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중공군의 공세와 유엔군의 재반격- 2
5. 휴전제의와 유엔군의 제1차 반격
1. 중공에 대한 휴전제의 중공군과의휴전회담 추진 -중공거부 미국 유엔에 중공을 침략자로 결의요구 -영국반대 중공군과의휴전회담 추진 -중공거부 미국 유엔에 중공을 침략자로 결의요구 -영국반대 유엔 베이징정부 침략자로 의결 – 유엔 작전목표 “침략자를 한국에서 축출하는 것”
2.유엔군,반격을 준비하다 리지웨이 중장 ‘울프하운드’작전 (Operation Wolfhound) 평택-오산 연결하는 도로 따라 수원진입 ▶ 중공군 발견 미 제 1군단예하 25사단 27연대가 위력수색부대선정 For 중공군의 배치,규모,장차 기도파악 리지웨이 중장-> 사기를 올리기 위해 사라진 중공군을 찾다 리지웨이 중장
3.유엔군의 제 1차 반격 ‘선더 볼트’작전(Operation Thunderbolt) -울프 하운드 작전보다 더욱 강력. 신속 실시 -미 제1군단,제9군단이 각각 1개 사단 앞세워 통제선 점령 -미군 1개사단, 한국군 1개 연대 추가 투입 한강수색 -1월25일 오산-여주 선 공격=2개월 만의 공격, 다시 한번 반격해 나가는 전환점
- 중공군의 미약한 저항 – 미 1,9군단 (안양-양평) ‘주력을 전방에 투입하는 적극적인 공격으로 전환’ - 2월10일 서울바라봄 but탈환 서두르지 않음 - 약점 알게 됨 - 중공군 보급 취약 수도회복 위한 공격 동쪽 원거리에서부터 포위해가는 전략 동해안 항구,비행장과 동해안 도로의 요지 대관령,횡계 확보
‘선더 볼트’작전(Operation Thunderbolt) 미 25 중공 안양~양평 미 9 오산~여주 미 1 한국
6. 중공군의 제 4차 공세와 유엔군의 제 2차 반격
1. 중공군의 제4차 공세 ▲홍천 2월 11일 중공군 제 13병단, 9개 사단 병력을 한국군 제8사단,3사단이 방어중인 횡성 북방 삼마치 고개에 투입 한국군은 방어 중 후방으로 진출한 중공군에게 고립됨 4시간만에 부대의 건제가 무너짐(분산철수) ▲가평 중공 삼마치고개 한 3 한 8 ◀양평 ▼횡성
횡성전투의 대처방안 리지웨이 중장은 지평리-원주를 연결하는 새로운 방어선 설정 2월 12일 유엔군 원주일대 방어선 점령 지평리가 유엔군의 새로운 방어선의 중심지역 중공군 2월 12일 지평리 남쪽 곡수리 차단 2월 13일 중공군의 공격 시작
전투 15일까지 계속되었고 유엔군은 가까스로 진지사수 중공군은 베이징의 마오쩌둥이 명령 = 미국과 달리 현장상황을 잘 알지 못함 제 4차공세는 중공군, 6.25전쟁 개입한 이래 최초의 패배 유엔·한국군의 자신감 심어주는 계기
지평리 전투 경기도 양평 전적비 지평리 전투는 2월 13일부터 2월 16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한 미 제2보병사단 23연대 전투단과 이에 배속된 프랑스대대가 중공 39군과 3일간 벌인 격전이다. 3일동안 포위된 유엔군은 2월 16일에 미 제1기병사단 5기병연대 3대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크롬베즈 특별임무부대에 의해 구출되었고 중공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하였다.
