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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byMaría Ángeles Alvarado Venegas Modified 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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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역사 개관 ▒ 선사시대 이베리아 반도에 인간이 최초로 정착한 시기는 2만 년 전으로 추정되나, 이들은 빙하시대 때 사라졌다. 약 1만 4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알타미라 동굴에서 구석기 시대의 인류최고 회화가 발견됨에 따라 이 시기부터 선사시대의 문명이 열렸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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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ine of the cave is irregular and measures some 270 m long
The line of the cave is irregular and measures some 270 m long. It has a lobby, a gallery and the side room. The caves contain one of the best examples of prehistoric cave paintings. The paintings are some 14,000 years old and represent bison, deer, boars, horses, and so on. They are done in natural red ochre paints, outlined in black. In order to ensure their conservation, its structure and paintings have been painstakingly reproduced in the Neocave at the Altamira Museum, using the same pictorial procedures. Thus, the visitor can admire the great ceiling with the polychromatic bison and visit the workshop of these painters, where the techniques used in this masterpiece of cave painting are explai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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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문화는 BC 2000경에 시작되었으며, 이때 야금기술이 발달했다.
▒ 역사시대 BC 1000년에 들어서면서 타르테소스족이 융성하면서 스페인은 역사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에 관한 언급은 그리스·로마 문헌과 성서에 나와 있다. 그들은 고유문자 체계와 뛰어난 청동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BC 900년경부터 페레네 이북의 켈트족이 스페인에 몰려들어왔다. 이들이 가지고 온 철기문화인 할슈타트 문화는 스페인 전역에 확대되었고, 기존의 이베리아인(혹은 이베로족)과 혼혈하여 갈색 피부와 흑색 머리칼이 특징인 켈트이베리아족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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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사회 이베리아의 원주민은 유럽에서 내려온 켈트족, 북아프리카에서 온 이베로족 등이 내륙에 살고 있었다. 반도 남부로의 안달루시아 지역 쪽에 가장 많은 인구가 밀집해있었는데 이들은 파르테시오족으로써 다른 지역보다 먼저 지중해 연안의 타민족들과의 접촉이 잦아 통상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베리아 반도에 타민족으로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기원전 1200년경의 페니키아인들이다. 타민족에 비해 당시 항해술이 발달했던 그들은 북부 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 남부지방의 교역을 장악했다. 뒤이어 들어온 그리스인들이 반도의 동북부에서 식민 활동을 하다가 페니키아에서 주도권을 빼앗은 카르타고와 충돌했다. 타민족들의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식민 활동은 아직 원시적인 생활에 있었던 반도 주민들에게 경제, 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데 특히 광산개발, 화폐사용, 농경기술등을 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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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ady of Baza, made by Iberi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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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의 이베리아 정복시대 BC 1세기부터 지배자로 등장, 3 세기후반에 기반을 다짐, 3명의 로마황제, 여러 학자들을 배출
3 세기후반에 기반을 다짐, 3명의 로마황제, 여러 학자들을 배출 : Seneca, Martial, Lu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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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어 : castellano(카스티야어=스페인어 español),
3차에 걸친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 승리한 로마는 이베리아 반도를 약 5세기 동안 통치했다. 이 기간동안에 문자, 철학, 종교등 로마의 영향력을 이베리아 전지역에 확산, 기존의 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이른 바, 이베리아 반도의 로마화이다. (1) 언어 : castellano(카스티야어=스페인어 español), catalán(카타루니아어), gallego(갈리시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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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uerducto de Segovia]
(2) 건축물 : Segovia [수로교], Mérida [원형극장], [고고유적] etc. [Acuerducto de Segovia] [Teatro de Mér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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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inas romanas de Mérida]
[Ruinas romanas de Mérida] (3) 종교: 카톨릭교 국토회복 운동의 정신적인 지주의 역할을 함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및 식민지 개척의 명분을 제공하여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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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르만 민족의 이베리아 정복시대(서고트 왕국시대) …AD 5 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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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제국의 멸망,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함께 서고트족이 남서쪽으로 내려와 이베리아 반도를 침략하면서 서서히 그 지배지역을 확대해나가는데 이들은 300년간 통치했다.
