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주제 22 의인의 고난과 하나님의 신비 욥기 성경본문 욥기 1:1~42:17
역사적 배경
1 욥기를 쓴 저자는 누구인가?
2 욥과 욥기에 관한 성격
역사적 배경 (1) 역사서로 보는 관점 .
역사적 배경 (2) 교육서로 보는 관점 .
역사적 배경 (3) 마틴 루터의 관점 .
역사적 배경 (4) 현대의 문호 빅토르 휴고 .
본문과 해석
첫 번째 에피소드 – 사단의 시험과 욥 (욥 1:1~ 2:13) 본문과 해석 첫 번째 에피소드 – 사단의 시험과 욥 (욥 1:1~ 2:13) 두 번째 에피소드 – 욥과 친구들 사이의 변론 (욥 3:1~28:28) 세 번째 에피소드 - 욥의 주장 (욥 29:1~37:24) 네 번째 에피소드 – 욥의 회개와 순종 (욥 38:1~42:17)
1 사단의 시험과 욥 욥 1:1~ 2:13 흠이 없던 사람, 욥 죄 없이 고난을 받는 욥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흠이 없던 사람, 욥 (1) (왕상 22:51~53, 왕하1:1~18) 본문과 해석 1. 흠이 없던 사람, 욥 사건의 내용 & 본문과 해석 1. 흠이 없던 사람, 욥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1) 흠이 없던 사람, 욥 (왕상 22:51~53, 왕하1:1~18)
본문과 해석 1. 흠이 없던 사람, 욥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본문과 해석 1. 흠이 없던 사람, 욥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2) 죄 없이 고난을 받는 욥
본문과 해석 1. 흠이 없던 사람, 욥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본문과 해석 1. 흠이 없던 사람, 욥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본문과 해석 1. 흠이 없던 사람, 욥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본문과 해석 1. 흠이 없던 사람, 욥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2 욥과 친구들 사이의 변론 욥 3:1~ 28:28 엘리바스의 논지 빌닷의 논지 소발의 논지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본문과 해석 2. 욥과 친구들 사이의 변론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욥의 불행과 인내
본문과 해석 2. 욥과 친구들 사이의 변론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1) 엘리바스의 논지
본문과 해석 2. 욥과 친구들 사이의 변론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욥과 그의 친구들
본문과 해석 2. 욥과 친구들 사이의 변론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2) 빌닷의 논지
본문과 해석 2. 욥과 친구들 사이의 변론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거름더미 위의 욥과 세 친구
본문과 해석 2. 욥과 친구들 사이의 변론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3) 소발의 논지
본문과 해석 2. 욥과 친구들 사이의 변론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욥의 탄식
3 욥의 주장 욥 29:1~ 37:24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본문과 해석 3. 욥의 주장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본문과 해석 3. 욥의 주장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4 욥의 회개와 순종 욥 36:1 ~ 42:17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본문과 해석 4. 욥의 회개와 순종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본문과 해석 4. 욥의 회개와 순종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축복을 받은 욥
본문과 해석 4. 욥의 회개와 순종 사건의 내용 & 용어 해설
신학적 의미
신학적 의미 서론 욥기는 구약 성서에 나타난 가장 난해한 글로 알려져 왔다. 역사적 인물인가, 상징적 인물인가라는 논의도 그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잠언과 전도서와 함께 지혜문학에 속하는 욥기는 빅토르 휴고(Victor Hugo)의 말대로 인간 정신을 다룬 최대의 걸작임에는 틀림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욥기는 신앙의 심층을 다룬 고도의 신학 사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욥기를 해석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드라마 형식을 빌릴 수 있을 것이다. 1장~2장을 서막(overture)으로, 3장~26장을 제1막으로, 27장~37장을 제2막으로, 그리고 38장~42장을 종막으로 나누어 욥의 신앙적 순례를 추적해 갈 수 있을 것이다.
1 서막 – 왜 의인은 고난을 받는가?
