청년회’ 활동 ’29년, 반일활동 혐의/ 중국 군벌당국 체포 / 옥살이,퇴학 ’30년 봄, 출감 후 길림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 대원으로 활동( 金日成으로 개명) ’31년 초, 조선 혁명군 붕괴 후 공산청년동맹 요원 활동, 일국일당주의 원칙에 따라 중국 공산당 입당
해방 전 김일성의 활동(2) 김일성의 빨치산 유격대 활동(만주 지역) ’31.9월, 만주사변 발발, 중국 공산당은 만주성에 유격대 창설 지시(만주 전역,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유격대 창설 시작) ’32.4.25 김일성, 소수의 유격대 조직(백두산) ※’78년 이후 조선인민군 창군일로 지정 ’34년 동북인민혁명군의 정치위원으로 임명(22세) 유격대원들은 문맹율 80%이상, 중학 중퇴 학력은 인텔리/ 백두산에서의 유격대 활동 인정 ’36.3월 결성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3사장/ 7월 6사장(24세) : 유격대 인원 600명(조선인 과반수)
해방 전 김일성의 활동(3) 6사 사장 시절, 해방 후 김일성의 권력상승에 결정적 도움을 준 사건(2건) 길림성 장백현과 함남 북부 지방에 ‘조국광복회’ (반일 통일전선) 조직 확대작업 주도 보천보 전투(’37.6.4) 김일성, 100여명의 유격대로 보천면 경찰주재소 기습 (갑산군 보천면 보천리, 압록강변 위치, 한국인 208호, 일본인 26호, 중국인 2호가 사는 조그만 마을) 밤 10시경, 경찰주재소 기습사격, 면사무소, 면소방서, 보통학교 방화 / 거리 점령 친일파 부자집 / 상점 약탈(식량 및 일용품,약4천엔), 1시간 반 후 철수
해방 전 김일성의 활동(4) 보천보 전투 결과 전과 : 기습 당시 경찰주재소 경찰관 부재, 일방적인 사격/ 교전 무, 경찰관의 2살짜리 딸/일본 민간인 1명 유탄에 사망 동 전투를 김일성의 항일투쟁 역사 중 가장 빛나는 업적 선전(김일성 전기, 전과 미 언급) 일본군과 교전 무, 기습 / 약탈 사건 에 불과 당시 국내 언론, 이례적 / 대대적으로 보도 식민지 상황의 탈피 욕구 기인 동 사건 계기, 김일성 이름이 국내에 널리 알려짐 해방 후 그의 지도자 부상에 유리한 배경으로 작용
해방 전 김일성의 활동(5) 소련지역 유격대 활동 / 소련에 밀착 ’40.11월, 김일성 부대, 블라디보스톡 근처로 이동 ’38년 편제개편으로 1로군 2방면군 군장, 일본군 대토벌 작전으로 궤멸 직전, 소련 입경 ★ ’41년, 부하대원인 김정숙(’19년생)과 결혼, ’42.2.16일 김정일 출생 김일성 유격대, ‘소련 제88여단’으로 재 편입, 제88여단 제1대대장 (소련군 대위)으로 소련군 장성들과 접촉 계기 ★조르킨 소장(극동지역 KGB책임자, 부수상 베리아 심복)과 친밀, ‘김’의 ‘조선공작단’ 단장 임명배경 (공작단은 조선에서 당 건설 등 사업 추진 시 핵심역할 수행 : 북한 공산당 창건, 인민군 창설, 정부수립, 6˙25전쟁 등) ※ 김일성 전기에‘88여단 소속 / 소련공작단장 임명’사실 일체 언급 회피(정통성 시비 차단) ’45.9.19, 김, 88여단 부하들과 원산 입항(당시 33세)
<해방 직후의 북한 정세> 소련군대의 북한 진주 제2차 대전 중 소련, 극동에서 ’45. 8. 9 전쟁 개시 8. 11 25군 일부, 한만국경 넘음 8. 12 제1태평양함대의 해병대, 무저항 하 웅기항 점령 8. 14 청진항 상륙(일본군과 격전 후 점령) 8. 15일 일본군의 항복 선언 북한 진주한 제25군 지휘관들, 대북 비전문가이나 절대통치자로 군림 3인(로마넨코 소장, 이그나티에프 대령, 레베데프 –2명은 북한의 소비에트화를 구상한 중심인물)은 김일성을 최고 권력자로 만든 인물
해방 후 공산당 재건/김일성 등장(1) 서울,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 착수 북한지역, 공산당 재건 상황 ’45.8.16 과거 공산당 이탈자들 ‘장안파 조선공산당’ 결성, 소위 정통파 공산당과 비교 박헌영 일임하고 해체 ’45.9.12 정통파 공산주의자들이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 조직, 9.22일 ‘재건당’ 이라 명명 북한지역, 공산당 재건 상황 ’45.10.13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서북 5도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 개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 결정(책임비서 김용범) 12.7-8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3차 확대회의 개최(평양) : 33세의 김일성을 책임비서로 선출 ’46.6월 소련군, 북조선노동당/남조선노동당을 대등하게 분립/ 조직(박-김 대등 지위)
