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문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김원(EU지역통상학과)
문화는? Culture is Power!!
파르테논 신전(BC 448~432년)
밀로의 비너스 1820년 에게 해의 밀로의 섬에서 발굴된 균형미의 표본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약 2m(208.5cm) 높이의 이 조각상은 기원전 1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감미로운 육체미는 얌전한 고전미의 선을 넘은 헬레니즘 시대(기원전 323~30)의 걸작이다. 뒤에서 본 그녀의 미끈한 등에는 절묘한 선이 골을 이루고 있다. 완벽한 인체의 비율(1:1.618)을 구현한 이 조각상은 아름다운 여성의 표상으로 여겨져 영화, 광고 등에 자주 등장하는 유명한 작품이다. 이 조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실치 않으나, 아름다운 여성을 묘사했다 해서 비너스라는 이름이 후세에 붙은 것이다.
승리의 여신 니케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 “니케”(Nike)는 루브르에서 '밀로의 비너스'와 함께 그리스 헬레니즘 조각의 보물로 간주되는 작품이다. 기원전 190년경에 제작된 이 여신상은 머리부분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극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이 여신상은 19세기 후반에 발견되었고, 그 후 오른손이 추가로 발견되어 이 조각 옆의 유리관에 전시되고 있다.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많은 스포츠용품 브랜드인 '나이키'의 날개 문양은 바로 이 승리의 여신의 날개이다.
커다란 날개를 가진 니케 여신은 대개 전쟁의 여신 아테나와 함께 있지만 단독으로 나타날 때도 많다 커다란 날개를 가진 니케 여신은 대개 전쟁의 여신 아테나와 함께 있지만 단독으로 나타날 때도 많다. 니케가 승리를 알리기 위해 하늘에서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내려와 뱃머리에 발을 딛는 순간 갑자기 강하게 불어온 바닷바람이 니케의 옷자락을 다리에 감기게 하여 아름다운 몸체를 드러낸다. 니케는 강하고 당당하며 육감적이다. 깃털과 옷자락, 그리고 신체의 질감 대비뿐 아니라 깊고 강하게 굽이치는 옷 주름 표현은 강렬한 명암대비를 이루면서 그 자체가 하나의 극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이런 역동성은 그리스의 후기 헬레니즘 양식을 잘 보여준다. 루브르박물관에서는 1884년에 이 조각을 중앙 홀에서 올라가는 입구인 '다루(Daru) 계단'에 전시하였다. 높은 돔 아래 계단의 중간에 놓여있는 이 조각을 올려다보면 니케가 막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장엄한 광경에 압도될 뿐 아니라 하늘과 바다 그리고 해풍을 느낄 수 있다. 없어진 머리와 팔은 오히려 이러한 장관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Culture is Quality of Life !!
Culture is fun !!
We can see the world through many different eyes 다양한 시각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다!!
1979년
You can see only as much as you know 아는 만큼 보인다!!
- 티치아노(Vecellio Tiziano), 1562년 작, 유채와 178X204cm 에우로페의 강탈 - 티치아노(Vecellio Tiziano), 1562년 작, 유채와 178X204cm
● 유럽(Europe) - '에레브(ereb)' : 메소포타미아어 '서쪽의 땅', '해가 지는 곳' ▶ 제우스와 에우로페(페니키아의 왕 아게노르의 딸) ▶ 페니키아는 지금의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 - 고대 해양 무역의 중심지 ▶ 제우스와 에우로페의 세 아들 - 미노스, 라다만티스, 사르페돈 ▶ 미노스가 크레타의 왕이 됨 ⇒ 크레타 문명의 황금 시대를 염 ● 지명설화 : 처녀 이름 에우로페(Europe)에서 유로파(Europa)라는 지명이 유래 ⇒ 사실은 거꾸로 '유로파'라는 지명이 있었고 나중에 '에우로페'라는 처녀의 이야기가 인연담으로 창작됨 ● '에우로페의 강탈'