신학적 의미 1. 서막 – 왜 의인은 고난을 받는가? 서막은 욥기의 주제와 문제 제기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인간이 겪는 가장 원초적 질문을 제기한다. 왜 의인은 고난을 받는가? 라는 질문이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단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1100만 명 중 600만 명이 학살당해 죽어간 삶의 수수께끼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누가 그들의 고난을 책임져야 하는 것인가? 6.25 한국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이념적 차이라는 이유 하나로 죄 없는 동족 수백만 명을 살생해야 하는 고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오늘의 죄 없는 북한 동포 수백만 명이 부자유와 배고픔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삶의 신비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질문은 1975년 캄보디아에서 시작한 살생의 비극이 지금까지 계속되는 사건들 속에서도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공산 지도자 폴 포트(Paul Pot)가 정적 뿐 아니라 노인과 어린이 300만 명을 마구 잡아 뜰에서 살해한 그 유명한 ‘킬링 필드’(Killing-Field)는 무엇으로 설명되는가?
이 모든 이유 없는 고난을 욥은 대변한다. 욥의 이야기는 이유 없이 죽거나 이유 없이 고난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상징이다. 신학적 의미 1. 서막 – 왜 의인은 고난을 받는가? 민주정부로 알려진 지금의 제 2총리 훈센이 정적들을 공개 처형하는 살인극이 계속되고 있는 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보스니아 전쟁 당시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라는 이름으로 가톨릭 교도들이 회교도들을 무참히 죽인 비극은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일까? 이 모든 이유 없는 고난을 욥은 대변한다. 욥의 이야기는 이유 없이 죽거나 이유 없이 고난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상징이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라는 욥의 절규는 우리 삶의 수수께끼를 대변하고 있다. 그러기에 욥의 이야기는 우리 실존의 이야기이며, 이유 없이 당하는 이웃의 고난이며, 크게는 인류의 고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2 제1막 – 욥에게 다가온 도전들
신학적 의미 2. 제1막 – 욥에게 다가온 도전들 이유 없는 고난을 겪고 있는 욥에게 다가온 도전 그 처음은 욥의 아내였고, 두 번째는 욥의 친구들이었다. 바로 이 도전들은 고난을 해석하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견해들을 대변하는 것들이다. 그 처음 도전자는 욥의 아내였다. 남편의 이유 없는 고난을 지켜보다 견디기 어려워 던진 아내의 도전은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에서 드러났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면, 그리고 사랑이시라면 어찌하여 죄 없는 남편, 욥의 고난을 허용하시는가’라는 질문이었다. 바로 이 질문 뒤에 내재해있는 아내의 신관은 ‘신의 죽음’이 아니면 ‘신의 무기력성’이었다.
신학적 의미 2. 제1막 – 욥에게 다가온 도전들 욥의 아내의 신학적 입장은 세속적 역사관에 근거한 ‘무신론적 비관주의’(Atheistic Pessimism)였다.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어떻게 ‘악’이 성행하고 ‘선’은 망하고 있는가? 역사의 현실을 보면 하나님은 죽었던지, 은닉하셨던지, 무능력한 분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없는 역사이며, 그것은 아무 소망도 없는 버려진 터라고 보는 것이 ‘무신론적 비관주의’이다.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구만 명의 동족 유태인이 가스실(Gas-Chamber)로 끌려가 죽어가는 장면을 보고 있던 유태인 철학자 마르코비치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3300년 전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하시던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이 비통한 고난을 보고도 침묵하는 하나님 보다는 신을 배신하면서까지 인간을 사랑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를 선택하리라.” 이후로 그는 맑스 주의자가 되었다.