해방 후 공산당 재건/김일성 등장(2) 스탈린이 김일성을 선정한 이유 소련에서 정치훈련 경험 / 크렘린에 순종할 철저한 스탈린주의자라는 점 ★ 처음에는 김일성 / 박헌영 동시 추천 김일성은 소련 시민권 소유자, 소련 공산당 입당, 소련군에 입대한 경력 ※ 소련입장, 김일성을 북한 공산화를 위한 대리관리자 / 적임자로 인식
해방 후 공산당 재건/김일성 등장(3) ’49. 6월, 평양에서 남∙북한 노동당이 합당, ‘조선로동당’ 결성 김일성은 중앙위원장, 박헌영은 2인 부위원장 중 1인이 됨 : 두 사람 갈등관계 정리 ’48년, 남북한에 각기 독자적 정부 수립, 남한 내 공산당 활동의 불법화로 남로당 계열은 월북 한국전쟁 종결, 박헌영은 반당분자 / 미국 간첩 혐의로 사형(’55.12월, 정적 제거) 공산주의운동의 주도권은 소련의 지시를 받는 김일성에 의해 주도 ※참고 : 해방 당시 북한 내, 공산주의운동 거의 미 존재 *북한인구 940만명(기독교인 370만/공산주의자 4,530명)
공산당 내의 파벌 및 분화 당 건설 초기, 당의 권력구조의 다양화 해방 당시 북한지역 내 지도세력으로의 부상 조건 다양한 좌익세력을 하나의 정치연합 형태 해방 당시 북한지역 내 지도세력으로의 부상 조건 첫째, 일제 식민지하 민족해방운동 경력 둘째, 소련군이 진주한 이상, 기본적으로 좌익 성향 필수 북한 지도부, 출신별 4개의 세력 혼재 국내파, 연안파, 소련파, 빨치산파
북한 지도부 내 4개 세력(1) 국내파 연안파 일제하 국내에서 공산주의 활동 전개 1920년대 조선공산당 시절부터 활동, 김용범, 박정애외 국내파들은 파벌과 관련된 자로 낙인, 김일성에 의해 ‘종파분자’로 비판 / 숙청 연안파 일제하 중국 연안지방 중심, 중국 공산당 아래서 항일투쟁 전개 세력 투쟁경력/명망성/고급의 인적 자원이 풍부한 집단 항일투쟁과정에서 조국과 연계된 점이 없는 약점
북한 지도부 내 4개 세력(2) 소련파 소련이 북한에서의 정책추진에 활용 목적으로 ’45년 가을, 소련국적 한인 다수 북한에 파견(약 200명) 원천적으로 북한 정치과정에서 주역으로 등장 한계(민족해방운동 경력 결여) 빨치산파 김일성을 중심, 만주, 조중 국경지방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빨치산운동 세력(일명 만주파, 또는 갑산파) 김일성, 최용건, 김책, 강건, 김일 등 만주/88여단 항일유격대 출신
4개 세력간 갈등관계 ’40년대말까지는 4개 정파간 갈등이 표면화하지 않음 (소련 군정의 조정) ※ 내면적, 상호 경계 / 비난 국내파 →연안파/소련파를 망명자에 불과, 평가 절하 빨치산파 → 소련파를 사이비 조선인 간주 소련파 → 빨치산파를 교육도 못 받은 집단으로 업신여김
북한의 공산화 과정(1) 공산화 1단계 : 순수한 연립정부 형태 공산화 2단계 : 위장된 연립정부 형태 ’45.8월, 북한 전역 ‘임시인민위원회’ 조직 로마넨코 소장 주관하 좌우 연합체로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좌우동률로 조직(위원장 조만식 추대) ※민족주의 세력과 일시적 연합, 권력 장악 시 기본전술(러시아의 노농동맹, 모택동의 연합정부), 조만식 인기 이용 공산화 2단계 : 위장된 연립정부 형태 ’45.10.13 평양,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조직 ※북한, 이 조직이 M-L주의 원칙하 최초의 공산당 주장 11. 3일 민족주의 세력, ‘조선민주당’창건(당수:조만식)/영향력 급속히 팽창, 빨치산파 주요당직에 보직/와해공작 전개
북한의 공산화 과정(2) 공산화 3단계 ; 공산당 일당지배체제 확립 ’46.1.5일 조만식 설득, 신탁통치안 지지 요구, 실패하자 조만식 연금, 북조선 민주당열성자 대회 개최/공산당원 대거 입당 ’46. 2.8일, 현 북한정권 모체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조직, 레닌주의적 일당체제 확립 · 3. 5일 토지개혁, 지주계급 경제기반 박탈 · 8.10일 전기, 교통, 운수, 체신, 은행 등 국유화 ’46.8.28일, ‘북조선 로동당’ 창당, 일당독제체제완성….3단계 완성