미노타우로스 Minotauro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우두인신(牛頭人身)의 괴물. 그리스어로 ‘미노스의 소’라는 뜻. 제우스와 에우로페의 맏아들로 크레타의 왕이 된 미노스는 자신의 통치를 위해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협조를 요청한다. 포세이돈은 그에 대한 대가로 신비스러운 흰 소를 내리면서 자신에게 바치는 제물로 사용하라는 조건을 붙였다. 그러나 막상 멋진 흰 소를 보게 된 미노스 왕은 아까운 마음에 흰 소 대신 다른 소를 선별하여 제물로 바친다. 당연히 포세이돈은 노발대발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후원하기도 하였고 또한 제우스의 아들이기도 한 미노스를 직접 처벌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어 다른 방법을 찾게 된다. 미노타우로스 Minotauros
미노타우로스 Minotauros 그것이 미노스의 아내인 왕비 파시파에의 비극이 되는 것이다. 된다. 포세이돈은 바로 이 파시파에를 겨냥하여, 아프로디테에게 찾아가 그녀의 아들인 큐피드에게 화살 한방을 부탁하게 된다. 신의 제물을 빼돌린 미노스 왕을 응징하기 위해 동참한 그들로 인해 파시파에는 불행히도 그 하얀 황소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소와 어떻게 사랑을 나누겠는가? 더군다나 그 소는 이미 제물로 바쳐질 시기를 넘겨서인지 반쯤 미쳐서 난폭해져 있었다. 그러자 왕비는 건축의 대가 달라이로스를 불러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 달라이로스는 왕비를 위해 나무로 암소 모형을 만든 뒤 파시파에을 들어가게 하여 황소를 유혹하여 교접하는 데 성공케 한다. 이렇게 하여 파시파에는 머리는 황소이고 몸뚱이는 사람의 모양을 한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았다. 미노타우로스는 매우 난폭하고 힘이 세어 주변 사람들이 큰 피해를 당했기 때문에, 미노스 왕은 건축과 공예의 명장 다이달로스에게 명하여 미궁(迷宮) 즉 라비린토스(labyrinthos)를 짓게 한 후, 미노타우로스를 그곳에 가두었다.
◀ 그리스의 영웅 테세우스가 미궁 깊숙이 살고 있는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하는 모습을 그린 동상. 미노스 왕은 신의 기분을 더 이상 상하게 할 수 없고 자신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죽이지 않고 미궁에 가두는 일로 일을 수습한다. 그리고 어린 아이나 사형수를 미노타우로스의 먹이로 주다가, 나중에 자신의 아들이 아테나이에서 살해 당하자 9년간 선남선녀 어린이 7명씩 14명을 매년 이 괴물에게 산 제물로 바치게 한다. 세 번째 제물이 바쳐질 때 아테나이의 젊은 왕자 테세우스가 끼여 있었다. 이들이 미노스 왕을 알현할 때 공주 아리아드네가 테세우스에 첫 눈에 반해 버린다.
테세우스에 반한 아리아드네는 그를 돕게 된다. 자신을 아내로 삼아 아테나이로 데려가 달라는 조건으로 아마 실타래를 한 뭉치 주면서 방법을 알려준다. 테세우스는 실타래의 끝을 미궁 입구에 묶어두고 미궁에 침투하여 미노타우로스가 자고 있을 때 청동 몽둥이로 머리를 내리쳐 단숨에 죽인다. 그리고 실을 따라 무사히 미궁을 빠져 나온다. 그러나 아리아드네는 아쉽게도 아테나이로 가지 못하고 닉소스 섬에 뒤쳐지게 된다.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퇴치하는 모습
두 강도 사이의 십자가 예수 루벤스 (Peter Paul Rubens, 1577~1640) 플랑드르 화가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대표화가 1620년 429 x 311cm - 예수가 죽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오른쪽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고 있는 로마 병사 롱기누스가 인상적이다.
롱기누스의 창 복원 전 과 복원 후의 창의 모습 롱기누스의 창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 그가 살았나 죽었나 확인 차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로마 병사 롱기누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롱기누스는 창으로 예수를 찌른 순간 눈이 멀었다고 한다. 그러나 창에 흐르는 예수의 피로 눈을 씻으니 회복되어 예수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예수의 피가 묻은 창을 고이 간직해 후세에 전해 줬다고 한다. 신의 아들을 찌른 창이라 하여 롱기누스의 창은 하나의 '힘의 상징'이 되었다. 롱기누스의 창을 소유하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하여 1000여 년간 45명의 제왕이 소유했다고 하니 창이 제왕을 만든 것인지 제왕이 창을 소유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운명의 창, 성령의 창, 성스러운 창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 창은 예수의 유물 중 유일하게 오래, 잘, 그리고 공식적으로 보관되고 있는 것으로, 현재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호프브르크 박물관에 실물이 전시돼 있다.
