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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이해 제3강. 동아시아의 역사 2: 동남아 신라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이 동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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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아시아의 이해 제3강. 동아시아의 역사 2: 동남아 신라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이 동 윤

2 1. 동남아 역사의 기원 ○ 우리가 지니고 있는 편견과 달리 동남아 지역에서 인류의 기원은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
 - 대륙부 지역의 경우 태국 반탄 쁘라쌋(Ban Than Prasat)에서 이미 북경 원인과 유사한 구석기 시대의 유골 및 유물 발견  - 도서부 지역의 경우 인도네시아 자바(지역)에서 인류 발달의 한 단계인 자바 원인의 유골과 유물 발견 ○ 동남아 지역에서 군소 규모의 부족국가로부터 왕국 형태의 국가를 수립하기 시작한 것은 7~9세기 이후부터이다.  - 물론 그 이전 시기에도 부족국가 형태의 왕국들이 존재하였으나, 이들 왕국들은 국가의 기본적인 기틀을 갖추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 단, 이들 부족국가들은 부족 단위의 군소 촌락을 형성하면서 정치․경제 체제와 사회구조를 형성하여 왕국으로의 발전을 위한 기반과 토대 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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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동남아 왕국의 발전단계 ① 태동기(7~9세기 무렵): 이전 시기까지 크고 작은 부족국가 혹은 군주국가의 형태를 띤 군소왕국들이 존재, 인도로부터 불교 및 힌두교 등 각종 종교의 유입과 더불어 국가 통치에 필요한 정치제도가 유입되어 국왕을 중심으로 한 왕국 건설, 이 시기의 과정을 역사학자들은 인도화(Indiaization)로 지칭  - 종교·정치가 일치된 힌두교 브라만 사제제도 전파: 국가 통치기술 및 종교 유입  - 베트남은 중국과의 조공관계를 통한 식민지배를 받으며 인도화로부터 예외     c.f.] 1280년부터 1368년 사이 몽골, 즉 중국의 원(元)은 베트남을 직접 통치  - 동남아 왕국들은 인도의 종교․문화적 영향을 받았지만, 이를 그대로 수용하기 보다는 자체적으로 다시 소화하여 동남아 고유의 문화로 발전     예] 종교․왕궁 용어로 산스크리트어 사용: 이것을 다시 고유 문자체계에 의한 발음으로 표기 ※ 기후적 조건에 따라 인도는 밭농사 위주였으나, 동남아 지역은 논농사 위주로 경작기술 발전: 서로 구분되는 농업기술 사용에 따른 문화적 차이점 존재

5 ② 번성기(10~15세기 전후): 동남아 왕국들은 대륙부의 경우 캄보디아 앙코르
(Angkor) 왕국을 중심으로, 도서부의 경우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 수마 뜨라 지역의 스리위자야(Srivijaya) 왕국을 중심으로 번성기 형성  - 지리적 특성에 따라 대륙부의 경우 농업에 기반을 둔 농경문화 발전, 도서부의 경우 상업에 기반을 둔 해상무역 발전  - 이 시기부터 동남아 왕국들은 각각 고유한 문화적 전통과 정치․경제체제를 형성하며, 이것은 현재까지도 영향 ③ 쇠퇴기(16세기~18세기): 동남아 지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양대 세력이었던 앙코르 왕국과 스리위자야 왕국이 붕괴되자, 제국은 다시 군소왕국들로 분열 하여 세력경쟁을 치르던 중 서구 열강들의 침입으로 점차 쇠락  - 동남아 지역에서 13~14세기는 역사적 사료나 구전되는 내용이 불분명하여 정확한 파악이 어려운 사라진 역사(lost history)  - 대륙부의 경우 앙코르 왕국이 망하자, 버마, 태국, 베트남 등지에서 왕국이 형성되어 영토 확장을 위해 경쟁하는 춘추전국 시대 형성  - 도서부의 경우 스리위자야가 붕괴되자,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지의 왕국 들이 등장하여 각기 경쟁하다가 말라까(Malaca) 왕국으로 연계