아리우스교를 신봉했던 고트족과 카톨릭의 반도주민 및 로마인들과의 종교적 불화는 후에 톨레도의 제 3차 종교회의(589년)에서 레카르도 왕이 스스로 카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종교적 통일을 이룩했다. 7C경 성직자들의 부패, 패권싸움, 경제적 불안, 페스트 만연 등으로 사회불안이 가중되고 결국, 지중해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온 이슬람족에 의해 밀려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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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 정복 시대 와 국토 회복 운동 (Reconquista 레꼰끼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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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C경 지중해를 중심으로 거대한 사라센 제국을 이룩한 이슬람족의 이베리아 반도지배는 711년부터 크리스챤들에 의한 국토 회복운동(레꽁끼스타)이 끝나는 1492년까지 약 8C간 계속되었다. 유대인, 크리스챤, 이슬람의 세 민족과 종교가 함께 어우러져 살았던 이 기간에는 수학, 천문학, 역학, 번역학 등의 발전을 가져왔다. 특히 이슬람이 남긴 건축술과 장식의 아름다움은 코르도바의 메스키타(회교사원),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등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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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 아스투리아지방 꼬바동가에서의 전투에서는 최초로 기독교들이 승리를 하면서(722년) 무어족들을 남쪽으로 격퇴시켰고, 이는 곧 기독교들의 국토회복운동으로 이어졌다.
11C의 알퐁소 6세의 톨레도 탈환, 엘시드장군의 발렌시아 탈환, 13C 성 훼르난도 왕에 의한 코르도바 회복을 계속하며, 결국 1492년 카톨릭 왕조(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과 아라곤의 훼르난도 왕)에 의해 그라나다의 마지막 이슬람 제국인 나자리 왕국을 항복시키고 약 700년을 걸친 국토 회복 운동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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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대륙 발견 1492년 레꼰키스타를 끝내면서 동시에 획기적인 세계 지리상의 변화를 가져오는데, 콜롬부스의 아메리카 신대륙의 발견이다. 스페인의 카톨릭 왕조의 후원을 받고 떠난 콜롬부스 (Christopher Colombus; Cristobal de Colón)는 인도를 향해 했고, 도착한 곳은 바로 지금의 서인도 제도라고 하는 지역이다. 이것을 계기로 스페인은 아메리카에서의 거대한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고 해양산업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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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막 상식] <아메리카> 명칭의 기원
[토막 상식] <아메리카> 명칭의 기원 아메리카 대륙은 원래는 아시아에서 건너가 전 대륙에 분포한 아메리카인디언과 소수의 에스키모만이 거주하는 지역이었으나 11세기경 북(北)유럽의 바이킹이 그린란드에서 북아메리카 북동안(北東岸) 지방에 도달하여 유럽인(人)에게 존재가 알려졌다. 바이킹의 식민지는 수세기 후에 소멸되고 유럽인에 의한 본격적인 탐험은 C.콜럼버스의 제1차 항해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492년 10월 12일에 바하마제도의 산살바도르섬에 상륙하였으나 그곳의 원주민을 보고 인도에 도달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98년 이후 제3차 항해에서 서인도제도(諸島)의 쿠바 ·자메이카 ·아이티를 비롯하여 남아메리카 북안의 오리노코강(江) 하구 부근과 중앙아메리카 대륙 동안(東岸) 일대를 탐험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곳이 신대륙이라는 것을 모르고 죽었다. 콜럼버스 이후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전반에 걸쳐 많은 유럽인이 신대륙을 탐험하였으나 중앙 ·남아메리카는 에스파냐인 ·포르투갈인에 의하여, 북아메리카는 영국인 ·프랑스인에 의하여 탐험이 추진되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99년 A.오헤다가 이탈리아인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1451∼1512 Amerigo Vespucci)를 동반하여 베네수엘라를 탐험하였다. 베스푸치가 쓴 《신세계》(1507 간행)가 유럽에서 널리 읽혀짐으로써 아메리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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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의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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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의 시대(16C~17C): 황금세기 Gold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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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라 여왕->카를로스 5세(카를로스 1세, 스페인) ->펠리페 2세에 이르는 1세기 간에 걸치는 스페인은 "해가 지지 않는 대스페인제국"이라고 할 만큼 거대한 식민지를 갖게되는 데 중남미를 비롯, 아시아에서의 괌, 사이판, 필리핀 그리고 이웃의 포르투갈까지 장악하면서 명실상부한 유럽 최강국이된다. 그러나 펠리페 2세때 최절정에 달했던 스페인국력은 펠리페 3세때부터 내정에 등한하고 취향주의로 흘렀다. 무기력한 펠리페 4세를 지나면서 경제 불황이 겹치고, 해양권을 상실, 국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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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화 예술적인 면에서는 황금시대를 이루는 시기이기도 하여 갈멜수도원의 창시자인 산타 떼레사, 십자의 성요한 등은 신비주의 문학을 꽃피웠고 불후의 명작 '동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가 있었다. 건축과 조각에서도 르네상스의 절정기를 이루면서 스페인 특유의 '에레라 양식'등이 선을 보였다. 회화에의 엘그레꼬는 톨레도와 인연을 맺으면서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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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Escorial(엘에스꼬리알) 수도원