의심하는 도마(1601~1602) - 카라바조, 초기 바로크 미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해 제자들을 만난다 의심하는 도마(1601~1602) - 카라바조, 초기 바로크 미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해 제자들을 만난다. 제자들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것에 대하여 의심한다. 예수는 자신의 옆구리에 난 창 자국을 보여준다. 제자들은 본다. 보는 것은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 중의 한 사람, 의심 많은 도마는 그 창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본다.
베드로의 십자가형 1600~01. 카라바조 230x135cm(유화) Santa Maria del Popolo (로마) 1600~01. 카라바조 230x135cm(유화) Santa Maria del Popolo (로마)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는 네로 황제의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던 도중 아피아 가도에서 마주 오는 예수를 만났다고 한다. 베드로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자, 예수는 “다시 한 번 십자가를 지러 로마로 가는 길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즉시 베드로는 발길을 돌려 로마로 돌아가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 이때 베드로는 특이하게도 자청해서 머리를 아래로 두고 거꾸로 매달려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이유는 예수와 똑같은 방식으로 죽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부의 반지 Anulus piscatoris 어부의 반지는 반지 형태를 띤 교황의 공식 도장으로, 국새에 해당하며, 교황의 공식 상징물 가운데 하나다. 교황의 반지가 어부의 반지라 불리는 이유는 역대 교황들이 어부 출신이었던 베드로의 후계자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어로는 페스카토리오(Pescatorio)라고 부른다. 보석이 박혀 있지 않은 이 금반지는 베드로가 배에서 그물을 던져 물고기들을 낚는 모습이 새겨져 있고 그 둘레에 소유주인 당대 교황의 라틴어식 이름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마르 1,17)고 했다는 기독교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반지는 13세기 이래 교황이 서명하는 공식 문서들을 날인하는 데 사용되어왔으며 교황을 알현하는 자들은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무릎을 꿇고 이 반지에 입을 맞추어야 한다. 어부의 반지 Anulus piscatoris
제자로 부름 받은 후 베드로는 예수를 따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점차 열두 제자 중 수제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제자로 부름 받은 후 베드로는 예수를 따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점차 열두 제자 중 수제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마태복음(16장16~19절)에 따르면,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에 예수는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수세기 동안 전해 내려왔고, 베드로 이후의 모든 교황들이 자신의 수위권을 주장하는 토대가 된다. 이로부터 전통적으로 교차한 금빛 열쇠와 은빛 열쇠가 교황들의 문장의 상징이 되었는데, 이는 땅(은색)과 하늘(금색)을 맺고 푸는 권한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 문장에서 열쇠는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가진 교황의 영적인 권위를 상징한다. 교황의 문장 베네딕토 16세의 문장 (2005~2013)
<천국의 열쇠를 받는 베드로> 라파엘로의 스승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1446-1524)가 1480-82년에 그린 프레스코화로 335x550cm이다. 바티칸의 시스티나 예배당에 있다.
인류의 종말을 연상 시키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1534~1541년)
예수를 중심으로 오른쪽의 중앙에는 베드로가 있다. 그의 상징은 커다란 열쇠 두 개이며, 후에 교황의 상징이 된다. 베드로 위에는 예수님의 사랑 받던 제자 요한이 예수님과 비슷한 동작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성 바르토로메오 심판관인 예수의 아래쪽에는 성 바로톨로메오가 구름을 타고 자신의 벗겨진 가죽을 들고 있다. 성 바로톨로메오는 자기 몸의 피부를 칼로 동물 껍질 벗기듯 순교 당한 인물이다. 현대에 와서 밝혀진 재미난 사실 중의 하나는, 미켈란젤로가 바로톨로메오의 가죽 속에 속죄와 순교의 심정으로 자신의 추한 초상화를 그려 넣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