6 2. 대륙부 동남아의 역사

7 1) 앙코르(Angkor) 왕국: 9~15세기 ○ 후난(Funan: 扶南)과 첸라(Chenla) 왕국  - 1세기 경 까운디냐(Kaundinya)에 의해 후난 왕국 수립(캄보디아 역사의 시작)  - 인도의 힌두교 문화가 대량 유입되면서 왕국으로 발전  - 6세기 경 왕위계승 문제로 종속국이던 첸라 왕국에 복속  - 첸라 왕국은 한 때 강력한 국력을 통해 인도네시아까지 진출하여 자바의 군소 왕국들을 지배, 이후 물의 첸라와 땅의 첸라로 분열  - 706년 자야바르만 2세가 등장하여 왕국을 통일하고 씨엠립(Siem Reap) 지역에 앙코르 왕국을 건설 ○ 앙코르 왕국 초기에는 캄보디아 룰루오스(Luluos) 지역에서 출발하여 씨엠립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국가 기틀을 정비  - 수도의 중심을 이전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홍수로 인한 피해 때문인 것으로 추측 (현재의 씨엠립 지역)  - 앙코르 왕국은 점차 영토를 확장하여 현재 캄보디아, 태국, 베트남 남부지역, 라오스까지를 지배하는 강력한 제국 형성

8 - 미얀마를 제외한 대륙부 지역 대부분이 앙코르 왕국의 지배권 내에 존재 - 군사적 팽창과 더불어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 앙코르 왕국은 수르야바르만 2세(1113~ 1150년)와 자야바르만 7세(1181~1219년) 가 직위했던 12세기 무렵 최고 전성기 추구  - 미얀마를 제외한 대륙부 지역 대부분이 앙코르 왕국의 지배권 내에 존재  - 군사적 팽창과 더불어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거대한 사원들을 건축함으로써 오늘날의 앙코르 유적 형성  - 앙코르 왕국은 인간적 재능과 신앙, 지리적 위치의 탁월한 결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동남아 대륙부 지역의 거대 제국으로 발전  - 특히 이들은 동남아 대륙부의 건기에 발생하는 물(water) 부족 문제를 인공호수 축조 및 관개 기술 개발을 통해 해결하여 식량을 조달하고 군사적 팽창 유도     예] 동남아 건기의 물 관리: 인공호수, 물 항아리 등 농업 기반을 구축한 앙코르 왕국은 인구 100만 명의 식량 조달이 가능, 이것은 군사력으로 연결

9 ○ 앙코르 왕국은 15세기 무렵부터 다양한 이유를 통해 점차 쇠퇴
 - 지나친 공역과 천재지변, 전염병 등에 의한 국력 소멸  - 앙코르 왕국의 서부지역인 타이 민족이 융성하게 됨에 따라 상호간의 격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앙코르 왕국은 이후 등장하는 태국 왕국들의 건축양식과 문자체계, 행정개념, 그리고 무용․미술과 같은 문화적 요소에 많은 영향 2) 쑤코타이(Sukhothai) 왕국(1257년~1350년)  - 태국 북부 치앙마이 지역에 랏나이(Ratnai) 왕국 등이 존재하여 완전한 통일 왕국은 아니었으나, 우리의 삼국시대와 유사한 경쟁  - 국가 행정부서를 편재하고,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행정체계 정비  - 태국의 지방행정 단위를 정리하여 짱왓, 암퍼, 땀 본 등 오늘날 지방 편재의 기원 형성  - 1238년 제3대 국왕인 람캄행(Rham Kham Haeng) 대왕은 태국어를 창제(정리?):     크메르어 + 버마어 = 컴(Khom)어 사용: 타이어 합작 정리

