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ǁ.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과 변천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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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01 02 03 04 05 고려의 성립과 발전 고려의 경제와 산업 고려의 사회 제도 고려의 사상과 종교 고려의 대외 관계
· · · 74 01 고려의 경제와 산업 · · · 86 02 고려의 사회 제도 · · · 96 03 고려의 사상과 종교 · · ·106 04 고려의 대외 관계 · · · 116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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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고려의 대외 관계 이 단원에서는 고려의 국제 관계와 교류의 전개 과정을 시기별로 나누어 이해 할 수 있다.
2. 고려의 문화 교류를 국제 관계의 변화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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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전기의 대외 관계 서희는 소손녕의 주장을 어떻게 반박하였을까?
그대 나라가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 땅인데 쳐들어와 차지했고 또 우리와 국경을 마주하는 데도 바다를 넘어 송을 섬겼기 때문에 오늘 출병하였다. 땅을 떼어 바치고 서로 사신을 보내면 무사할 것이다. - “고려사” ▲ 서희의 외교 담판 (민족 기록화) 서희는 소손녕의 주장을 어떻게 반박하였을까? [정답] 서희는 고려는 신라가 아닌 고구려의 후손이므로 옛 고구려의 영토 역시 고려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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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전기의 대외 관계 ⑴ 다원적 국제 질서의 형성 ① 중국: 당 멸망 → 5대 10국으로 분열 → 송 건국(960)
② 거란: 요 건국, 영토 확장 ③ 송과 요의 외형적 평화 관계: 전연의 맹약(1004) 체결 ④ 금: 12세기 초 만주에서 여진족이 부족을 통일하고 건국(1115) • 송과 연합하여 요 멸망 → 송까지 강남으로 몰아내고 화북 지방 차지 • 동아시아에서 금과 남송이 대립하는 형세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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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전기의 대외 관계 ⑵ 거란과의 전쟁 ① 배경 • 거란의 성장: 발해 멸망(926), 중국을 압박하면서 세력 확장
→ 송이 등장하자 고려와 친선 관계 맺으려 함. • 고려: 발해 유민 수용, 북진 정책과 친송 정책 추진 → 거란과의 관계 악화 ② 거란의 침략 ③ 결과: 고려, 송, 거란 사이의 세력 균형, 공무역 실시, 개경에 나성 축조, 천리 장성 축조(압록강~도련포) 1차(993) • 원인: 거란이 송과의 외교 단절 요구 • 결과: 서희의 외교 담판(여진에 대한 협공 제안) → 강동 6주 획득 2차(1010) • 구실: 강조의 정변 • 전개: 개경 함락, 현종의 피난 → 양규의 활약으로 거란군 피해 3차(1019)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침입 → 강감찬 등이 귀주 대첩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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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전기의 대외 관계 서희의 외교 담판과 강동 6주의 획득 자료 보기
거란의 장수 소손녕은 거란이 고구려를 계승하였으므로 옛 고구려 영토는 모두 거란의 땅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서희는 고려는 신라가 아닌 고구려의 후손이므로 옛 고구려 영토 역시 고려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양국은 이러한 명분론을 내세웠지만 회담의 핵심은 여진족 문제였다. 당시 거란은 여진, 송, 고려가 연합하는 것을 우려하였다. 서희는 이 사실을 간파하고 거란과 고려가 여진을 협공하자는 새로운 제안을 하였다. 이에 소손녕은 기뻐하며 두 군대가 만나는 지점인 압록강 부근의 강동 6주를 내놓았다. 