‘킬러작전(Operation Killer)’ 2. 유엔군의 제2차 반격 리지웨이 중장은 적에게 시간적 여유 주지 않고 즉각적 반격작전 계획함. : 적의 주력을 포위 섬멸하는것이 목적. 2월 21일부터 미 제9군단은 원주-횡성 방향, 미 제10군단과 한국군 제3군단은 제천-평창방향으로 공격하기로함. ‘킬러작전(Operation Killer)’
그러나 여러가지 애로사항이 발생하였다. 기온의 급격한 상승 때때로 오는 비때문에 항공정찰,항공지원 불가능 하천의 유빙 –도하 불가능 도로 및 철로의 두절 사태 속출 24일 헬기 추락으로 정찰중이던 제9군단장 무어 소장의 사망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북한군의 거센 저항
3월6일 결국 한국·유엔군은 예정된 목표선에도달하여 킬러작전 종료 3월6일 결국 한국·유엔군은 예정된 목표선에도달하여 킬러작전 종료. 킬러작전 결과로 한국군과 유엔군은 한강-횡성-강릉을 연결하는 선까지 진출. 이제 가장 큰 관심사는 언제 서울을 탈환할 것인가!!
‘절단작전(Operation Ripper)’ 미 제8군사령부 – 현 전투력으로 서울을 직접 공격하는 것은 위험요소가 많다고 판단 을 세움 횡성-홍천-가평 및 춘천방향으로 대규모의 돌파구를 형성하여 서부의 중공군과 동부의 북한군을 분리시킨 후에 서울을 남쪽과 동쪽에서 양익, 포위 하는 전략. ‘절단작전(Operation Ripper)’
미 제8군은 절단작전에서 중부의 미 제9군단이 주축이 되어 서울 동쪽의 덕소-가평-춘천북방-한계를 연하는 목표선까지 진출하도록하였다. 미 제8군은 5일간 비축물자 확보, 험준한 지형으로 진출이 지연되었던 미 제9, 10군단의 일부 부대들도 진출 한국군과 함께 3월 15일 서울 재탈환! (1951)
7. 유엔군의 38도선 재돌파와 중공군의 제 5차 공세
1. 유엔군의 38도선 재돌파 미 제8군사령관인 리지웨이 중장에게 38도선의 재돌파를 일임. 38도선 재돌파는 전술적 차원에서 유리한 방 어선을 확보함과 동시에 차후 휴전에 대비하 여 38도선 북방에 진출했다는 전쟁의 명분을 얻기 위함이지 대규모 북진작전이 아님.
1. 유엔군의 38도선 재돌파 ‘캔사스선(Kansas Line)’ 미 제8군사령관은 38도선 북쪽의임진강-연천-화천 저수지-양양으로 이어지는 을 방어지역으로 선정 ‘캔사스선(Kansas Line)’
캔사스선을 확보한 후 한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이 공세를 준비중인 평강-철원-김화 를 연결하는 철의 삼각지를 공략하고자 함 캔사스선을 확보한 후 한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이 공세를 준비중인 평강-철원-김화 를 연결하는 철의 삼각지를 공략하고자 함. 철의 삼각지 공격이 저지되자 각 부대에 ‘적의 공세에 대비하여 방어로 전환할 것’ 을 명령하고 공격을 멈추었다.
2. 다시 불거진 휴전 방안 모색 Q. 왜 유엔군은 막강한 화력을 두고 계속 진격하지 않았을까? A. 압록강까지 진격하면 더욱 거세어진 중공군의 저항에 부딛칠 거라 예상 A. 전쟁이 장기전으로 휘말림으로써 힘을 낭비해 냉전체제의 불균형초래를 걱정 휴전으로 일단락 시키고자 방어에 유리한 감제고지를 확보한 후 방어진지를 구축.
‘캔사스 라인(Kansas Line)’ 3. 유엔군의 북진한계선 설정 캔사스선까지 확보하고 있는 상태에서의 가장 큰 문제는 ‘이제 또 어느 선을 확보해야 할 것인가’ 한국방위에 적합한 ‘군사적인 관점, 행정적인 관점, 독립적인 관점’에 적합해야함. 연천 화천 양양 임진강
4. 전선 사령관 교체 1951년 3월에 접어들며 38도선을 향해 진격하자 대한민국의 범위에 대한 논쟁이 시작 트루먼 대통령 : 대한민국의 범위는 38도선 이남 (종전을 위한 전략을 추구) 맥아더 원수 : 대한민국의 범위는 한반도 전역 (북진 전략) 1951년 4월 11일 맥아더 원수가 유엔군 사령관에서 해임 되고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중장이 임명됨. 트루먼 대통령 “대한민국의 범위는 38도선 이남이다.” 맥아더 원수 “대한민국의 범위는 한반도 전역이다.”