10 3) 아유타야(Ayuttaya) 왕국(1350년~1767년)
 - 태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왕국, 태국의 근대 정치문화의 기원 수립  - 버마의 왕국들과 경쟁하며 크고 작은 갈등과 대립관계 형성  - 제8대 뜨라이록까낫(Trairokanat) 대왕은 남부 말라까 유역까지 영토 확장  - 싹디나(Sakdina) 신분제도 도입, 왕위계승을 위한 부왕제(副王制) 도입  - 제27대 나라이 왕 시기부터 버마 왕국과 충돌: 불교의 백상(白象) 사상과 전륜성왕(轉輪聖王) 개념에 따라 잦은 마찰 발생  - 이후 버마의 침공으로 아유타야 왕국이 멸망하자, 현재의 방콕 근교에 딱씬 (Taksin)을 중심으로 한 톤부리(Thon Buri) 왕조(1767~1782년) 수립, 다시 현재의 짝끄리(Chakri) 왕조로 연계    。라마 4세 몽꿋(Monkut) 왕: 대외 개방정책과 동맹외교를 통해 식민지배 저지       예] 영화 왕과 나 혹은 King and Ann    。라마 5세 쭐라롱껀(Chulalongkorn) 대왕: 태국의 근대화의 아버지    。현재의 국왕은 라마 9세 푸미폰(Bhumiphon) 국왕 ※ 전륜성왕은 거대한 세계제국의 바퀴, 즉 세계의 중심 축을 의미하는 힌두교적 개념과 그것을 돌리는 사람, 즉 거대한 세계제국의 경계를 확장시키는 세계 정복자 개념을 합성한 용어로서 전륜성왕은 불교적 왕권 개념의 하나로서 국왕은 이러한 정복자 개념을 지님으로써 영토 확장 등 대외적인 정복사업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11 까지 왕국을 형성, 1287년 몽골(원 나라) 침입으로 쇠퇴 - 버강 왕국은 1094년~1287년 사이 대륙부 서남부의 지배
4) 버강(Bagan) 왕국(1056년~1287년)  - 1056년 버마 역사상 최초의 통일왕국 수립, 11~13세기 까지 왕국을 형성, 1287년 몽골(원 나라) 침입으로 쇠퇴  - 버강 왕국은 1094년~1287년 사이 대륙부 서남부의 지배 세력으로 위상을 자랑  - 몬족(Mons)의 영향을 받아 불교 숭상: 쉐다곤, 아난다 파고다 등 수많은 불교유적 건립(예] 400만 파고다의 도시)  - 또웅구(Tounggoo) 왕국(1531년~1752년): 이후 버마 지역에서는 버강 왕국을 대신하여 또웅구 왕국 수립, 바인나웅(Bayinnaung) 왕은 태국 아유타야를 공격하여 버마와 태국 사이의 악연 형성  - 꼰바웅(Konbaung) 왕국(1758년~1886년): 또웅구 왕국의 소멸 이후 수도 랭군을 중심으로 발전, 1767년 신부신 왕은 아유타야를 원정하여 승리     예] 아유타야의 돌부처 상에 머리가 없는 이유, 나무 뿌리에 박힌 돌부처 두상 등  - 꼰바웅 왕국은 이후 인도 지역으로부터 동진(東進)하는 영국과 맞서 3차례에 걸친 전쟁을 치르고 식민지로 전락

12 - 9세기 경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남부 지역(현재의 베트남 남부)에는 참족이
6) 베트남 지역의 왕국  - 9세기 경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남부 지역(현재의 베트남 남부)에는 참족이 설립한 참파(짬빠) 왕국 존재: 오늘날 베트남인과는 다른 말레이계 인종  - 베트남 부족은 939년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앙코르 왕국의 쇠퇴와 더불어 영토 확장  - 이 시기부터 이미 베트남은 중국과 접한 지정학적 특수성과 영향력으로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별개의 정치문화 형성     예] 정치체제에서 중국을 모범으로 삼은 유교적 가치체계와 관료제 운영     예] 군신관계의 예우와 과거제도를 통한 인재 등용: 이 시기 다른 동남아 국가들은 준세습적 지위체계  - 베트남 왕국은 15세기 이후 앙코르 왕국의 몰락과 함께 참파 왕국을 복속하고 세력을 확장하여 1802년 리(Ly) 왕조 시기의 지아롱이 다이위엣(大越: Dai Viet) 왕국을 수립하여 오늘날 베트남으로 연계

13 3. 동남아 도서부(해양부)의 역사

14 1) 스리위자야(Srivijaya) 왕국(3세기~15세기)
 - 스리위자야 왕국은 최초 수마뜨라 지역에 수립된 고대 말레이 왕국으로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역사적 기원 형성  - 싼스크리트어(Sanskrit)로 스리(sri)는 빛나는(shining or radiant), 위자야(vijaya)는 승리(victory) 혹은 우수함, 탁월함(excellence) 의미  - 스리위자야 왕국은 6~7세기 경 세력을 강화하여 주변의 군소왕국들을 통합하여 제국을 건설하고, 인도네시아 서북부 지역인 수마트라 섬으로부터 자바 내륙 지역을 연결하는 거대국가 건설  - 스리위자야 왕국은 지리적 특수성에 기인하여 인도와 중국을 잇는 동서 해양 교역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상업적으로 성공  - 스리위자야 왕국은 중국의 후원을 받으면서 조공관계(베트남과는 다른 무역 개념)를 형성하고, 인도, 페르시아 등지에서 약재 및 향신료 등을 가져오고 중국의 비단, 도자기 등을 교역하여 상업적 이익 확충  - 스리위자야 왕국은 13~14세기부터 중국과 남인도 지역의 촐라(Cholas) 왕국 이 직접 해상교역에 나서 스리위자야의 영향력을 위협하고, 자바 내륙 지방의 반란으로 분열  - 그 밖에 자바 중부 지역에는 카일렌드라(Cailendra) 왕국이 780년~850년 사이 보로부두르 사원을 건설하여 거대 불교국가를 수립한 바 있다.

