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영적 여정 예수처럼 변화되어 사는 사람
시작기도 (요한 14,3-11)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무엇인가? 내 자식 잘 되는 것? 내 사업 잘 되는 것?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 건강한 삶을 누리는 것?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끝까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토록 고생하고 죽은 아들을 하느님께서는 버려두지 않고 죽음에서 일으켜 주셨듯 우리도 예수를 따라 살면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따라 살아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를 닮은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맛볼것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갈라 2,20)
예수님께 이르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그 안에서 그분을 따라가려 노력했지만 수많은 실패를 겪어 봤으며, 너무나 고통스러워 의식적으로 그분을 내 안에서 지우려 했던 적도 있었다. 심지어 완전히 나가 떨어져 그분에게서 도망치려 했던 적도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 강의는 한 인간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하느님께 도달하는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은 이 강의로 인해 자기 신앙이 흔들릴 수도 있고, 도전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괜찮다. 그것은 성장의 징표이고, 그로 인해 내가 한계 지어놓은 하느님상은 허물어지고 내 생각의 한계를 초월하시는 하느님이 충만하게 들어설 것이다.
영적 성장의 단계 스캇 펙 박사의 이론을 중심으로
모건 스캇 펙 (Morgan Scott Peck, 1936-2005) 정신과 의사이자 많은 책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하버드대학(B.A.)과 캐이스 웨스턴 리저브(M.D)에서 공부한 스캇 펙은 심리상담자로서 미 행정부의 요직을 맡기도 했었다. 과학자로서 심리학자로서 오랫동안 살아오다 수많은 상담간에 인간 심리의 깊은 곳에서 신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주요 저서로는 사람, 전통적 가치, 그리고 영적 성장에 관한 새로운 심리학을 전개하여 현대인들의 영적 방황에 길잡이를 제시한 '아직도 가야 할 길', 추리소설적 기법으로 사랑과 구원의 문제를 깊이 탐색한 장편소설 '창가의 침대',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악과의 투쟁을 다룬 '거짓의 사람들', 안락사에 관한 본격적인 정의와 문제를 제기한 '영혼의 부정', 그리스도교적 세계의 여러 차원에 관한 책 'What Return Can I Make?', 공동체와 평화의 문제에 천착한 'The Different Drum' 등이 있다.
Scott peck이 제시하는 영적 여정의 네 단계 1단계: 혼돈/반사회 단계 2단계: 형식적/제도적 단계 3단계: 회의적/개인적 단계 4단계: 신비적 단계
1단계 : 혼돈/반사회 이 단계에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인구의 약 20 % 정도가 포함된다. 대체로 이 단계는 영성이란 것이 부재하고 이 단계의 사람들은 원칙 없이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이 단계를 반사회성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실제로 다른 사람과의 모든 관계에서 자기 이익만을 도모하고 겉으로는 안 그런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교묘하게 속이면서 진실한 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위선자!!) 이 사람들은 자기 의지 이외에는 스스로를 통제할 매커니즘이 없기 때문에 혼돈이란 말을 사용했는데 이는 원칙이 없다는 뜻이다. 통제되지 않은 의지란 하루는 이쪽으로 갔다가 다음날에는 저쪽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의 존재도 마찬가지로 혼돈스러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곤경이나 어려움에 처해 있기도 하고, 종종 감옥이나 병원 혹은 길거리에서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이따금씩 자기 절제를 할 수 있어서 자신들의 야망에 의해 상당한 명성과 권력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심지어 사장이나 유명한 목사가 되기도 한다. 1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가끔씩 혼돈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럴 때면, 인간으로서 유일하게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을 맛보게 된다. 대체로 그런 경험에서 금방 벗어나지만, 이러한 고통스러운 경험이 계속되면, 자살을 할 수도 있다. 내 생각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살은 이 범주에 들어가는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가끔씩 사람들은 2단계로 전환될 수 있다.