1984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 16세기에 성 로렌스의 순교를 기념하여 건립된 수도원으로, 이 수도원의 엄격한 건축 스타일은 스페인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왕의 안뜰’이라는 이름은 유대 왕국의 역대 군주상이 성당 정면에서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이 군주상은 대리석과 도금한 구리로 만들었다. 이 수도원은 거대한 화강암 건축물이다. 후안 데 에레라는 이 장대한 회색 건축물을 독자적인 양식으로 완성하였다. 에레라 양식은 에스파냐의 독창적인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부속 도서관은 당시 유럽에서 최고의 도서관이었다. 도서관 천장과 그 조금 아래쪽 벽에 그려진 마니에리스모 양식의 그림은 이탈리아 화가 티발디의 작품이다. 종합 예술을 추구한 펠리페 2세의 정신을 구현한다는 점에서, 이 도서관을 능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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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을 지은 3가지 목적 펠리페 2세가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 옛 왕궁(이하 엘에스코리알 수도원)을 짓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목적이 있었다.
첫째, 부왕인 카를로스 1세(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었다. 카를로스 1세는 생전에 부부가 함께 묻힐 무덤을 만들 장소를 끊임없이 물색했다. 둘째는 생캉탱에서 프랑스군에게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고, 셋째는 순교자 성라우렌티우스(에스파냐명 로렌소)를 기념하는 일이었다. 생캉탱 전투는 성라루렌티우스 축일에 있었다. 1563년에 펠리페 2세는 건축가 후안 바우티스타 데 톨레도에게 에스파냐 제국의 권력과 위대함을 상징하는 불후의 기념 건축물을 지으라고 명했다. 펠리페 2세는 ‘기품이 있고 숫하면서 엄숙하며 까다롭지 않은 건물’을 주문했다. 장소는 과다라마 산맥 남쪽 고지를 택했다. 펠리페 2세는 건설 과정을 몸소 지시하고 감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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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7년에 톨레도가 죽자 후안 데 에레라가 1584년에 완성될 때까지 공사를 맡았다
1567년에 톨레도가 죽자 후안 데 에레라가 1584년에 완성될 때까지 공사를 맡았다. 톨레도가 죽은 뒤 그의 설계는 변경되었지만 기본 구조는 처음 그대로였다. 신앙심 깊은 펠리페 2세는 건물이 완성되자 즉시 궁정과 제국의 행정 기능을 그 곳으로 옮겼다. 지금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의 무덤에는 많은 에스파냐 왕의 유해가 있는데, 에스파냐 건축 가운데 인상 깊은 이 건물만큼 합스부르크 시대를 확실하게 상징하는 건물도 없다.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은 정치의 중추 기관인 동시에 궁전, 신학교, 도서관, 귀족 자제의 학교, 병원 시설을 갖춘 어지간한 도시와 같은 규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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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레코 / El Greco(Domenikos Theotokopulos) (1541-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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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베드라(에스파냐어: 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년 9월 29일 년 4월 23일)은 에스파냐의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첫 근대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돈 키호테》의 작가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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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2세(1556 ~ 1598 재위)는 즉위와 동시에 관료조직을 완비하고 해이한 국가질서의 수립에 정진하는 한편, 유럽에서 정치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가톨릭 신앙으로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하려고 시도했다. 따라서 종교재판소를 국가의 행정기관으로 개편하고 프로테스탄티즘의 스페인 침투 방지에 주력했다. 1580년 그는 포르투갈을 합병함으로써 이베리아 반도 통일을 성취했다. 그 결과 브라질을 비롯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포르투갈 식민지를 소유해 스페인의 주도권이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 모직물이 네덜란드산·영국산 모직물에 상권을 빼앗기게 되어 국내산업은 침체하기 시작 [-]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와 징세를 강화했으나 이는 오히려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초래했으며, 스페인의 독주에 도전한 영국이 네덜란드를 원조했다. [-] 1588년 펠리페가 영국을 공격하기 위하여 파견한 '무적함대'의 참패는 스페인의 몰락과 영국의 해상권 상승을 알리는 사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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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함대의 패배로 영국은 침략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게 되었으며 네덜란드는 소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무적함대의 패배로 영국은 침략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게 되었으며 네덜란드는 소멸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반면 당대 유럽 최강의 스페인은 그 위신에 일대 타격을 입었다. 