신학적 의미 2. 제1막 – 욥에게 다가온 도전들 두 번째 도전은 욥의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로부터 온 것이었다. 3장에서 26장에 걸쳐 길게 펼쳐진 욥과 친구들 사이의 논쟁은 한마디로 ‘인과응보’의 원리를 중심으로 하는 도덕주의적 언쟁이었다. 당시 동방종교의 중심 주제였던 인과응보의 원리는 ‘죄’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으며, 죄의 결과는 심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욥의 고통의 소식을 듣고 찾아온 친구들은 말한다. “죄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데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욥 4:7~8)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욥 8:4) 그러므로 욥의 고난을 두고 던진 세 친구의 처방은 욥이 숨겨 둔 ‘죄’에 대한 고발이었다. 죄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신학적 의미 2. 제1막 – 욥에게 다가온 도전들 세 친구는 하나님도, 역사도, 삶도 결국은 인과응보의 관계라는 극히 도덕적 규범에서 욥을 봄으로써, 법을 넘어서서 계시며 법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통치성을 포착하지 못하는 과오를 범하였다. 그들은 원인과 결과의 상관관계를 유일한 판단의 잣대로 삼아 하나님도, 역사도, 삶도 그 틀 속에 잡아 넣으려는 도덕주의적 비관주의 혹은 도덕주의적 허무주의 (moralistic nihilism)에 빠지고 말았다고 틸리케는 말하고 있다. 도덕주의적 허무주의는 논리적으로는 타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허무주의는 사실상 하나님을 하나의 도덕적 규범으로 전락시키고, 언제나 하나님은 심판자로 만들며 동시에 ‘너’는 죄인이고 ‘나’는 의인이라는 이분법적 도식 안에서 언제나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냉혹한 비판자가 되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다. 이러한 사상을 우리는 ‘도덕주의적 허무주의’라고 부른다.
3 제2막 – 욥의 논쟁과 영적 투쟁
신학적 의미 3. 제2막 – 욥의 논쟁과 영적 투쟁 욥의 논쟁과 영적 투쟁은 아내의 도전과 친구들의 정죄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욥의 영적 투쟁은 아내의 무신론적 비관주의와 친구들의 도덕주의적 허무주의가 포착하지 못하는 심연의 세계로 들어갔다. 바로 욥의 영적 투쟁의 차원을 읽지 못한 아내와 세 친구들과는 논쟁과정에서도 그 초점이 자주 엇갈리는 양곡선을 그렸다. 욥의 영적 투쟁의 첫 단계는 ‘이유 없이 다가온 고난’을 운명처럼, 때로는 하나님의 뜻으로 수용하는데서 시작되었다. 재산과 자식을 다 잃고 난 이후 욥은 오히려 고백한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고 돌아가올지라”(욥 1:21)는 고백으로 고난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아내의 날카로운 도전 앞에서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욥 2:10)로 대응하였다.
복도, 재앙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이유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을 반대하였다. ‘무조건적인 신앙’의 단계였다. 신학적 의미 3. 제2막 – 욥의 논쟁과 영적 투쟁 복도, 재앙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는 이유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을 반대하였다. ‘무조건적인 신앙’의 단계였다. 한국교회의 영성중에 이 ‘무조건적인 신앙’을 마치 유일한 신앙 자세처럼 가르치고 있는 것은 다소 위험성을 내포한다고 본다. 어떻게 보면 은혜로운 신앙 같지만, 다른 한편 이런 신앙은 ‘유아기적 신앙’이고, 쉽게 무너지기 쉬운 신앙인 것이다. 욥의 영적 투쟁 첫 단계는 모든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무조건적 신앙이었다. 그러나 욥의 영적 투쟁 두 번째 단계는 논쟁적이고 전투적이고 투쟁적 단계로 접어들었다. 특히 7일7야를 찾아온 세 친구와 함께 있다가 욥은 자기의 생일을 저주했지만 친구들이 제시하는 ‘인과응보’의 교리를 거절했다
신학적 의미 3. 제2막 – 욥의 논쟁과 영적 투쟁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욥 12:2)“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한 내가 아니니라”(욥 13:2) 과거에 자신도 ‘인과응보’ 교리의 신봉자였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문제는 세 친구가 인과응보라는 교리적 관점에서 고난의 문제를 끝까지 풀어보려고 하는데 반해, 욥은 자기 자신의 고난 문제가 ‘인과응보’의 차원으로 해결되는 그 무엇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깊은 신앙의 문제였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아내와 친구들은 욥의 고난의 심연을 결코 보지 못했으며, 욥의 외로운 영적 투쟁은 아내의 무신론적 허무주의, 친구들의 ‘도덕주의적 허무주의’를 넘어서 다른 세계로 옮겨가고 있었다. 