2단계: 형식적/제도적 이런 식의 전환은 대체로 – 여기서 대체로라고 말한 이유는 항상 예외가 있기 때문이다 – 급작스럽고 극적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마치 신이 아래로 내려와 그 영혼을 가로채서 위로 확 잡아 올리는 것과 같다. 그 사람에게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깜짝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진 셈이다. 이 과정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이 사람은 스스로에게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이 혼돈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어떤 일이든 정말 어떤 일이든 심지어 내가 통제를 받는 상황까지도 기꺼이 감수할 겁니다.” 그리고 나서 이 사람들은 2단계로 전환되는데, 나는 이 단계를 ‘형식적/제도적’이라고 이름 붙였다. 내가 제도적이라고 이름을 지은 까닭은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통제를 제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교도소로 정신과 의사가 진료를 하기 위해 새로 들어왔을 때 집단 치료를 위해서 수감자들을 불러 모으고 교도소장의 오른팔이 되어 그럭저럭 수난을 당하지 않고도 지내는 죄수가 항상 있게 마련이다. 이런 사람은 모범적인 죄수나 시민이 된다. 이 사람은 제도에 너무나 잘 적응하므로, 가장 먼저 가석방될 기회를 얻는다. 곧바로 이 사람은 걸어다니는 범죄 요인이 되고 가석방되고 일주일도 안 돼서 다시 체포되어 바로 철창신세를 진다. 그곳에서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을 길들이려는 제도의 울타리 안에서 모범적인 시민이 된다. 어떤 사람들에게, 제도란 군대를 의미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나 다른 사회에서도 군대는 상당히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다소 남성 중심적인 군대라는 조직이 없었다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그야말로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대다수의 교인들은 2단계, 즉 형식적/제도적 단계에 빠져 있다 대다수의 교인들은 2단계, 즉 형식적/제도적 단계에 빠져 있다. 일정한 순서가 있고 이 단계마다 전부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2단계 안에는 사람들의 종교적인 행위를 특징짓는 그 뭔가가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통제를 교회라고 하는 제도에 의존하고 있고 내가 그것을 형식적이라고 부른 이유는 종교적인 형식에 매우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종교적인 행위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이라면 신을 외적인 존재로 본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들은 신이 얼마쯤은 우리들 안에 깃들어 있다는 것 – 신학자들의 용어로는 내재한다는 것 – 인간의 영혼 안에 신이 주재한다는 것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신이란 저 위에 혹은 저 밖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대체로 신을 남성적인 모델에 따라 상상한다. 그리고 신은 사랑을 주는 존재라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적절한 시기에 주저없이 사용할 수 있는 징벌의 힘도 신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신을 마치 하늘에 있는 자비로운 경찰쯤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런 것이야말로 2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3단계:회의적/개인적 2단계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두 사람이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고 생각해 보자. 이 사람들은 아이들을 안정된 가정에서 키운다. 2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안정성이야말로 가장 큰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회에서 아이들이 중요한 존재이고 존중되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자녀들을 존중하며 소중히 다룬다. 반면에 이들의 사랑은 때로는 다소 엄격하고 융통성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들은 사랑을 베풀 줄 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이들에게 사랑을 주는 존재가 되라고 가르치고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되는 방법도 배우기 때문이다. 이처럼 안정되어 있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존중받으며 성장하고 소중한 대접을 받은 아이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런 아이는 엄마의 모유를 받아먹듯이 부모의 종교적인 원칙들 –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교나 유대교든지 –을 흡수하게 된다. 이 아이가 청소년이 될 때까지 이 원리들은 실제로 아이의 가슴에 새겨지거나 혹은 정신 의학적인 용어로 ‘내면화’ 될 것이다. 하지만 일단 이렇게 되고 나면, 이 아이들은 원칙주의자가 된다. 더 이상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외적인 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 통제가 가능한 존재가 될 것이다. 이 아이들이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신화나 미신 그리고 낡아 빠진 제도를 필요로 한단 말인가?”라고 말하는 시기가 바로 건강한 인간의 발달 과정에서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바로 그 시기인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들은 교회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고 – 부모에게는 불필요하게 증오와 유감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 의구심이 많은 회의론자나 불가지론자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사람들은 내가 ‘회의적/개인적’이라고 명명한 3단계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다시 말하면 3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비록 일상적인 의미에서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더라도 2단계에 있는 사람들보다 영적으로 앞서 있다. 이들은 결코 반사회적이지는 않고 사회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적 책무를 위한 의사들의 모임이나 환경운동과 같은 조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헌신적이고 사랑을 베푸는 부모가 된다. 주로 이런 사람들은 과학자들이거나 과학적인 마인들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변함없이 진리를 추구한다. 그리고 이들이 내가 제시한 대로 진리를 충분히 넓고 깊게 추구했다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찾기 시작해서, 진리의 조각들이 충분히 짜맞추어져 전체적인 그림을 엿볼 수 있게 된다. 그 모습은 당연히 아름답다. 헌데 이상하게도 그 단계에 있던 부모들이나 조부모들이 믿었던 원시신화나 미신을 닮아 있다. 바로 그 순간에 이들은 내가 ‘신비적/공동체적’이라는 이름을 붙인 4단계로 넘어가기 시작한다.
