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와 정치 제4강. 제2공화국: 4.19 혁명과 정치적 혼란 신라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이 동 윤
1. 허정 과도정부와 의원내각제 개헌 1) 4․19 혁명 이후 정치적 상황 ○ 허정 과도정부 탄생: 이승만은 4․19 혁명 5일전 1960년 4월 14일 허정을 외무 장관으로 발탁 → 이로부터 1960년 8월 8일 제2공화국 국회 개원까지 과도정부 수립 - 1960년 4월 27일 과도내각 구성 → 개혁적 인사 부족 - 1960년 5월 3일 5대 시정방침 발표 → 반공정책을 유지하고, 부정선거의 처벌 대상을 고위책임자 및 잔혹행위자로 국한하며, 정치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완수하겠다는 취지: - 사실상 허정 과도정부의 정치적 역할과 기능은 ⅰ) 선거내각으로서의 과도정부 역할: ⅱ) 혁명 주도세력과 자유당의 기득권 세력 사이 완충지대(bumper zone) 역할: ⅲ) 자유당의 구 정치세력들이 그대로 존속하여 자유당 정권의 수정판에 불과: ○ 결국 허정 과도정부의 기본적인 성격은 ⅰ) 보수성, ⅱ) 소극성, ⅲ) 비혁명성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2) 제2공화국 수립을 위한 개헌절차에 대한 논쟁 ○ 선개헌 후선거(先 改憲 後 選擧) vs. 선선거 후개헌(先 選擧 後 改憲) 주장: ※ 결과적으로는 당리당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선개헌 후선거의 방향으로 일단락: 이를 통해 제1공화국의 자유당 기득권세력을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됨 3) 대통령중심제 대 의원내각제 논쟁과 개헌 ○ 정당 및 정파에 따른 입장 차이: - 자유당: 국회 내에서 민주당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 및 의원내각제 개헌 합의에 따른 정치적 생명 연장 시도 - 민주당 구파: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에서 조병옥 후보의 사망 이후 마땅한 대통령 후보가 없는 입장에서 의원내각제 선호 - 민주당 신파: 3․15 대통령선거 결과 부통령에 당선되었던 장면을 중심으로 대통령 중심제 선호 ※ 결과적으로 민주당 각 정파와 자유당세력 사이 타협의 산물로서 의원내각제 개헌 합의
4) 1960년 6월 15일 의원내각제 개헌의 주요 내용 ○ 한국 최초의 의원내각제 헌법 -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형식상․의전상 최고책임자(실권적 권한은 없다) - 총리는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모든 실권을 갖는다. - 단, 대통령은 총리의 임명권을 갖는다(구파․신파 사이의 불행과 갈등의 씨앗) ○ 한국 최초의 양원제 의회 구성 - 의회 상원 성격의 참의원과 하원 성격의 민의원으로 양원제 구성 - 입법과 행정 사이의 권력 분립 → 입법의 견제기능 강화 ⅰ) 국무원(내각)은 민의원에 대해 연대 책임을 갖는다 ⅱ) 의회는 총리에 대한 임명동의권(총리인준권)을 갖는다 ○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강화 - 공무원 및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 조문화 - 중앙선거관리위원회를 헌법기관으로 설치하여 독립성 보장 ○ 국민의 기본권 최대한 보장 - 4․19 혁명과 민주화 이후 가장 신장된 사항 - 집회․결사․표현의 자유 최대한 보장:
5) 1960년 7월 29일 의회선거와 제2공화국 정부 구성 ○ 1960년 7월 29일 제5대 의회선거 (민의원․참의원선거) - 선거과정에서 자유당 및 그 출신세력과 민주당의 선거공약은 별반 차이 無 - 일부 개혁주의 정당들이 정치․경제적 개혁을 주장하였으나 세력 약세 - 선거결과 민의원 233석, 참의원 58석 중 ․민의원: 민주당 175석(75.12%: 자유당 출신 무소속 49석, 자유당 1석) ․참의원: 민주당 31석(53.45%: 자유당 출신 무소속 20석, 자유당 4석) - 민의원에서 민주당이 전체 75.12%를 석권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여당이 됨 ○ 1960년 8월 8일 제2공화국 국회 개원과 정부 구성 - 민주당의 경우 대통령 후보: 윤보선, 총리 후보: 김도연 주장 - 투표결과 대통령에는 윤보선 당선, 총리에는 김도연 부결 (111 vs. 112): 당시 김도연은 정당내각제, 장면은 거국내각제를 주장 - 민주당은 장면을 총리 후보로 하여 재투표 당선 (117 vs. 107): 장면은 군소정 당 및 무소속 의원들을 거국내각제 주장으로 끌어들여 당선 유도 ※ 이후 장면은 그의 제1차 내각 구성에서 거국내각제 공약을 깨뜨리고 자파 중심 으로 내각을 구성하여 민주당 구파 및 일부 좌파세력의 반발 초래