북한의 공산화 과정(3) ’46. 11. 3 도,시,군 인민위원회선거(북조선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 추천의 단일후보,흑백함 투표)로 인민위원 선출, 이들과 북로당, 민주당 등의 대표들이 가결⇒’47.2.21일 ‘북조선 인민위원회’ 조직 48. 7. 9 (‘48. 5.10 남한 총선거) 북조선인민회의(5차)에서 헌법초안에 기초 정부수립 및 남북 총선거 실시 결정 ’48.8.21 남한지역 비밀지하선거로 인민대표1,080명선출, 해주에서 남한측 몫 대의원 360명선출 (5만명당1명) ’48.8.25 북한지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99.97% 참가 98.49%찬성) 212명 선출 ⇒ 최고인민회의 (572명) 구성, 9.2일 회의개최, 헌법 채택 9. 8일 헌법 선포, 9.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오늘의 북한정권
한반도 공산화 시도 / 6.25 남침 6.25 전쟁의 원인 6.25 전쟁 발발 배경 6.25 전쟁 발발 과정
6.25의 원인(1) 해방 이후 미.소의 ‘분할점령’ (기본적 원인) 카이로 선언(‘43.11.26 /12.7), 완전 독립 전 과도조치로 4개국 신탁통치안 합의 포츠담 회담(’45.7.26),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소련군과 미군의 활동영역으로 분리 합의 (’45.8.9일 소련은 극동에서 전쟁 개시) 2차대전 종결, 미.소의 한반도 분할 점령 모스크바 3상회의(‘45.12.16-25), 신탁통치안 채택, →두개의 정권 잉태, 분단의 장기화 초래 * 반탁운동, 한국문제 국제연합에 이관(미국 직접적인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의도) ※ 미/소의 대한반도 군정 차이: 소련- 북한을 ‘소비에트화’ ,한반도 전체 혁명 위한 기지화, 미국- 현상유지정책으로 남한국민의 정치적 요구에 대응 못함
6.25의 원인(2) 남 ∙ 북한 ‘유일 합법정부’주장, 자기 측 체제 /통치 상대방에게 확장 하 통일 달성 표방 남한 : 헌법에 한반도 전체를 영토로 규정, 이의 회복을 통일과 동일시 ♣ 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북한 : 헌법에 서울을 ‘통일조선’의 수도로 규정, ‘남조선 해방’을 통일과 동일시 ※ 상대방이 ‘붕괴 / 소멸’조건하 통일 성취(6.25 중요 원인 제공) 에치슨 독트린 발표 미, 태평양 방어선에서 한국 제외 발표 북한, 전쟁감행 시 미군 미 개입 확신 월등한 북한 군사력 남한 대비 월등한 군사력 우위에 자신감 견지
6.25의 원인 (3) 북한정권 내 주도권 경쟁 박헌영 중심 남로당계는 권력기반인 남한해방이 ‘지위를 만회하는 길’이라 믿음 ‘45,10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설치 시 까지 김일성 등 북한 공산주의자들 박헌영의 서울 지도부에 복종 천명 소련 후원 남북 별도 노동당이 결성되면서, 박,김 역전 남한 내 산악 피신 공산주의자 및 북한에서 파견된 빨치산들의 활동에 대한 과대평가 ’46년 10월 폭동, 남로당 지하로/가담자 산악지대 피신 ※국제냉전체제 영향 / 북한 내 권력구조 경쟁 / 남북대결 과정에서 ‘인민해방전쟁’ 명분
6.25 전쟁 발발 배경 해방 이후 북한 진주 소련군에 의한 북한에서의 소비에트화 정책 연장선, 한반도 공산화 해방 이후 북한 진주 소련군에 의한 북한에서의 소비에트화 정책 연장선, 한반도 공산화 김일성의 의지: ‘인민해방전쟁’형태를 취해서라도 전 한반도 공산혁명 달성 스탈린의 야망 : 소련세력을 전 한반도에 확대 모택동의 대미 경계심 : 중국 공산화 완수에 미국의 국민당 정부에 대한 군사적 후원 견제
전쟁 발발 과정 (러시아 대외정책 문서) 1949년 김일성, 남한 내 빨치산의 게릴라활동이 퇴조하는 것을 보고 무력침공계획 굳힘 3월, 김일성 소련 방문, 스탈린은 남한군 대비 절대적 군사력 우위 강조(4천만$상당 무기공급동의) 8월 김일성, 소련측에 구체적인 남침 제의 / 지원 요구 / 소련 반대 ’50.4월 초 김일성 소련 방문, 스탈린(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했다고 판단) 동의 / 중국의 동의 강조 5.13 김일성 중국 방문 /모택동, 미 참전시 지원동의 6.25일 남침 (중, 10. 2일 참전결정/ 소련, 전투기 200대 지원)
♣ 수고 했습니다 ☻ See You Next Week.