그 후 이 지역은 거란과의 전쟁에서 중요한 기지 역할을 하였다. ▲ 서희 동상(경기 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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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전기의 대외 관계 ⑶ 송과의 교류 ① 5대와의 관계: 국초부터 외교 관계, 광종 때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 실시 ② 송과의 교류: 인적 ∙ 물적 교류 활발, 항저우에 고려인이 집단 거주 • 송: 적극적인 통상 정책 실시, 정치적 ∙ 군사적 목적 • 고려: 송의 물품과 수준 높은 문화 수입 → 조공 무역과 민간 무역이 모두 실시(민간 무역 활발) → 교역품의 대다수는 주로 왕실이나 귀족의 수요를 충당하는 사치품, 고가품 ③ 고려에 끼친 영향 • 사신, 학자, 승려들을 보내 선진 문물 수입, 각종 제도 정비 • 초조대장경, 교장 간행, 청자 기술 발전 등에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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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전기의 대외 관계 고려에 귀화한 송 상인들 자료 보기
송의 상인 유성 등 49명이 왔다. 처음에 명주 사람인 두도제, 축연조 등이 상선을 따라 우리나라에 왔다가 돌아가지 않았는데, 명주에서 두 번이나 공문을 보내 그들을 돌려보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송에 편지를 부쳐 그들을 머물도록 하자고 하였더니 이때 유성 등이 와서 자기 나라 황제의 지시에 의한 공문을 명주 고을에 전하였다. 그 공문에는“두도제 등을 자기 생각대로 머물러 있도록 한다.”라고 하였다. - “ 고려사” ▲ 황비창천명 황해도 무늬 거울 (국립 중앙 박물관) ‘밝게 빛나고 창성한 하늘’이라는 의미의 황비창천이라는 명문과 돛을 올린 배가 파도를 헤치고 항해하는 모습이 새겨진 구리거울이다. 고려의 활발한 대외 교류를 짐작하게 해 준다. 송의 상인이었던 두도제 등은 중국 명주에서 공적인 일로 고려에 왔다가 귀환하지 않았다. 이들은 송 황제의 허락을 받아 고려에 귀화하였으며, 송과 고려의 무역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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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전기의 대외 관계 ⑷ 여진과의 전쟁 ① 초기: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평화로운 관계 유지
② 12세기 초: 완안부를 중심으로 여진족 통일 → 고려 침공 ③ 고려의 대응: 별무반 창설 • 윤관의 건의로 조직, 신기군 ∙ 신보군 ∙ 항마군으로 구성 • 여진족을 몰아내고 동북 지방 일대에 9성 축조 → 1년 만에 동북 9성에서 철수(여진의 조공 약속, 거듭된 공격) ④ 금의 건국(1115) • 아구다가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금 건국 → 요 멸망 • 고려에 군신 관계 요구 → 이자겸이 금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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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 전기의 대외 관계 금의 사대 요구에 대한 고려 조정의 논의 자료 보기
금이 새로 요를 격파하고 사신을 보내 형제의 나라로 조약을 맺고자 청하였다. 대신들은 격렬하게 안 된다고 말하였고 그 사신을 목 베어 죽이자는 사람도 있었다. 김부의(김부식의 동생)가 홀로 상소하여 말하기를 “신이 깊이 생각해 보니 한이 흉노에 대해서나 당이 돌궐에 대해서 그들과 더불어 속국으로 칭하였고, 혹은 공주를 시집보내는 등 그들과 화친할 길이라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지금 송과 같은 대국도 거란과 더불어 서로 백숙이니 형제이니 하면서 대대로 화친하고 지내 왔습니다. 천자의 높음은 천하에 대적할 상대가 없지만, 이처럼 오랑캐 나라에 굴복하여 섬기는 것은 이른바‘성인은 잠시 원칙을 버리고 권도로서 처사하여 국가를 보전한다.’라는 좋은 계책입니다 “고려사” 금의 사대 요구를 둘러싸고 고려 조정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형제의 나라로 조약을 맺자는 금의 요구에 일부 신하는 강경하게 대응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당시 문벌 귀족 세력은 국가를 보전한다는 명분으로 금의 요구를 수락하였다. 얼마 후에 세력을 키운 금은 더 나아가 고려에게 군신 관계를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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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 후기의 대외 관계 몽골이 침입하였을 때 고려는 어떻게 대처하였을까?