여기서 아내, 친구들과 욥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단절이 시작되었으며, 욥은 그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는 외로운 투쟁을 계속해야 했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욥 10:2). 신학적 의미 3. 제2막 – 욥의 논쟁과 영적 투쟁 욥은 이제 세 번째 단계의 영적 투쟁에 들어갔다. 아내와 친구들과의 논쟁에서 아무런 해결을 얻지 못한 욥은 이번에는 하나님과의 쟁변으로 그 초점을 옮겼다. 하나님과의 쟁변은 하나님을 향한 항변으로 시작되었다. ‘무조건적인 신앙’에서, ‘인과응보’의 차원을 넘어서서 이제 하나님을 향하여 씨름하기 시작했다.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욥 10:2).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주역은 아니지만, 이 고난을 통하여 무엇을 하시고자 하는지의 동기를 질문하는 항변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앙적 투쟁이 사람이나 어떤 법칙이 그 대상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싸움이라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신학적 의미 3. 제2막 – 욥의 논쟁과 영적 투쟁 여기서 욥은 하나님을 쟁변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쟁변에 끌어들이려는 욥의 진정한 내면적 의도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고 이를 만천하에 알리려는데 있었다. 이 내면적 동기를 실현시켜 가는 과정에서 욥은 먼저 자신을 죄인으로 취급하는데 대한 이유를 묻는 항변을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죽음이후에라도 자신의 무죄를 천명해 주실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통보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으리라”(욥 23:10). ‘무조건적인 신앙’에서부터 ‘전투적이고 공격적인 신앙’으로의 전환 뒤에는 욥의 교만과 독선이 깔려 있었다. 하나님과의 항변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학적 의미 3. 제2막 – 욥의 논쟁과 영적 투쟁 그러나 문제는 욥의 강력한 항변과 대면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끝내 침묵하셨다는 사실에서, 욥의 영적투쟁은 점진적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극심한 소외와 단절, 그리고 고독으로 이어지는 역설로 치달았다.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에도 하나님은 악인으로 취급하는 부당함에 욥이 대면을 요구하고 나섰지만, 하나님은 끝내 아무런 응답도 대면도 하시지 않고 침묵만을 지키신다는 게서 욥은 영적 투쟁의 깊은 좌절에 빠졌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말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
신학적 의미 3. 제2막 – 욥의 논쟁과 영적 투쟁 이제 극한 한계에 이른 욥! 그는 한 가지, 대면에 응하시지 않는 하나님을 끝내 저주하거나 배신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께 대면은 요청했지만, 고난의 책임을 물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분명 인간이 쉽게 도달하기 힘든 영적 투쟁의 높은 경지임에는 틀림 없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한 욥의 신앙저변에는 여전히 자신 신앙의 독선과 자신이 무죄하다는 교만이 여전히 내재해 있었다. 결국 욥은 하나님을 끝까지 배신하지 않는 신앙의 힘으로 자신의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것을 우리는 욥의 ‘유신론적 허무주의’(Theietic Nihilism)라고 부른다.
신학적 의미 3. 제2막 – 욥의 논쟁과 영적 투쟁 신앙의 힘으로 하나님도, 삶도, 고난도 마음대로 해결해 보려는 교만의 표출을 의미한다. 이 순간에도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었으며, 깊은 영적 좌절만이 남았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현실이고, 실존적 경험이다. 이유없는 고난을 그 어느 누가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4 종막 – 하나님의 오심과 만남
신학적 의미 4. 종막 – 하나님의 오심과 만남 욥기의 절정은 인간들의 극한적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욥이 고백한 것처럼 앞으로도, 뒤로도, 옆 좌우 그 어디에도 열려 있지 않은 절망이었다. 이 때에 행동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야웨’라는 이름으로(아도나이-나의 주님) 하나님은 폭풍우 가운데서 욥에게 자신을 말씀으로 나타내심으로 오랜 침묵을 깨셨다. 이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논쟁이 모두 끝난 다음에 일어난 사건이라는데 주목해야 한다. 욥의 고난을 중심으로 펼쳐진 전체 드라마의 ‘연출자’셨던 하나님, 침묵 속에서 드라마를 운영하시던 하나님께서 침묵을 깨시고 ‘대화자’로, ‘말씀의 주역’으로 욥을 대면하셨다. 여기서 ‘아내’, ‘세 친구’, ‘엘리후’와의 쟁변 구도가 이제 하나님과 욥의 대화구도로 바뀌었다.