산 업 혁 명 산업혁명? 영국, 소규모 수공업적 생산 방식 →대규모 공장제 생산방식으로 전환 <수요 급증, 좀더 빨리, 많은 물건> 기계의 탄생 1733년 존 케이 “자동베틀”, 실 공급이 문제 1764년 하그리브스 “다축 방적기”, 아크라이트 “수력방적기”→1779년 “뮬 방적기”, 1787년 말이 끄는 “동력직조기”, ★수력 한계(물에 제한 받지 않는 동력 필요) 1769 제임스 와트 “증기기관” 공장제 생산. 교통수단 1814 스티븐슨 “기관차”, 1819년 미, 풀턴 “기선” ※사회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만듬. 자본주의 사회(자본가와 노동자), 사회주의 사회(비참한 노동자 생활) ♣
러시아 혁명 2월 혁명 브루실로프 공세 실패(1916.8) 후 기술 / 장비 부족을 인간 생명으로 보충 처사 비난 노일전쟁 치욕적 패배 / 1차 대전 연속적으로 패배한 짜르(Tzar)정부 불신, 황제 타락에 분노 ‘17. 3.12 노동자, 병사 등 좌익대표 소비에트 결성, 황제 폐위, 케렌스키 수상/국방상/해총장 겸, 임시정부수립, 단위부대 병사위원회 조직, 장교 과반 파면, 병사 무제한 자유 ⇒ 실질적 전투능력 상실 10 월 혁명 리가 점령으로 수도 위협, 혁명당파간 경쟁격하, ‘17. 11. 6 볼셰비크파 반란, 임시정부 타도 소비에트 러시아 수립
만주사변(滿洲事變) 1931. 9. 18 유조구사건(柳條溝事件)으로 시작된 일본의 만주침략전쟁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폭살사건 후 아들 장학량(張學良)이 국민당 합세 / 일본에 저항 소련의 경제발전 등에 자극 받은 일본 ‘만주를 식민지화하여 주요자원과 군수물자의 공급처’로 만들 필요성 제기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 중심으로 만주침략 계획 모의, 봉천(奉天) 외곽 유조구에서 자기네 관할 만주철도 파괴/ 중국 소행 트집 철도보호 구실로 군사행동 개시/ 만주전역 점령, ’32. 3. 1 괴뢰 만주국(滿州國)을 세워 실질적인 지배권 행사 중국, 국제연맹 호소, 국제연맹 조사/ 일본군 철수 권고, 일본 거부/ ’33. 3월 국제연맹 탈퇴, 중·일 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킴
중 ∙ 일 전쟁 1937.7.7 북경 교외 노구교에서 일본군의 도발로 시작 1937.7.7 북경 교외 노구교에서 일본군의 도발로 시작 일본 : 30만 정규군, 만주인 / 몽골인부대 15만, 200만 예비군, 세계3위 해군력과 육∙해군항공대 지원 중군 : 숫자상 200만,무장 10만 미만, 원조로 보급문제 해결, 해∙공군 전무 ★1937년 일본의 침략으로 일어난 중국과 일본간의 전쟁을 일본에서는 지나사변(支那事變)으로 표시,. 중국인을 "지나인"(支那人), 중일 전쟁을 "지나 사변" 등으로 경멸의 뉘앙스
중 ∙ 일 전쟁 일본은 주공 만주국(기 점령), 조공 상해방면 9 월 주공 남진개시, 중국군 저항 / 야간 게릴라 활동으로 11월 지지부진 8 월 시작된 상해 전투 예상외 격렬, 12.13 남경 점령 ※일본은 첫해 성과에 실망 ‘장’이 중국 내분을 통합하기 전에 중국 군사력 분쇄. 일본경제에 부담이 되기전 종료 희망 중국은 시간 벌기 위해 공간포기 등 전투 회피로 일본군 의도 좌절 1938. 5 서주/ 9 한구(수도)점령, 게릴라 활동 격화/미 원조 증가 ※일본의 2년 내 승리 의도 좌절 :1939 최소 군사력으로 전략적 요충 점거하는 봉쇄전술로 전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