김윤후는 고종 때 사람으로 일찍이 중이 되어 백현원에 있었다. 몽골 군대가 다다르자, 윤후가 처인성으로 피난하였는데, 몽골의 장수 살리타가 성을 치매 윤후가 이를 사살하였다. - “고려사” ▲ 처인성 전투 기록화 (전쟁 기념관) 몽골이 침입하였을 때 고려는 어떻게 대처하였을까? [정답] 몽골의 침략에 맞서 30~40여 년간 항쟁하였다. 최씨 무신 정권은 강화도로 천도하여 항전하였으며 특히 하층민이 항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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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대외 관계 2. ⑴ 몽골과의 전쟁 ① 배경 • 몽골의 세력 확장: 몽골 초원 통일(13세기 초) → 중국 화북 일대 점령 → 유럽의 폴란드와 러시아, 인도 북부 지역까지 진출 • 강동성 전투: 몽골에 쫓겨 고려에 침입한 거란족을 몽골과 연합하여 축출 → 고려와 몽골 사이에 사신 왕래 → 몽골의 과도한 공물 요구 ② 몽골의 침입: 30여 년 동안 6차례 고려 침략 1차 침입 (1231) • 원인: 몽골 사신 저고여 일행이 귀국길에 피살 • 과정: 몽골의 침입 → 귀주성(박서), 안북부(최춘명)에서 격퇴 → 몽골, 고려의 항복을 유도하여 강화, 다루가치를 남겨두고 철수 2차 침입 • 원인: 최우 정권의 강화도 천도 → 장기 항전 준비 • 과정: 처인성 전투에서 살리타가 전사하자 철군 → 몽골, 금을 정복한 다음 여러 차례 고려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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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 후기의 대외 관계 한 걸음 더 최씨 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한 이유
최씨 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한 까닭은 무엇일까? 몽골군은 기병이 강한 반면 해전에는 약하였다. 그런데 강화도 주변은 물살이 빠르고 암초가 많아 선박 운행에 상당한 위험이 따랐다. 또 강화도 외곽은 가파른 산이 둘러 있고, 앞쪽은 뻘이 발달해서 천연의 장벽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넓은 평야가 있어 생산물이 풍부하고, 해로와 수로를 통해 조세를 안정적으로 걷을 수 있었다. 고지도 속에 나타난 강화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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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 후기의 대외 관계 ⑴ 몽골과의 전쟁 ③ 전쟁 이후의 생활 • 왕, 귀족: 화려한 생활 유지, 연등회와 팔관회 시행
• 백성: 몽골군에게 살해당하거나 포로로 잡혀감. • 문화재 소실: 초조대장경 판목(대구 부인사), 황룡사 9층 목탑 등 ④ 하층민의 활약 • 처인성 전투: 승려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들의 항전 → 살리타 사살 • 충주성 전투: 노비의 항전, 다인철소 주민들의 항전 ⑤ 몽골과의 강화: 최씨 무신 정권의 붕괴로 몽골과의 강화 추진 → 태자였던 원종이 원 세조(쿠빌라이 칸)를 만나 강화 체결(1259) → 개경으로 환도(1270) ⑥ 결과: 몽골과의 오랜 항쟁 → 원 세조의 ‘세조 구제’ 제시(고려 자주성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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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의 대외 관계 2. 한 걸음 더 몽골의 군사들 몽골군은 20세기 이전에 세계의 모든 지형과 기후대를 점령한 유일한 군대였다. 몽골 말은 조랑말보다 조금 크지만 지구력과 생존력이 뛰어나 더위와 추위에 강했다. 몽골 기병은 여러 필의 말을 거느리고 말 위에서 자고 말 젖과 말고기를 먹으며 이동했고, 1,000km 밖의 군대와 연락을 취하며 작전을 수행하였다. 몽골군은 뛰어난 기마술과 궁술을 바탕으로 한 기동력 있는 유목 군대의 강점을 유지하며, 정복 과정에서 얻은 피정복민의 기술과 인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해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 말을 탄 채 뒤로 활을 쏘는 몽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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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 후기의 대외 관계 백성의 대몽 항쟁과 원 세조의 세조 구제 탐구 활동 몽골과의 전쟁에서 활약한 백성 자료 1