2. 제2공화국 출범과 정치적 혼란 1) 제2공화국 민주당 정권의 당면과제 ① 민주당 내부의 구조적 한계 극복: - 민주당의 분열: 대통령과 총리 선출을 앞두고 윤보선 중심의 구파와 장면 중심의 신파로 대립 → 총리인준 이후 장면 총리는 내각 구성과정에서 구파와의 약속을 배신 - 대통령은 실권은 없으나 총리임명권을 지니고 있으며, 총리는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 갈등의 씨앗을 잉태 ← 대통령과 총리 사이의 상호 견제와 갈등 유발 - 국회는 총리인준권(임명동의권) 발동: 의회 내부의 파벌화 조장 - 분당과 신민당 창당: 1961년 2월 20일 민주당 구파는 장면 총리의 파행적 정국 운영에 불만을 품고 소속의원 65명으로 분당하여 신민당 창당 ② 의회 내부의 파벌성과 이질성 극복: - 민주당 신․구파 사이의 정권 경쟁 - 그밖의 구 한민당 세력과 자유당 잔존세력, 이승만 추종세력, 혁신계 정당 등이 존재하였으며, 사회대중당 등 일부 혁신계 정당의 대두: - 결과적으로 국회 내에서 민주당과 신민당 사이에 정치권력을 둘러싼 갈등 심화
2) 민족적 민주주의 대두와 통일 논쟁 ○ 당시 민주당의 통일정책은 ⅰ) 제1공화국 이승만 정권하에서 투쟁 아닌 투쟁(권력투쟁)을 하면서 통일문제는 논의 사안에서 소외되어 민주당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ⅱ) 한국전쟁의 종결 이후 7년이 경과한 시점에서 남북협상과 통일에 대한 논의는 현실성이 부족한 것으로 인식 ⅲ) 민주당 지도자들의 통일인식 부족: 예] 장면 총리의 기자회견 내용 ○ 소련 후르시쵸프의 민족적 민주주의 선언 - 제3세계는 비동맹주의에 입각하여 적극적 중립을 주장해야 한다: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 보급에 대한 견제 및 사회주의세력 확산 유도 - 비동맹을 통한 민족적 자립과 민족․통일국가 수립 - 이후 남․북 협상론은 중립화통일론으로 발전
○ 통일 논쟁: 남북협상론 → 중립화통일론 - 1961년 5월 5일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결성: - 1961년 5월 이내에 통일 논의를 위한 남․북 학생회담 개최 제의 - 이에 대해 북한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결성으로 화답 - 통일 논쟁을 둘러싼 이념적 투쟁의 양극화 현상 초래 - 반(反) 냉전적 개혁주의 세력의 민주화 요구 및 중립화통일론 vs. 보수․자유주의 세력의 냉전적 정치이념과 강력한 반공 의지 ○ 군부 내부의 동요와 반발 - 제2공화국 정부는 군부에게 있어서도 무능한 존재로 비치어짐 예] 장면 내각의 출범 이후 내무부 장관이 3차례 교체 등 예] 민주당 정권의 수립 이후 일평균 7.3회의 데모와 시위 - 군대 감축설에 따른 정책의 일관성 부족: 25만 감축론 → 16만 감축론 → 현상유지 - 미(美) 군사학교 출신 장교들에 대한 특혜와 우대: 진급의 불공정성으로 불만 - 군 내부의 군부정화론 대두: 군대 내부의 신진세력들이 정권을 교체하여 사회를 평정하자는 주장
○ 제2공화국의 정치적 혼란과 한계 ① 민의원의 75%를 차지하며 집권 여당이 되었으나, 구조적으로 행정력 미약 ② 의회 내부의 파벌성, 이질성 등에 기인하여 정치적 혼란 초래 ③ 정치적 청산의 부족: 혁명 이후 반혁명세력의 숙청 부족 → 자유당 잔존세력의 정치권 유입 ○ 제2공화국 장면 정권에 대한 평가 ① 서구의 고전적 자유민주주의 이상에 충실: 보수주의의 이념적 성향 - 국민의 기본권 신장 및 민간사회세력의 정치참여 보장 - 반공이념 수호 ② 행정부의 통제력 상실: 민(民)과 군(軍) 두 정치세력 사이에서 갈등과 방황 → 이것도 저것도 아닌 행정의 효율성 미약 ※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은 전반적으로 국민들의 정치적 욕구에 대한 행정적 이행 능력이 부족하였으며, 정권의 정통성은 부여받았으나, 체제적 효율성을 발휘 하지 못하였다.