15 2) 말라카(Malacca or Melaka) 왕국(1402년~1526년)
 - 말라카 지역은 1396년 스리위자야 왕국의 한 왕자였던 빠라메스와라 왕자에 의해 발견된 이래 1402년에 말라카 왕국 건설  - 말라카 왕국은 스리위자야 왕국을 뒤이어 중국과 조공관계를 형성하고, 해상 무역으로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여 15~16세기 사이 경제적 번영기 유지  - 무자파르샤(Muzaffar Shah) 왕에 이르러 말라카 왕국은 이슬람을 국교화 하였으며, 서아시아의 이슬람 상인들을 끌어들여 해상무역의 범위를 확장  - 이 시기 말라카 왕국은 무역을 위한 상업용어로서 인니-말레이어 정리  - 이후 포르투갈의 지속적인 침공으로 국력이 약화되어 조호르(Johor) 왕국 으로 계승

16 4. 서구 열강의 동남아 진출과 식민지화(16세기~19세기)
○ 서구 열강의 동남아 침공은 16세기부터 기원, 18세기 중엽부터 본격화  - 중국, 일본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서 지정학적 가치  - 향신료, 농산물 경작과 천연자원 등으로 상업적 이익 1) 대륙부 동남아 국가 ① 버마(Burma): 영국에 의한 식민지배  - 버마와 인도의 접경지역에서 영국과 버마 사이의 충돌: (상호 다른 입장에서 문제 접근) - 영국은 제1차 버마전쟁(1824∼26), 제2차 버마전쟁 (1852), 제3차 버마전쟁(1885∼86)을 통해 결국 버마의 전 지역을 그들의 식민지령으로 합병

17 ② 베트남: 프랑스에 의한 식민지배  - 인도로부터 영국의 동진(버마의 식민지화)이 이루어지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프랑스는 서쪽의 동남아 대륙부를 공략(중국을 위한 교두보 마련이 목적)  - 프랑스의 초기 베트남 접근과정에서 베트남 정부는 프랑스의 의도를 단순한 교역 차원으로 이해하여 프랑스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나 조처 부재  - 1859년부터 1962년 사이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지방에 대한 할양을 요구하여 점령하고 이를 코친차이나(Kochin China)라 명명  - 1873년부터 1885년 사이 프랑스는 그들의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여 결국 베트남을 완전 점령하고 강력한 식민지배 실시 ※ 영국이 버마를 식민지로 복속시키는데 60년이 걸린 반면, 프랑스가 베트남을 점령하여 식민지화한 기간은 25년 소요 ③ 캄보디아: 프랑스에 의한 식민지배  - 당시 군소국가로서 19세기 중반 캄보디아 영토의 서남부 지역은 태국에 귀속  - 캄보디아 왕국은 태국과 베트남에게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전락  - 1860년대 베트남을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는 태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캄보디아 왕실의 자율권을 보장해 준다는 명목으로 캄보디아를 식민지화

18 ④ 라오스: 프랑스에 의한 식민지배  - 19세기까지 라오스는 근대적 기틀을 갖추지 못한 채 군소왕국으로 존재  - 1885년부터 1899년 사이 프랑스는 라오스를 침공하여 무력으로 제압하고, 라오스에 대한 베트남의 종주권이 프랑스로 이양되었음을 주장하며 태국의 반발을 무마 ⑤ 태국: 독립국가 유지  - 태국은 동남아 지역에서 유일하게 식민지배를 받지 않은 국가이며, 이것은 태국이 버마를 지배한 영국과 인도차이나 지역을 석권한 프랑스 사이에서 외교적으로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완충지대(bumper zone) 형성  -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의 독립국가 유지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많은 영토적 양보를 제공한 대가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공존  - 태국이 그들의 독립을 유지하였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의 뛰어난 정치지도력 때문(예] 몽꿋 왕, 쭐라롱껀 대왕)