처음 충주 부사 우종주가 매양 장부와 문서로 인하여 근자에 판관 유홍익과 틈이 있었는데, 몽골군이 장차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성 지킬 일을 의논하였다. 그런데 의견상 차이가 있어서 우종주는 양반 별초를 거느리고, 유홍익은 노군과 잡류 별초를 거느리고 서로 시기하였다. 몽골군이 오자 우종주와 유홍익은 양반 등과 함께 다 성을 버리고 도주하고 오직 노군과 잡류만이 힘을 합하여 쳐서 이를 쫓았다 “고려사” 1. 자료 1을 참고하여 원 세조가 세조 구제를 제시한 역사적 배경을 알아보자. [정답] 몽골과의 전투에서 고려는 민중을 중심으로 맞서 싸웠다. 30~40여 년에 이르는 전쟁에도 굴복하지 않은 고려에 원은 세조 구제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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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 후기의 대외 관계 백성의 대몽 항쟁과 원 세조의 세조 구제 탐구 활동 세조 구제 자료 2
첫째, 옷과 머리에 쓰는 관은 고려의 풍속에 따라 바꿀 필요가 없다. 둘째, 사신은 오직 원 조정이 보내는 것 이외에 모두 금지한다. 셋째, 개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고려 조정에서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 넷째, 압록강 둔전과 군대는 가을에 철수한다. 다섯째, 전에 보낸 다루가치는 모두 철수한다. 여섯째, 몽골에 자원해 머무른 사람들은 조사하여 돌려보낸다. 원 세조(쿠빌라이 칸)는 고려가 요구했던 내용을 수락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양국 관계를 제시하였다. 이때 세조가 약소한 것을 ‘세조 구제’라 한다. 2. 세조 구제는 고려가 자주성을 유지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설명해 보자. [정답] 고려의 독자적인 제도와 풍습 등을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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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 후기의 대외 관계 ⑵ 삼별초의 대몽 항쟁 ① 배경 • 무신 정권의 붕괴 → 몽골과의 강화, 개경 환도
• 무신 정권의 군사적 기반으로 대몽 항쟁 전개하던 삼별초가 반몽 정권을 세우고 저항 ② 과정 • 강화도 → 진도(용장산성) → 제주도(항파두리성)로 거점을 옮기면서 저항 • 서남해안 도서 지방 점령 → 정부의 조세 수송로 차단 • 일본에 외교 문서(몽골의 일본 공격 가능성, 연대 필요성)를 보냄. → 군사 지원 요청 • 여 ∙ 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제주도 함락, 삼별초 항쟁 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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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 후기의 대외 관계 ⑶ 일본 원정에 동원된 고려 ① 몽골의 일본 원정 1차
• 배경: 고려를 복속시키고 가마쿠라 막부에 항복 요구 → 막부의 거절 • 추진: 정동행성 설치 → 고려에서 전함 건조, 수군 동원 ② 결과 • 고려: 정동행성은 그대로 남아 고려의 내정 간섭 • 일본: 과도한 군비 지출 등으로 가마쿠라 막부 붕괴 1차 전함 900척, 병력 3만 9천여 명 동원 → 태풍으로 퇴각 2차 • 고려: 전함 900척, 병력 4만여 명 강남군: 전함 3,500척, 병력 10만 명 동원 → 태풍에 난파, 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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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 후기의 대외 관계 끝까지 몽골에 저항한 삼별초 자료 보기 ◀ 고려첩장불심조조(도쿄대학교 사료 편찬소)
몽골이 일본을 공격할 가능성과 연대의 필요성, 군사적 지원 요청을 담고 있다. 강화도에서 봉기한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삼았다. 이들은 관료와 가족을 인질로 잡고 진도로 떠났으며, 진도의 용장산성을 중심으로 정부의 조세 수송로를 차단하였다. 여 · 몽 연합군이 진도를 함락하자 삼별초는 김통정의 지휘 하에 제주도의 항파두리성으로 옮겨 항쟁하다가 1273년 결국 패하였다. ▲ 삼별초의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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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 후기의 대외 관계 ⑷ 원과의 교류 ① 인적 교류: 몽골풍, 고려양 유행