3. 5.16 군사쿠데타와 제2공화국의 몰락 1) 5․16 군사쿠데타 개관 ○ 1961년 5월 16일 군부 소장파인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육사 5기와 육사 8기 (김종필, 이후락, 김형욱 등)가 주동이 되어 군부쿠데타 발생 ○ 이미 그 이전부터 쿠데타 기도설이 노출되어 정보기관의 사전 검열을 받고 정군 숙청사건 발생 → 장도영 준장을 참모총장으로 교체 → 장도영은 쿠데타설에 대해 묵시 : 4․19 혁명 1돌에 즈음한 쿠데타 1차 모의가 배신으로 진압된 이후 5월 16일 쿠데타 결행 ○ 쿠데타 이후 미국의 부정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세력은 국방부 장관 및 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병력동원을 추인 (사후 승인); 당시 장면 총리는 혜화동 성당으로 피신하여 잠적 ○ 윤보선 대통령의 사임 이후 국가재건혁명회의가 설립되어 제3공화국 수립 주도
2) 5․16 군사쿠데타의 배경 (군부의 동요) ① 군부의 파벌화: 당시 군부는 ⅰ) 박정희 등 구 만주군 출신의 장교집단, ⅱ) 일본 정규육사 및 전시장교 출신의 구 일본군 출신 장교집단, ⅲ) 광복군, ⅳ) 임시정부와 대한 독립군 출신의 장교집단 등으로 구성 → 특히 ⅰ), ⅱ)와 ⅲ),ⅳ) 사이는 서로 이질적 성격으로 대립 ② 차별적인 진급인사: 미국 군사학교 출신의 우대를 통한 진급의 차별성 → 이승만 대통령의 사대주의 적 미국 선호사상에 입각하여 미국의 군사교육을 받은 장교나 통역장교들이 진 급의 우선순위 결정 → 정규육사 출신 장교의 배출 이후 진급 적체와 누적 ③ 군부에 대한 멸시: 제1공화국 시기부터 군부를 하층세력으로 간주하여 정치적 소외감 ④ 군부감축설 대두: 25만에서 16만 감축설 이후 현상유지 → 군부 내부의 불만과 위기감 조성 ⑤ 학생세력의 중립화통일론에 대한 군부의 우려: 민주당의 우유부단은 학생세력 을 용공세력으로 보는 군부를 불안케 함
3) 5․16 군사쿠데타의 성격 ① 개인적 동기의 측면: 미국 군사학교 출신만 우대하는 현 정권에 불만을 가진 군부 소수세력의 반정권운동(쿠데타)이라는 시각 ② 집단적 동기의 측면: 군부의 존립 근거인 반공이념에 입각하여 제2공화국의 총체적 위기에 대한 군부의 대처라는 시각: 당시 군부는 자신들이 가장 합리적 이며 근대적인 조직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자처 (신직업주의) ※ 군부는 자신들은 반공이념이 철저하고, 가장 근대화된 조직이며, 反정치적인 집단이기 때문에 그들 자신에 의한 정치개혁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주장 ※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5․16 군사쿠데타의 혁명공약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① 철저한 반공정책 ② 유엔(UN) 헌장 준수 (즉, 미국 등 자유 우방국들과 우호 증진) ③ 국정 타개 ④ 국가 재건과 민생고 해결 ⑤ 국토 통일 ⑥ 안정 이후 민정이양 등
4) 5․16 군사쿠데타의 정치․사회적 영향 ① 박정희를 위시한 군부세력은 선(先) 정권획득, 후(後) 정당화의 상황적 논리에 따라 군사쿠데타를 유발함으로써 이후 한국의 정치과정에서 상황적 논리에 따른 부정적 전통을 수립 예] 삼선 개헌, 유신헌법 처리, 제5공화국 수립 등 ② 정치논리에 군부논리가 유입: 안정과 근대화 추진이라는 명목 아래 권위주의적 군사문화가 정치권으로 유입 → 상명하복의 계급구조, 엘리트 의식, 군부의 이데 올로기가 민간의 이데올로기로 진화 ③ 천대받던 군부가 엘리트로 급성장: 군부의 위상 강화 및 정권 창출 → 이것은 이후 제5공화국 수립까지 이어진다 ④ 정치군인의 탄생 → 정치권력을 추구하는 군사문화 만연 (예] 전두환․노태우 등)
4. 제2공화국의 몰락 원인 1) 군사쿠데타의 발생: 이것은 정치체계 내부의 문제가 아닌 외부의 문제로서 민주화과정에 있어서 정치권력의 구조적 시행착오로 혁명의 완수를 이룩하지 못하고 사회적 혼란을 초래함으로써 군사쿠데타의 빌미를 제공 ← 내부적 원인에도 불구하고 외부적 외압 작용 2) 정부의 무기력: 정치권력의 관점에서 제2공화국의 행정권은 전체 기간 동안 그 효율성이 미약하여 그 자체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상쇄시켜 나갔다. 특히 국민의 기본권은 너무 지나치게 신장된 반면, 정부의 공권력은 지나치게 무기 력화되었다. 3) 정치적 지도력 부족: 민주당, 특히 장면 정권의 정치적 지도력이 극히 미약 하여 국민들의 구심점을 제공하지 못하고 좌충우돌 하였다. 특히 5․16 군사 쿠데타 이전부터 나돈 쿠데타설에 대한 대응이 부족했고, 쿠데타를 진압하려 는 미국 측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은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쿠데타의 조기 진압 에 실패 4) 민주적 정치문화와 환경 미흡: 민주주의를 수행하기 위한 한국 국민들의 참여 적․시민적 정치문화가 부족하였으며, 군부의 쿠데타에 저항하려는 국민적 의지가 미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