4. 전선 사령관 교체 새로운 미 제8군사령관에는 밴 플리트 중장이 임명됨. 새로 부임한 유엔군사령관과 미 제8군사령관의 최대 관심사는 소련의 개입 가능성 당시 소련은 중공군의 제5차 공세가 시작된 1951년 4월말까지 북한이나 중공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음.
4. 전선 사령관 교체 당시 소련이 전쟁에 적극적인 개입을 망설였던 이유. ① 중공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아시아에서 주도권을 장 악하는 것이 소련에게 달갑지만은 않음. ② 제2차 세계대전의 피해로 국력이 약화 ③당시 소련의 기술수준으로 제작된 무기는 미국의 무 기를 당해 낼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소련의 확대개입 가능성이 낮아짐에 따라 유엔군사령부와 미 제8군은 그 동안 비교적 용이하게 작전을 구사할 수 있었음.
5. 중공군의 제 5차공세(4월공세) 자유진영이 휴전방안을 마련하는 중 공산군은 전략 적 요충지인 철의 삼각지대에 대규모 병력과 보급품 을 집결 4월 22일 공산군은 전 전선에 걸쳐 공세를 시작 제 5차 공세(4월 공세)/(중공 : 5차 전역 제1단계 공세) 가 시작됨. 공산군은 이번 작전에서도 한국군 사단을 먼저 돌파 한 후 후방으로 진출하여 유엔군의 병참선을 차단하 려 하였음.
5. 중공군의 제 5차공세(4월공세) 서부지역 : 한국군 제1사단 (파평산) 영국군 제29여단 (설마리) → 방어 성공 중부지역 : 한국군 제6사단 (사창리) → 붕괴 2개월간 중공이 준비한 제5차 공세는 한국군과 유엔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저지되었음.
8. 중공군의 제 6차 공세와 유엔군의 제 3차 반격
1. 중공군의 제6차 공세 중공군은 한 차례 공세가 끝난 후면 반드시 다음 공세까지 약 2-3개월에 걸친 준비기간 을 가져옴. → 중공군의 다음 공세를 6-7월로 예상함 But, 전선지역에 중공군 54만여 명, 북한군 20만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만주에도 그들의 지원군 75만 명이 대기하고 있었음.
이와 같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공산 군은 추가보급만 이루어진다면 언제든지 대 규모 공세를 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 미 제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중장은 현 방어선에 서 철수한다면 적의 사기를 올려주어 차후 휴전 협상을 이끌어가는데 많은 지장이 따를 것으로 판단함. →현 방어선을 주저항선으로 설정함
중공군은 ‘5차 전역 제2단계 공세(제6차공세/5월공세)’를 계획 서울점령이라는 정치적 목적보다는 중/동부 산악 지역에서 한국군 사단들을 격멸한 후에 고립된 미군을 섬멸할 기회 마련. →즉, 적 부대 격멸이 작전목표. 주공의 위치가 중서부에서 중동부로 바뀜.
6차 공세에서 중공군의 작전은 ‘3중 양익 포위작전’이라 간단히 말함. 첫번째 포위망 북 2 북한 한 1 두번째 포위망 한 3 북 5 세번째 포위망 한 9 중 20 한 7 한 5 중 27 중 12
2. 유엔군의 제 3차 반격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이 운두령 승리로 중공군을 위기에 몰아넣자 즉시 반격으로의 전환을 명령함. 동쪽의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후퇴할 징후를 보이는 중공군의 후방을 차단하고 신속한 반격을 감행함. →유엔군의 제3차 반격은 대성공을 거둠.
‘파일 드라이버 작전(Operation Piledriver)’ 제3차 반격작전으로 인해 캔사스선을 확실하게 다시 확보함. 뿐만 아니라, 한층 더 강력해진 ‘말뚝을 박는다’는 뜻의 을 구사하여 애초 캔사스선의 전초선으로 선정 했던 와이오밍선까지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와이오밍선 : 캔사스선 북방의 10~20km를 연하는 선 ‘파일 드라이버 작전(Operation Piledri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