• 원: 전쟁 포로나 공녀로 원에 끌려감, 공녀 중 원 황제나 고위 관리의 후처가 되기도 함, 스스로 원에 귀화하여 정착하는 사람도 생김. • 고려: 몽골 인, 중국인, 색목인 등 다양한 민족 왕래 ② 새로운 문물의 수용 농업 기술 이암, “농상집요” 소개 → 농업 기술 체계화에 기여 의생활 문익점, 원에서 목화를 들여와 의생활 혁신에 이바지 무기 제조 화약 제조 기술 습득, 화통도감 설치 → 화약, 화포를 제조하여 왜구 격퇴에 활용 과학 기술 수시력 등 수용 → 조선 세종 대의 과학 기술 발달의 밑바탕 종교 성리학, 라마교 등 새로운 사상과 종교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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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 후기의 대외 관계 한 걸음 더 몽골풍과 고려양
고려와 원 사람들이 서로 왕래하면서 각 나라의 풍속을 따라 하게 되었다. 특히 머리 모양, 옷, 음식, 도자기, 언어 등이 섞이면서 영향을 주고 받았다. 몽골식 머리인 ‘겁구아(怯仇兒)’에 대한 저항감은 상당히 심하여 문제가 되었다. 1278년 충렬왕은 모두 몽골식 머리를 깎도록 했지만 아버지 원종은 끝까지 깎지 않았다. 한편 원에서 소주가 전래되었는데, 요즘 일반적인 희석식이 아닌 증류식 술이었다. 고려의 의복과 음식, 도자기 등이 몽골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이는 원 궁궐 안에 있던 고려 출신 궁녀나 환관들이 유행시킨 것이다. ▲ 소줏고리 소주를 내리는 데 쓰는 재래식 증류기다. 소주는 원에서 전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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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 후기의 대외 관계 색목인으로 고려에 뿌리를 내린 설손 자료 보기
설손은 원에 살았던 위구르 인으로, 고조부가 원에 귀화한 후 대대로 벼슬을 하였다. 설손은 원 순제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황태자에게 경전을 가르쳤는데, 이때 원에 머물던 공민왕과 인연을 맺었다. 그 후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피해 고려에 들어와 귀화하였다. 그가 남긴 저서로는 “근사재일고”가 있다. 설손의 아들 설장수는 몽골 어, 중국어에 능통하였으며 과거를 통하여 관직에 진출한 후 고려 조정의 외교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설장수는 고려 말 대표적 사대부로 이름을 날렸으며, 왜구 격퇴론을 올리고 공양왕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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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 후기의 대외 관계 ⑸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 ① 홍건적의 침략 • 홍건적: 원의 지배에 반대하여 일어난 한족 반란군
• 2차 침입 때 개경 함락, 공민왕이 안동까지 피난 ② 왜구의 침략 • 해안 지방은 물론 내륙 깊숙이 침략하여 약탈,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감. • 왜구의 침입으로 조운선이 끊어지고 서남부 해안 초토화 ③ 신흥 무인 세력의 성장 • 최영의 홍산 전투(1376), 이성계의 황산 전투(1380) 등에서 왜구 격퇴 • 최무선은 화포를 사용하여 왜구 격퇴(진포 대첩, 1380) • 박위,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 정벌 ④ 국제 정세의 변화: 명의 건국, 원은 북쪽으로 밀려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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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 후기의 대외 관계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및 격퇴 자료 보기
홍건적은 원 말 한족 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렀다고 해서 홍건적이라 하였다. 1355년(공민왕 4)에 국호를 송이라 정하고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그 일부가 요동을 점령했다가 원의 반격에 쫓기게 되자 고려를 침범하였다. 홍건적의 침략을 계기로 고려에서는 원과의 제휴를 적극적으로 모색하면서 반원 정책이 퇴색하기도 하였다. 한편 단순한 해적에 불과한 왜구는 오래 전부터 존재하였다. 그러다 1350년부터 왜구가 대규모화하였다. 왜구는 교동과 강화도까지 점거했으며, 이들로 인해 조운선이 끊기고 서해와 남부 해안의 군현이 초토화되었지만 별다른 대책을 세우기가 어려웠다. ▲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 및 격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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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의 대외 관계를 정리한 다음 표의 빈칸을 채워 보자.