전술적인 측면에서 무적함대와의 전투는 항해 중에 대포를 동원해서 싸운 최초의 주요한 해전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이후 약 250년 동안 대포로 무장한 군함이 해양을 지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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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리페3세(1598~1621 재위) 때는 대외적으로는 평화를 유지했으나 국내적으로는 30만 명의 이슬람교도 추방으로 중산층의 재정적 파탄을 가져왔으며, 결국 스페인 경제 전체의 쇠퇴로 이어졌다. @ 펠리페 4세(1621 ~ 1665 재위)를 지나면서 경제 불황이 겹치고, 해양권을 상실, 국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 카를로스2세(1665~1700 재위) 때는 파멸적이었던 물가앙등도 다소 진정되었고, 중상주의 정책의 채택으로 경제도 느리게나마 회복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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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봉 왕가시대 카를로스 2세가 후손없이 사망하며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손자 필리프를 스페인 왕위계승자로 지명했으며, 이 유언에 따라 필리프는 펠리페 5세(1700~46 재위)로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황제 레오폴트의 아들 카를의 계승권을 주장했고 이에 영국과 네덜란드가 오스트리아를 적극 지지함으로써 전유럽 열강 사이에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났다. 프랑스는 왕위계승전쟁에서는 승리했으나 스페인은 이탈리아 영토를 상실하는 동시에 국제적 이해관계에 끼어든 영국에게 1714년 유트리트조약에 의해 스페인 남부의 지브롤터해협을 양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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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왕가 펠리페 2세 펠리페 3세 펠리페 4세 카를로스 2세 카를로스 1세 (= 카를로스 5세, 신성로마)
1516~56 펠리페 2세 1556~98 펠리페 3세 1598~1621 펠리페 4세 1621~65 카를로스 2세 1665~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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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봉 왕가 펠리페 5세 1700~24 루이스 1724 펠리페 5세(복위) 1724~46 페르난도 6세 1746~59 카를로스 3세 1759~88 카를로스 4세 1788~1808 페르난도 7세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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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파르트 왕가 부르봉 왕가 사보이 왕가 호세(조제프 보나파르트) 1808~13 페르난도 7세(복위) 1814~33
이사벨 2세 1833~68 공위기간(空位期間) 1868~70 사보이 왕가 아마데오 1세 1870~73 제1 공화국 187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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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봉 왕가 알폰소 12세 1874~85 알폰소 13세 1886~1931 제2 공화국 1931~39
파시스트 정권(프란시스코 프랑코) 1939~75 후안 카를로스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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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옹군의 침입과 독립전쟁 프랑스 혁명 후 나폴레옹 1세는 가톨릭교 보호라는 명목으로 스페인에 진출했다. 1796년 8월에 산일데폰소 조약으로 동맹을 체결한 스페인과 프랑스는 영국과 싸우기로 했으나 두 나라의 연합함대는 트라팔가르 해전(1805)에서 영국 함대에 패했다. 1807년 프랑스군은 포르투갈 점령 후의 영토를 분배해주겠다는 조건으로 스페인에 진입하여 전략적인 주요지역에 진지를 구축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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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년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의 스페인 침입은 스페인 전지역에서의 저항을 가져왔다
1807년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의 스페인 침입은 스페인 전지역에서의 저항을 가져왔다. 곳곳에서 민중들의 항거운동이 일어나 프랑스 정규군들과 충돌하며 나폴레옹의 작전계획에 차질을 빚어냈고, 특히 왕실 가족들을 속여 납치하고, 유배시키는 등으로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시민의 봉기가 있었는데 (마드리드 5월2일의 항거운동을 그린 고야의 그림이 유명), 프랑스군의 무자비한 진압은 더욱 분노를 자아내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뻗어나갔다. 독립전쟁중 가장 큰 성과를 거둔 바이렌 전투는 스페인 국민에게는 커다란 용기가 되었다. 영국의 웰링턴장군의 승리와 러시아에서의 나폴레옹 군대의 패전은 프랑스군의 결정적인 위기를 맞게하고 결국 1814년 나폴레옹은 엘바섬으로 유배된다. 스페인에서의 '게릴라전 병법'은 스페인에서 기원된 것으로 소수인원으로 이루어져 각 종 전투에서 사용되는 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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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봉 왕가시대 이사벨 2세( )는 35년간의 집권기간 동안 6개의 헌법을 공포하고, 41번이나 내각을 개편했으며, 15번의 군사반란을 겪었다. 1848년의 유럽 혁명 후 스페인에 많은 자유주의 사조가 유입됨. 그 결과 1868년 프림 장군이 주도한 혁명으로 이사벨 2세는 축출. 1870년 11월 이탈리아 왕의 차남 아마데오 1세가 입헌군주로 영입되어 2년간 통치했다. [사보이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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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2월에는 아마데오가 퇴위하고 제1공화국이 선포됨.