19 2) 도서부(해양부) 동남아 국가 ① 인도네시아: 네덜란드에 의한 식민지배  - 최초 무역의 형태로 인도네시아와 교류를 시작한 네덜란드는 유럽 지역에서 향신료 무역을 통해 이윤이 많이 남자, 인도네시아에 대한 직접 지배를 계획  - 네덜란드는 18세기 자바 지역의 왕위계승 전쟁에 개입하여 결국 자바 지역을 수라카르타와 족자카르타의 두 개 왕국으로 분리시키고, 이후 국력이 약화된 왕국들을 점령  - 유럽의 다른 식민지배 국가들과 달리 네덜란드는 매우 강력한 식민지배 추진  - 네덜란드는 19세기 수마뜨라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한 이후 20세기 초반 네덜 란드령 동인도의 기본 골격을 완성(단, 동티모르 지역만 포르투갈 지배) ②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 영국에 의한 식민지배  - 식민지배 이전 말레이 반도는 인도네시아-말레이 사회의 일부에 속하는 동일한 혈통을 지니고 술탄(sultan) 다양한 군소왕국을 형성  - 1786년 영국은 뻬낭(Penang)을 점령하고,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1819년 싱가포르 지역을 점령, 1830년대에는 말라카 유역까지 그들의 영향력 확대

20  - 영국은 이 지역을 해협식민지로 지칭하였으며, 이후 보르네오 북부와 말레이
반도를 연결하여 하나의 국가 영토 개념 확립 ※ 특히 보르네오 사라왁(Sarawak) 지역은 백인 라자로 불리던 제임스 브루크에 의해 개인적인 식민지화가 이루어짐.  - 한편 브루나이 술탄국은 18세기부터 유럽의 정치․군사적 개입으로 점차 국력이 약화되었으며, 1888년 영국의 보호국으로 복속(이슬람의 상징적 존재) ③ 필리핀: 스페인으로부터 미국에 의한 식민지배  - 1571년 스페인은 마닐라 지역에 필리핀 식민본부 창설하여 18세기 중엽까지 필리핀의 북부 저지대를 지배  - 1889년 미국과 스페인 사이의 전쟁(미․서 전쟁)에 대한 귀결: 필리핀의 지배권을 미국에게 양도 3) 유럽 식민지배의 영향 ① 경제적 변형: 식민지 종속경제와 자본주의 경제체제 왜곡, 부의 불평등 문제 등  - 16세기부터 18세기 초반까지 스페인과 포르투갈, 네덜란드는 동남아 지역의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면서 거대한 경제적 이익 추구

21  - 19세기에 이르러 동남아에 대한 식민지 수탈이 강화되어 농지개발을 통한
플랜테이션 농업 전개(쌀, 커피, 담재, 고무, 야자 등을 통한 수익 증대)  - 이와 더불어 주석 등 천연자원에 대한 개발이 심화되면서 국토의 황폐화 초래  - 토지에 대한 강제정리는 일반 농민들을 소작인으로 전락시켰으며,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도시로 몰리면서 슬럼화 진행  -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일부 국가들의 경우 화교의 대량 유입으로 유럽인 들과 현지인들 사이에서 유럽인들의 침탈행위를 대신하는 중간계급 형성  - 결국 동남아의 경제체제는 식민지배를 통해 자본주의체제가 유입되었으나, 이것은 주로 유럽 경제에 종속된 왜곡된 자본주의체제에 불과  - 식민지배 당국의 편의에 의해 추진된 무계획적 개발은 지역적 불균등 초래 ② 종교적 영향: 기독교 개종 및 종교 갈등  - 식민지배에 의한 종교적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국가는 필리핀, 동티모르이며, 이들에 의한 가톨릭교의 전수는 이후 토착적으로 내려오는 타 종교와 갈등 초래  - 식민지배가 장기화된 필리핀의 경우 동남아 토착문화와 더불어 서구문화의 유입 이 심화되어 민족적 정체성 약화