신학적 의미 4. 종막 – 하나님의 오심과 만남 사실은 이 때가 욥이 얼마나 소원했던 순간이었던가? 자기의 ‘무죄’를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과의 면담을 그토록 끈질기게 요구했던 시간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시고 말씀으로 욥을 만나신 것은 욥의 간구에 대한 응답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욥이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자신의 ‘의’를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위로하신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동안 고난을 받아 온 욥에게 위로하거나, 고난은 계획된 시험이었다는 사실을 통보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만일 우리가 이 계시의 순간을 욥의 그 ‘무엇’ 때문에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 드라마 속에 담겨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왜곡하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신학적 의미 4. 종막 – 하나님의 오심과 만남 오히려 폭풍우 가운데 오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욥의 깊은 신앙의 위선과 영적 교만을 정죄하고 심판하시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에 유의한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의와 신앙 그리고 지식으로 감히 하나님의 창조를 시험하고 또 판단하려는 욥의 신앙적 교만을 심판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의 ‘의’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반전(over-rule)이었다. 칼 바르트는 인간의 교만 앞에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신적인 부정’ (Divine No)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신앙’의 힘으로, 자신의 ‘의’로, ‘지식’으로 하나님과 구원에 이룰 수 없다는 선언인 것이다. 욥의 드라마가 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인간 자신의 하나님 앞에 가장 무기력한 존재라는 사실의 표출이다.
신학적 의미 4. 종막 – 하나님의 오심과 만남 여기서 욥은 그 동안 자신과 자신의 고난을 지탱해 온 ‘의’와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부정되는 경험을 가진다. 욥의 교만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모든 것, 지식, 신앙, 영적 업적이 부정되는 것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신적인 부정’에서 우리의 교만이 깨어지는 때, 거기에는 말씀이 임재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욥은 오랜 영적 투쟁에서 쌓았던 업적과 교만이 한순간 무너져 가는 하나님의 부정을 경험했다. 그러나 말씀 속에 오시는 하나님은 욥의 심판을 가져오는 ‘부정’(Divine No)만을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부정’ 다음에는 하나님의 ‘긍정’(Divine Yes)을 준비하고 계셨다. ‘신적인 긍정’은 ‘신적인 부정’ 없이는 오지 않는다.
신학적 의미 4. 종막 – 하나님의 오심과 만남 그러나 하나님의 긍정은 욥기 38:4에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신 데서부터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와 별과 달, 해와 바다 그리고 땅, 그리고 모든 식물과 인간들을 창조할 때 “너 욥!, 티끌보타 못한 인간 욥,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를 질문하심으로 우주와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심을 선언한다.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풀이 나게 하였느냐?(욥 38:26~27). 우주와 역사의 경륜을 네가 지탱할 수 있는가를 물으신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친히 수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심을 선언한다.
신학적 의미 4. 종막 – 하나님의 오심과 만남 하나님의 창조하심 앞에서 인간이 감히 변론할 수 있는가? 인간이 축적한 지식과 신앙이 감히 창조의 신비와 그 운행을 측정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기에 하나님은 욥을 위로하시지도, 고난의 이유도 설명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창조와 그 경륜은 인간의 지식의 세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우주와 삶을 궁극적으로 경륜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 그 만남 이외에 다른 그 무엇이 필요했던가? 하나님과의 만남! 그것은 모든 것의 해답이었다. 아내와의 변론에서 남은 질문에 대하여, 세 친구들이 던진 인과응보에 대한 도전에 대하여, 엘리후의 영적 충고가 남긴 질문에 대하여, 그리고 심지어 욥이 던진 종교적 질문에 대하여까지도 창조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만남만이 궁극적인 해답이었다.