중단원 마무리 1. 고려의 대외 관계를 정리한 다음 표의 빈칸을 채워 보자. 시기 이민족 내용 10세기 말~ 11세기 초 • 1차 침입: ( )의 강동 6주 획득 • 2차 침입: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입, 양규의 선전 • 3차 침입: ( )의 귀주 대첩 12세기 • ( ) 편성 및 윤관의 정벌 → 동북 9성 설치 • 금 건국 후 고려에 사대 요구 → 이자겸의 요구 수용 서희 거란족 강감찬 별무반 여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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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의 대외 관계를 정리한 다음의 표를 채워 보자.
중단원 마무리 1. 고려의 대외 관계를 정리한 다음의 표를 채워 보자. 시기 이민족 내용 13세기 • 사신 피살을 구실로 침입 → 최우의 강화 천도 • 항전의 전개 → 김윤후의 전투, 팔만대장경 조판, 하층민의 저항 • 최씨 정권의 붕괴와 강화 → 개경 환도 • ( )의 항쟁 14세기 후반 토벌 작전 전개 → 최영, ( )의 성장 몽골족 삼별초 홍건적과 왜구 이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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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원과의 교류가 고려 사회에 가져온 변화를 서술해 보자.
중단원 마무리 2. 원과의 교류가 고려 사회에 가져온 변화를 서술해 보자. * 조건_정치적 변화와 사회 ∙ 문화적 변화의 내용을 구분할 것 [예시 답안]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면서 관제와 왕실 용어가 격하되었으며 쌍성총관부, 동녕부, 탐라총관부 등이 설치되면서 영토도 빼앗겼다. 게다가 과도한 공물과 공녀의 요구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활발한 교류가 전개되면서 고려 사회에서는 몽골풍이, 원에서는 고려양이 유행하였다. 또 원에서 새로운 문물이 전래되어 목화, 화약 제조법을 비롯해 조선 사회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성리학 등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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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고려인 – 이제현의 중국 여행 이제현은 1314년에 충선왕의 부름으로 만권당에 머물면서 원 생활을 시작하였다. 특히 세 차례에 걸쳐 중국 내륙을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충선왕은 중국 강남 지역을 여행하다 항저우의 유명한 화가에게 이제현의 초상을 직접 그리게 할만큼 그를 총애하였다. 이제현은 10여 년 만에 귀국하여 이곡과 이색 등 신진 사대부를 길러냈다. 당시 고려인들은 이제현이나 충선왕처럼 많은 지역을 돌아다니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제 정세와 이들의 삶을 고려하였을 때 세계를 보는 시선은 그만큼 넓어졌을 것이다. ▲ 이제현의 초상화 (국립 중앙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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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고려인 – 이제현의 중국 여행 1323년(충숙왕 10) 충선왕이 티베트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선왕의 구명 활동을 벌여 유배지를 도스마(타사마)로 옮길 수 있게 하였다. 이때 이제현은 충선왕을 만나기 위해 도스마(타사마)로 찾아 갔다. 충혜왕이 베이징으로 압송되자 다시 한번 원에 들어가 억울함을 호소하여 원이 충혜왕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이제현은 개경과 베이징을 여덟 차례 정도 오고 갔다. 1316년에 충선왕을 대신해 어메이 산에 제사를 올리고자 3개월 동안 다녀왔다. 쓰촨 성 청두에서 배를 타고 7일을 더 가는 왕복 5,100km의 긴 여정이었다. 당시 이제현은 원의 역참과 수참을 여러 차례 이용하였다. 1319년 충선왕이 강남 일대를 여행할 때 저장 성의 푸퉈 산을 비롯한 강남의 여러 명승고적을 둘러보는 행차에 시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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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간섭기에 중국을 다녀온 사람들의 활동을 조사하여 발표해 보자.