각지방의 극단적 분리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11개월 동안 공화국체제는 4명의 대통령을 맞이했으나 혼란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1874년 1월에 세라노 장군이 통치권을 장악하여 북부의 무정부주의적인 분리주의 세력을 진압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874년 12월 29일 사군툼에서 반란을 일으킨 마르티네스 캄포스 장군은 이사벨 2세의 아들 알폰소 12세(1874~85 재위)를 국왕으로 추대해 부르봉 왕조를 부활시켰다. 알폰소 12세는 집권 후 1876년 헌법을 제정하여 세습입헌 군주제에 양원제를 채택했다. 가톨릭을 국교로 정했으나 다른 종교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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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부르봉 왕가시대 1885년 11월 알폰소 12세가 죽은 지 5개월 뒤에 태어난 알폰소 13세 (1886~1931 재위)는 모후 마리아 크리스티나 2세의 섭정하에 스페인 왕이 되었다. 1898년 12월 미국과의 전쟁에서 스페인은 쿠바와 필리핀 등을 상실하여 위기를 맞이했다(→ 미국-스페인 전쟁). 모로코를 중심으로 아프리카에 침투하는 정책을 추진했으나 리프족에게 패해 기득권 확보에 급급해야 했다. 해외 활동이 없어진 과대한 군대는 국민경제에는 부담이 되었고 정치에도 간섭할 위험성이 있었다. 1901년 총리가 된 사가스타의 내각이 안고 있던 가장 큰 문제는 노동자 문제였다. 사회주의의 선동과 아나키스트의 직접 행동하에 노동자들의 여러 조직이 발전하고 있었으며, 1902년에는 사라고사·바르셀로나 에서 노동자들이 봉기했다. 이에 대해 극심한 탄압으로 질서는 회복되었으나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었다. 노동운동은 조르주 소렐의 영향을 받은 노동 조합주의 운동을 강화시켜주었을 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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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스페인 전쟁 이 전쟁은 1895년 2월 쿠바인들이 스페인 통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으킨 독립투쟁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스페인은 쿠바인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야만스런 억압 조치를 취했는데, 이 모습이 몇몇 선동적인 신문을 통해 미국의 일반대중에게 생생하게 전달되면서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쿠바 저항세력에 대한 동정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반(反)스페인 폭동이 발생한 뒤 미국 시민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미국 전함 메인호가 1898년 2월 15일 아바나 항에서 원인 모르게 침몰한 사건(→ 메인호의 침몰)이 발생하자 미국인들은 사태개입을 주장했으며 이러한 주장은 이구동성의 강렬한 요구로 발전했다. 스페인은 4월 9일 휴전을 선포하고 쿠바에 제한적이나마 자치정부 성립 권한을 부여하는 내용의 새로운 개혁을 신속히 취해나갔다. 그러나 미국의회는 곧 쿠바의 독립권을 천명하는 결의안을 발의하고 스페인 병력의 철수를 요구했다. 또한 의회는 스페인 병력의 철수를 감시하기 위해 미국 대통령에게 무력사용권한을 부여했으며 미국이 쿠바를 합병하려는 어떠한 구상도 포기한다고 밝혔다. 스페인은 4월 24일 미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으며 이어 미국도 25일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했는데 미국의 선전포고는 21일자로 소급되었다. 미군이 가공할 위력을 지닌 반면 스페인은 본토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대처할 육해군 병력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은 거의 일방적으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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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의 체결로 스페인은 쿠바에 대한 모든 권리주장을 포기하고 괌·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측에 양도했다. 또 필리핀 통치권을 2,000만 달러에 미국측에 넘겨주었다. 미국-스페인 전쟁은 이들 양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스페인은 이 전쟁의 패배로 국가적 관심을 해외 식민지쟁탈에서 국내 문제로 돌리게 되었다. 그 결과 문화와 문학의 르네상스를 꽃피웠으며 절실히 요구되던 국내경제 발전에 20년 동안 노력을 기울일 수 있었다. 한편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광범위한 해외식민지를 보유한 강대국으로, 또한 국제정치 무대의 새로운 중추로 등장해 이후 유럽 문제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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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23년에는 33번의 정권교체가 있었다. 