신학적 의미 4. 종막 – 하나님의 오심과 만남 여기서 욥은 회심의 자리에 들어선다. 욥이 회개한 것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으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는 고백에서 욥은 새로운 신앙과 존재로 전환하는 경험을 가진다. “귀”로만 듣던 신앙(Credentia, Fiducia)으로부터 ‘눈’으로 주를 뵙는 신앙(Fides)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온 것이다. ‘귀’로만 듣던 신앙은 하나님과의 만남 없는 자신의 ‘의’를 신앙의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면, ‘눈’의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면, ‘눈’으로 뵙는 신앙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오는 자기포기(자신의의와 신앙의 업적)의 신앙이었다. Credentia가 ‘인과응보’ 같은 교리 신앙의 대명사라면, Fiducia는 자신의 ‘의’를 사실상 신봉하는 신앙이었다. 그러나 Fides는 교리나, 자신의 ‘의’의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의 신앙이며, 하나님의 뜻(인간의 뜻이 아니라)을 분별하는 신앙이며, 말씀 앞에 복종하는 신앙인 것이다. Credentia, Foducia는 신앙으로부터 Fides의 신앙으로의 전환은 ‘회개’(Metanoia)를 거쳐서만 가능한 것이다. 회개는 전 존재의 변화이고 전환이다. 자기의 ‘의’를 중심으로 하던 축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그리고 창조의 ‘축’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성서는 욥기 42:7~17에서 하나님께서 욥을 다시 용납하시고 갑절의 축복을 주셨으며, 140년을 더 살게 하신 것으로 결론 짓는다. 그러나 우리는 욥의 축복을 다시 강조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안다. 욥의 축복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온 극히 작은 후속적인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욥기의 생명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욥은 자기의 ‘의’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경륜 앞에 복종시켰다는 사실에 있다. 그가 고난을 이겼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욥기를 다시 인본주의적 해석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신학적 의미 4. 종막 – 하나님의 오심과 만남 여기서 욥은 회심의 자리에 들어선다. 욥이 회개한 것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으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라는 고백에서 욥은 새로운 신앙과 존재로 전환하는 경험을 가진다. “귀”로만 듣던 신앙(Credentia, Fiducia)으로부터 ‘눈’으로 주를 뵙는 신앙(Fides)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온 것이다. ‘귀’로만 듣던 신앙은 하나님과의 만남 없는 자신의 ‘의’를 신앙의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면, ‘눈’의 내용으로 한 것이었다면, ‘눈’으로 뵙는 신앙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오는 자기포기(자신의의와 신앙의 업적)의 신앙이었다. Credentia가 ‘인과응보’ 같은 교리 신앙의 대명사라면, Fiducia는 자신의 ‘의’를 사실상 신봉하는 신앙이었다.
신학적 의미 4. 종막 – 하나님의 오심과 만남 그러나 Fides는 교리나, 자신의 ‘의’의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의 신앙이며, 하나님의 뜻(인간의 뜻이 아니라)을 분별하는 신앙이며, 말씀 앞에 복종하는 신앙인 것이다. Credentia, Foducia는 신앙으로부터 Fides의 신앙으로의 전환은 ‘회개’(Metanoia)를 거쳐서만 가능한 것이다. 회개는 전 존재의 변화이고 전환이다. 자기의 ‘의’를 중심으로 하던 축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그리고 창조의 ‘축’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성서는 욥기 42:7~17에서 하나님께서 욥을 다시 용납하시고 갑절의 축복을 주셨으며, 140년을 더 살게 하신 것으로 결론 짓는다.
신학적 의미 4. 종막 – 하나님의 오심과 만남 그러나 우리는 욥의 축복을 다시 강조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안다. 욥의 축복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온 극히 작은 후속적인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욥기의 생명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욥은 자기의 ‘의’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경륜 앞에 복종시켰다는 사실에 있다. 그가 고난을 이겼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욥기를 다시 인본주의적 해석으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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