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럽 세력의 아시아 진출 대항해 시대의 출현 마카오를 통한 중계무역 서양 문물의 아시아 전파 포르투갈, 에스파냐 주도→바스쿠 다가마(포르투갈)의 인도 항해 개척, 태평양 횡단을 통한 마젤란(에스파냐)의 필리핀 상륙 마카오를 통한 중계무역 포르투갈이 명으로부터 마카오를 넘겨받음(1557)→동아시아 무역 거점으로 삼음 서양 문물의 아시아 전파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일본에 조총 전파 1543년, 타네가 시마 포르투갈인 표착
대항해 시대
2. 동아시아 세 나라의 정세 명 대내적 측면 : 지배층의 탈세, 빈부 격차와 농민의 세금 부담 심화→농민반란(이자성의 난) 대외적 측면 : 북쪽 몽골의 잦은 침략, 남쪽 왜구의 동남 해안 약탈(북로남왜)→명의 국력 약화 조선 대내적 측면 : 양반 중심의 사회 질서 확립, 사림파 집권 이후 내부 정쟁으로 위기 대외적 측면 : 오랜 평화 지속 →주변 정세의 변화와 위협에 대한 인식 부족, 국방력 약화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 100여 년간 분열 통일, 정권 안정 목적 강력한 중앙 집권 정책 추진 포르투갈 상인 전래 조총 활용→전투 방식의 변화
북로남왜
조총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중앙 집권책 하늘을 나는 새를 쏘아 맞힐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으로, 포르투갈에서 들여온 것을 개량하여 만든 총이다. 조총은 화승에 불을 붙인 후 방아쇠를 당겨 화약통에 불이 붙으면 그 충격으로 총알이 튀어나가게 만들어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 시대를 통일한 후 전국적인 토지 조사(검지)를 시행하여 토지 면적의 단위와 도량형을 통일(수확량기준)하였다. 농민 무기를 몰수하고(도수령) 무사, 상공업자(조닌), 농민의 신분 이동을 금지(병농분리)하였다. 이에 따라 신분이 분명해지면서 하극상의 풍조가 사라지고 병농 분리가 확립되어 무사와 상공업자는 도시(조카마치)에, 농민은 농촌에 거주하는 사회 질서가 확립되었다.
1. 임진전쟁(왜란) 배경 16세기 후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영토 확장.과도한 군사력의 배출.무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 욕구 확대→조선 침략 동아시아 국제 질서 주도 욕망 전개 일본군 16만명 침략→한성과 평양 함락→조선의 수군.의병의 활약, 명의 참전→조명 연합군의 평양 탈환→벽제관 전투(1593)이후 교착화→명과 일본의 강화협상 전개→협상결렬→정유재란(1597)→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1578)→일본군 철수, 전쟁 종결 명의 참전 명분 : 조공국 보호를 통한 중화질서 유지 실제 : 베이징의 울타리 랴오둥 보호→명의 안전 확보
일본의 조선침략 의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말하기를,“ 한(韓)의 사자를 만나보고, 사관에게 글을 지어 다음과 같이 답하게 하였다. ……‘`나는 귀국의 길을 빌려 산과 바다를 건너 곧장 명으로 쳐들어가 그 4백 주를 우리의 풍속으로 바꾸게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나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내부(內府)에 맡기고,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가 그 군대를 선봉으로 삼아 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하여 랴오둥에서 곧장 베이징을 습격해서 그 나라를 차지하고 땅을 나누어 제군에게 나누어 줄것이다.”라고 하였다.
일본의 조선침략 이유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나는 귀국의 길을 빌려 산과 바다를 건너 곧장 명에 쳐들어가 중국을 우리 일본의 풍속으로 바꾸어 놓겠다.]라고 하였다. 또, 전쟁 초반에 일본군이 승리하자 [나는 천황을 베이징에 모시고 닝보에 거주하며 인도 정복에 착수]할 것이라며 아시아 정복 계획을 드러냈다.
명은 왜 임진전쟁에 참전했을까? 조선은 동쪽 변방에 끼여 있어서 우리의 왼쪽 겨드랑이와 아주 가깝습니다. 평양은 서쪽으로 압록강과 인접하고 진주는 직접 등주와 내주를 맞대고 있습니다. 만일 일본이 조선을 빼앗아 차지하여 랴오둥을 엿본다면 1년도 안 되어 베이징이 위험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을 지켜야만 랴오둥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 해방찬요”-
조선 지배층에게 명의 참전 의미 그대는 오랫동안 우리 동방의 이웃이었으며, 귀국은 늘 온순하고 순종적이었다. 그대 나라의 사족들은 학문과 문화에 조예가 깊다. 짐은 귀국의 영토가 야만적인 일본 도당에게 침탈당하고 귀국의 수도를 빼앗기고 평양마저 점령당해 양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안타까웠다. 그리고 국왕이 피신하여 농가에서 피난처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대는 이제 이 당면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고 결의를 다져야 할 것이다. 짐은 어제 이 소식을 듣자마자 그대를 돕기 위한 군대를 모집하라고 변경의 관리들에게 명하였다. ……일단 7만 정예병을 모아 귀국의 군사들과 힘을 합해 (일본) 도당들을 쫓아 그들을 전멸시킬 것이다.