세계 속의 고려인 – 이제현의 중국 여행 원 간섭기에 중국을 다녀온 사람들의 활동을 조사하여 발표해 보자. 활동 [예시 답안] 문익점 문익점은 1363년(공민왕 12)에 원에 갔다 귀국할 때 목화 종자를 가지고 돌아와 장인 정천익에게 나누어 주고 함께 시험 재배를 하였다. 그가 심은 것은 모두 재배에 실패했지만, 정천익이 심은 씨앗 가운데 하나에서 꽃이 피어 100여 개의 씨앗을 얻었다. 그리고 해마다 재배량을 늘려 사람들에게 심어 기르도록 권장하였다. 그리고 정천익의 집에 머물던 홍원에게서 실을 뽑고 베를 짜는 기술을 배워 의복을 짜서 입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문익점은 고려 우왕 때 전의주부로 등용되었으며, 1389년에는 중서문하성의 간관인 정4품 좌사의대부가 되었다. 그러나 공양왕 때 이색 · 이림 · 우현보 등과 함께 전제 개혁에 반대했다가 조준의 탄핵으로 벼슬에서 물러났고, 1398년(조선 태조 7)에 7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문익점과 정천익이 처음 목화를 시험 재배했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문익점 면화 시배지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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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로 정리하기 918 □□, 고려 건국 궁예를 몰아낸 뒤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호족 포섭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훈요 10조’를 지어 전하게 하였다. 936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고려는 신라를 병합하고 후백제를 공격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958 광종, □□□ 실시 광종은 유교적 교양을 갖춘 신진 인사를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993 거란의 1차 침입 □□는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시도하여 거란과 강화를 맺고 강동 6주를 획득하였다. 왕건 과거제 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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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로 정리하기 1019 귀주 대첩 □□이 고려를 공격해 오자 강감찬, 강민첨 등이 귀주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1076
문종, 전시과 개정 관료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지자 문종 때 □□ 관료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하도록 전시과를 조정하였다. 1107 윤관, 여진 정벌 윤관은 □□□을 편성하여 여진족을 북방으로 쫓아낸 뒤 동북 9성을 쌓았다. 1126 □□□의 난 예종과 인종에게 딸을 시집보내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그는 척준경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거란 현직 별무반 이자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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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로 정리하기 1135 서경 천도 운동 □□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경 귀족의 반대로 천도가 어려워지자 반란을 일으켰다. 1170 무신 정변 문신들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던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1198 □□의 신분 해방 운동 무신 집권기에 개경의 노비들을 모아 봉기를 모의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1231 몽골의 침입 몽골은 사신 저고여가 피살된 것을 구실로 이후 30여 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하였다. 묘청 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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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로 정리하기 1270 □□□의 항쟁 무신 정권의 군사적 기반으로 활약한 이들은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거부하며 여 · 몽 연합군에 저항하였다. 1356 □□□, 쌍성총관부 탈환 반원 자주 정책을 추진하여 고려의 관제를 복구하고, 몽골식 풍습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회복하였다. 삼별초 공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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