4단계:신비적 단계 이들은 사물의 이면에 달라붙어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시대를 거치면서, 신비주의자들은 남자와 여자, 인간과 다른 생명체, 지구 위를 걷고 있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존재들 사이의 관계를 관찰해 왔다. 이면에 놓여 있는 상호 연관성을 관찰하면서 모든 문화권과 종교의 신비주의자들은 통일성과 공통성이라는 측면에서 사물에 대해 말해 왔다. 또한 이들은 항상 역설이라는 측면에서 이야기해 왔다. 신비주의적이란 말은 어원이 신비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은 신비로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신비로움을 해결하고 싶어 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더 많은 신비를 해결할수록 더 많은 신비와 조우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신비로움으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매우 편안하게 살아간다.
각 단계에 존재하는 적개심과 공격성
각 단계별에 존재하는 적개심 이렇게 각기 다른 단계가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가장 커다란 문제는 – 각 단계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 영적인 여정에서 각기 다른 지점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이다. 어느 정도 우리 모두는 우리가 방금 떠나온 단계에 아직도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위협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새로운 주체성을 확신하거나 보장받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협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다가온다. 우리는 특히 우리보다 앞선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협을 받는 경향이 있다.
1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주로 태연해 보이는 경향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이 사람들을 심하게 괴롭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주로 태연해 보이는 경향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이 사람들을 심하게 괴롭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이들을 꿰뚫어 볼 수 있으면, 실제로는 이들이 모든 것과 모든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2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1단계에 있는 사람들(죄인들)에게 특별히 위협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죄인들이야말로 자신들이 돌봐야 할 비옥한 땅으로 여기면서 사랑을 베푼다. 그렇지만 이들은 3단계에 있는 회의주의적인 개인주의자들에게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4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협을 받는 경향이 있다. 2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4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것과 똑같은 대상들을 믿는 것 같으면서도 자신들이 너무나 두려워하는 자유를 가지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3단계의 사람들, 회의론자들은 1단계의 무원칙한 사람들이나 2단계의 미신에 빠진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위협을 받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4단계에 있는 사람들 즉, 자신들처럼 과학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어 멋진 각주를 달 줄도 알면서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일을 믿는 이런 사람들에게서 위협을 느낀다. 3단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귀의’라는 말을 언급하면, 선교사가 이교도에게 강요하는 광경을 떠올려 벌컥 화를 낼 것이다.
우리가 영적 여정을 다루면서 눈여겨봐야 하는 부분은 2단계와 4단계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이다 우리가 영적 여정을 다루면서 눈여겨봐야 하는 부분은 2단계와 4단계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이다. 이것은 예수님과 바리사이 및 율법학자들과 같은 백성의 지도자들이 겪었던 긴장감이며 동시에 우리가 성당 안에서 흔히 겪는 갈등 상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제도와 형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이들에게 4단계에 있는 예수님은 안정감을 제공하는 규칙의 파괴자로 비춰졌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비판에 대한 해명을 하셔야만 했다. “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 5,17)
2단계와 4단계 사이의 존재하는 갈등상태 하느님 예수님(=하느님) 완벽한 일치 삼위일체! 4단계 2단계
2단계: 제도적/형식적 잠자는 의식의 신앙인 4단계: 신비주의 깨어난 의식의 신앙인 언뜻 보면 2단계와 4단계는 적대적 관계에 있는 것처럼 비춰지지만, <영적여정>이라는 말처럼 2단계는 4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2단계와 4단계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해보고 싶다. 2단계: 제도적/형식적 잠자는 의식의 신앙인 4단계: 신비주의 깨어난 의식의 신앙인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잠자는 의식속에 있는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대해 알아본 뒤(두번째 강의) 깨어난 의식의 사람들의 신앙생활과 비교분석하고(세번째 강의) 잠자는 의식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깨어난 의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알아본다.(네번째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