2. 전쟁의 결과 조선 명 국토 황폐화, 많은 백성이 일본으로 잡혀감, 각종 문화재 피해(불국사 소실).약탈 일본에 대한 적개심 증대, 명의 참전을‘망해가는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재조지은)’로 인식 일본에서 담배·고추 등 새로운 작물 전래, 투항한 일본 병사(김충선) 조총·화약 제조 기술 전래 명 임진·정유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재정(은화 780여만 냥) 소모 → 농민의 세금 부담 증가, 광세의 폐→ 각지에서 반란 발생
2. 전쟁의 결과 일본 여진 군사 강국으로 성장, 조선에서 약탈해 간 인적·물적 자원을 통해 사회·문화 발전의 토대 마련 조선에서 서적(이황의 성리 철학), 구리 활자, 불화 등약탈, 도공(이삼평.심수관).한지 제작공 등 다수의 기술자, 유학자 수만 명 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 성립 여진 누르하치의 여진 통일, 임진 전쟁 당시 조선에 원군 파견을 제의할 정도로 성장, 임진 전쟁으로 명과 조선의 국력 소진을 틈타 랴오둥을 제외한 만주 전역 지배
여진 통일과 팔기군 뛰어난 상인이자 군인이었던 누르하치는 1583년 군사를 일으켜 주변의 부족을 공략하면서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는 인삼·진주·모피 등 특산물의 유통을 장악하고, 명 상인들과 교역하여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이렇게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키우는 데 힘써 마침내 여진을 통일하였다. 1614년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 통일하면서 조직 제도로서 군사적 단위 동시에 행정과 세금 부과 단위이기도 하였다. 최소 단위인 니루는 300명, 5개의 니루가 1자란, 5개의 자란(7,500명)이1기가 된다. 애초 만주인, 몽골 인으로 구성되었다가 나중에 한인 팔기도 만들어졌다. 각 기에 소속된 성인 남자들은 평상시에는 민간인으로 생활하다가 전쟁이 나면 군인으로 징집되었다.
2. 정묘전쟁과 병자전쟁 중국의 정세 변화 – 여진 세력의 성장 정묘전쟁(호란) 누르하치 팔기제 완성→후금 건국(1616)→명에 선전포고 명의 대응 : 후금 원정을 준비, 조선에 출병 요구 조선의 정권 교체 : 전후 복구를 위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을 취하려던 광해군의 외교정책 갈등→인조반정(1623), 광해군 폐위→랴오둥의 명 장수 모문룡에 대한 원조 강화 정묘전쟁(호란) 후금의 조선 침략 : 후금은 명 장수 모문룡 제거, 조선과의 무역을 통한 식량.물자 확보를 위해 조선 침략(1627)→약2개월 동안 지속 강화 체결 : 조선이 후금의 형제 관계 요구 수용, 후금과의 무역 개방, 매년 목면 1만 5천 필 제공 약속
2. 정묘전쟁과 병자전쟁 병자전쟁 배경 : 명에 대한 후금의 군사적 우위 지속→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고침. 황제를 칭하며 청 중심의 국제 질서 추구(1636) 계기 : 조선의 친명 정책 고수, 청의 군신 관계 요구에 대해 조선이 거부 →청의 침략 결과 : 조선의 항복, 청의 군신 관계 요구 수용 →[대청황제공덕비(삼전도비)]건립, 청의 명 정벌 지원(식량.병선).자금.군대 제공), 왕자.신하.백성들이 끌려감
3. 새로운 동아시아 국제 질서 중원(명 → 청) 조선 일본 이자성이 주도한 농민 반란으로 명 멸망(1644) →명의 장수 오삼계가 청에 투항, 반란군을 몰아내고 베이징 점령 →각 지역의 반청 세력 진압 →청이 오삼계 등이 일으킨 삼번의 난과 타이완의 정성공 세력 진압 청이 중국 전 지역 장악 →청 중심 동아시아 질서 형성 조선 북벌론, 조선 중화주의 등장 전쟁 방지 노력 →청, 에도 막부와의 외교 관계 정상화 일본 명, 청과 외교 관계를 맺지 않음 →중국 중심의 조공.책봉 무역 체계에서 벗어남 조선.류큐와는 외교 관계 유지
인조반정과 삼번의 난 1623년 이귀·김자점 등 서인 세력이 광해군과 북인 정권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이다. 친명 배금을 주장하던 서인이 정권을 장악함에 따라 이후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청이 중원을 정복하는 데 협조하여 윈난, 광둥,푸젠 등 남부 지역을 다스리게 된 한인 세력이 일으킨 반란이다. 1673년 윈난의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키자 광둥의 경정충과 타이완에 있던 정성공 세력도 호응하였다. 그러나 1681년 청군이 윈난을 함락시키면서 반란은 진압되었고, 이후 청의 중원 지배가 확립되었다.