22 ③ 사회구조적 영향: 도시화와 인구 증가  -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는 주로 각 국가들의 현재 수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것은 급격한 도시화 초래: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경제적 격차 심화  - 또한 농경지 개발로 자신들의 농토를 강제적으로 상실한 농촌 인구가 도시로 유입됨으로써 범죄와 환경오염 등 여러 가지 폐단 발생 ④ 아시아계의 이민  - 동남아 지역에 대한 아시아계 인구 유입은 주로 인도와 중국으로부터 유입: 19세기 강제 유입은 다양한 문제점 표출  - 식민지배가 심화되면서 농경지 경작 및 관리, 교역을 위한 중국계 상인들과 싱가포르와 같은 항구 지역에는 쿨리라고 불리는 중국계 부두 노동자들이 유입되어 상권 형성  - 이들 화교들은 현지에 토착화되어 유럽 식민지배자에 기생하며 동남아인들을 착취하는데 앞장서면서 화교자본 축적  - 이러한 역사적 정황은 독립 이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화교들에 대한 인종갈등 유발

23 5. 동남아의 민족주의와 독립운동 ⑤ 정치적 영향: 헌정 및 정치체제의 답습
 - 동남아의 각 국가들은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한 이후 주로 그들을 지배했던 유럽 국가들의 정치체제를 그대로 답습  - 필리핀: 미국의 양원제 의회와 대통령제, 말레이시아: 양원제 의회와 의원내각제, 인도네시아: 네덜란드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의원선거 방식 등 5. 동남아의 민족주의와 독립운동 ○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식민지배의 약화와 민족주의의 강화를 초래  -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구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들을 통해 다양한 정치적 사조에 입각한 민족주의 운동 확산  - 특히 제1차 세계대전에 기인하여 식민지배의 통제가 느슨해지자, 보다 조직 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운동 시작 ○ 민족주의가 가미된 독립운동은 개별 국가들의 정치․사회적 특성 및 종교와 연결됨으로써 보다 강력한 역량 발휘

24 6. 일본의 침략과 동남아의 대응 - 이들 국가들의 독립운동은 지식인, 엘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보다 폭넓게 확산
 - 이들 국가들의 독립운동은 지식인, 엘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보다 폭넓게 확산 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이념과 방법론 도입     예] 독립운동에 있어서 사회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이론과 방법론 유입  - 이 시기 근대 독립운동을 이끈 민족지도자는 독립 이후 독립영웅으로 대두    예] 필리핀의 리잘, 인도네시아 수까르노, 베트남의 호치민 등 필리핀: 리잘 인도네시아: 수까르노 버마: 아웅산 베트남: 호치민 6. 일본의 침략과 동남아의 대응 ○ 1941부터 1945년 사이는 동남아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시기로서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로 동남아 지역의 새로운 전환점 형성 ① 20세기 초반부터 민족주의에 기반을 둔 영토 개념 형성 ② 서구의 식민지배에 대한 새로운 위협으로서 일본이 주창하는 대동아공영권은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 지배라는 새로운 개념 형성

25 ○ 각 국가별 일본의 침탈과정  -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가 식민지 정부의 통제권을 보유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대신 이들 지역을 일본의 병참기지 및 수송, 훈련기지로 활용  - 1942년 일본은 말라야 및 싱가포르 점령하고 영국인 축출: 싱가포르 등지에서 중국인들에 대한 학살 자행(정치적 활용)  - 1942년 2월 일본은 자바 전투에서 네덜란드를 제압하고, 3월 들어 인도네시아 전역을 점령: 전략적 차원에서 인도네시아 자치기구를 인정하고 군대 양성을 지원하는 등 우회적 침투 시도  - 일본은 태국과 공수동맹을 체결함으로써 영국이 지배하는 버마로 연결되는 교두보를 확보(예] 태국 깐짜나부리 지역의 콰이강의 다리)  - 필리핀의 경우 미군과 일본군의 치열한 전투를 통해 일본군 승리함으로써 미군 이 태평양 지역으로 패퇴하는 결과 초래(예] 맥아더 장군의 필리핀 연설) ○ 일본의 동남아 식민지배는 조선반도에 대한 식민지배와 구분되는 상대적 의미  - 일본에 의해 직접적으로 식민지배를 받은 우리와 달리 동남아에 대한 일본의 등장은 서구 식민주의자를 물리친 아시아인의 이미지 강조 - 동남아의 민족지도자 일부는 일본의 전쟁 수행에 협력하였으나, 이것은 어디 까지나 자민족 발전과 독립을 위한 일시적인 행위(한국의 친일파 개념과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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