삼전도비 인조는 만주족에 패해 삼전도에서는 곤룡포 대신 푸른옷(죄인이 입는옷)을 입고 9계단 위에 앉아 있는 청태종에게 삼궤구고두례(세번 무릅을 꿇고 아홉번 머리를 땅에 조아림)의 항복의식을 치루게 된다. 삼전도비는 그것을 증언하는 역사적 산물이다. 비문은 1637년 11월 25일 인조 15년 이경석이 지었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 오른쪽에는 만주,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다. 원래는 한강변 삼밭나루터의 항복을 했던 곳에 세워졌다가,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여 조공 관계가 단절되자 강물에 수장시켰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인 1913년에 일제가 다시 세워놓았고, 1945년 광복 직후에 주민들이 땅 속에 묻어버렸다. 1963년에 홍수로 다시 모습이 드러났고, 여러 차례 이전을 거듭하다가 2010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인조반정은 왜 일어났는가? 우리나라가 명을 섬겨온 것이 2백여 년이다. 의리로는 임금과 신하의 관계이며 은혜로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와 같다. 임진년(1592)에 입은 은혜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이다. …… 광해군은 배은망덕하여 하늘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다. 기미년(1619) 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은밀히 장수를 시켜 상황을 보아 행동하게 하였다. …… 뿐만 아니라 황제가 자주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예의의 나라인 삼한(三韓)을 오랑캐와 짐승이 되게 만들었다. 어찌 그 분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 인조실록”-
후금은 왜 조선을 침략했을까 여진은 조선과 원수도 아닌데, 조선은 군사를 보내 명을 도왔고, 여진은 항복한 조선 관원들을 석방시켰는데 사례하러 오지 않았다. 여진이 랴오둥을 점령한 후 도망간 명의 장수 모문룡이 조선 영토에 머물면서 문제를 일으키므로, 여진은 조선에 모문룡을 잡아 보내기를 요청하였는데 거절하였다. 모문룡은 명 황제로부터 군대가 먹을 식량을 지급받는데, 여기에 조선이 토지를 제공하고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돈과 식량까지 주었다. 여진의 황제가 돌아가셨을 때, 또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였을 때 사신을 보내지 않았다. -“ `만문노당”-
임진왜란 전개도
후금의 성장
전쟁 피해
전쟁 전후 조선 경지 면적과 인구
명과 일본 강화 협상 결렬 이유 명이 일본군의 철수를 전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겠다고 제시하였다. 그러나 일본은`명의 공주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줄 것, `조선의 남부 4도(경상, 전라, 충청,경기)를 일본에 줄 것, 일본과 명의 무역을 재개할 것, 조선의 왕자1명을 일본에 볼모로 보낼 것 등 무리한 조건을 내세웠다.
일본 민중의 피해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 한반도에 파견된 군인이 모두 무사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정유 전쟁에 참전한 시마즈 요시히로 군대에 동원된 1만 3천여 명 가운데 무사는 13% 정도이고 무사에 딸린 사람이 40%로, 53%의 숫자만 전투 요원이었다. 그 밖에 47%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강제로 동원된 일반 농민으로, 운반 요원이었다. 도요토미로부터 동원 명령을 받고 규슈 나고야 성에 도착한 사타케 요시노부는“농민들이 세금을 내지 않으면 여자나 어린아이를 가리지 않고 죽여도 좋다. 마을이 폐허가 되어도 상관없다.”라고 지시하였다. 그렇게 해서 사타케 군이 인부로 동원한 일반 백성은 약 1,500명이었다. 탈주자가 생기자 죽여서라도 탈주를 막으려 하였다.
삼번의 난 지도
일본사 사건 정리 오다 노부나가 하시바 히데요시 에치젠 오다 출신 오아리의 슈고다이로 슈고 시바씨 봉사, 부친 누부히데 세력 확장 다케다 가쓰요리, 나가시노 전투 철포 활용 승리 하시바 히데요시 오아리 출생, 노부나가에게 봉사, 혼노지의 변 당시 모리 공격 총대장 빗츄의 다카마쓰에 있었으나 휴전 체결 후 교토 도착 야마사키 전투에서 아케치 미쓰히데 격파. 오다 노부카쓰․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코마키․나가쿠테 전투 승리
정묘.병자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