극도의 정치혼란이 야기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스페인의 여론은 양분되었다. 군인·성직자·관료·지주 등 보수당 우익세력은 독일을 지지하고, 노동자·상공업자·지식인 및 카탈루냐와 바스크 지방 등 자유당 좌익세력은 연합군을 지지했다. 그러나 다토 총리가 절대중립을 선언·고수함으로써 산업 활동이 활발해지고 경제는 번영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탈루냐와 바스크의 분리주의 운동은 극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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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모로코에서 스페인군의 패전은 본국에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져 정부는 붕괴되고, 책임문제를 둘러싸고 의회와 군부 사이에 심한 분쟁을 야기했다.
좌익계 공화파는 1931년 6월 제헌의회선거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스페인을 "모든 노동자의 민주 공화국"으로 규정하는 공화헌법을 제정했다. 이 헌법에서는 남녀평등의 보통선거권, 단원제의회, 대통령 임기 6년, 귀족제 폐지, 교회와 국가의 분리, 지방 자치제에 따른 연방주의 등을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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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전쟁과 프랑코 총통시대 1936년 1월에는 선거를 통해 공화파·공화좌파·사회당·공산당 등으로 이루어진 '인민전선'(frete popular) 정부가 아사냐를 수반으로 해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후 우익인 군부가 이에 대항함으로써 소요는 끊이지 않았다. 1936년부터 1939년에 걸쳐 치른 스페인 내란은 근본적으로 같은 동포들끼리의 이념전쟁이었다.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공화파 정부와 프랑코장군을 중심으로 북아프리카의 멜리아에서 일어난 반란군(국민군)은 독일과 이태리의 지원을 받았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었다고까지 한 이 전쟁에서 독일은 최신 공군력을 발휘하여 국민군 승리의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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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란의 끝난 4개월 후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스페인은 중립을 선언하여 내란 때 도와주었던 독일과 미묘한 관계가 되었다.
1945년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프랑코 정권은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수년간에 걸쳐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어야했다. 1955년 유엔가입을 계기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조금씩 회복해갔다. 하지만 1975년 프랑코사망까지 약 40년간은 일인 군독재 기간으로 언론집회 등의 자유가 억압된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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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는 피카소, 까잘스, 로르카 등의 화가, 문인들의 반독재활동이 두드러졌고 또한 그들은 억압받는 민중을 대변했던 개혁민주화의 투사들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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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게르니카] @ 게르니카는 스페인 바스크지방의 작은 마을로, 1937년 스페인 내란 중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 파시스트의 무차별 폭격에 의하여 폐허가 되었던 곳이다. 이 폭격으로 마을 전체 가옥의 80%가 파괴되고, 민간인 1500명 정도가 학살되었다. 이 사건은 스페인 내전 최대의 비극이었다. 스페인 정부는 1937년 파리국제박람회의 스페인관에 출품하기 위해 피카소에게 작품을 의뢰했는데, 피카소는 자신의 조국의 비보(悲報)를 듣고 약 한달 반만에 작품 <게르니카>를 완성시켰다. <게르니카>는 파리만국박람회를 비롯하여 구미 여러 나라에서 순회전을 가졌고, 이 작품을 통해 '게르니카 사건'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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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이 프랑코 체제가 되자 공화파 지지자였던 피카소는 <게르니카>의 반입을 거부하고, '스페인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회복할 때까지'라는 조건으로 이 작품을 뉴욕 근대미술관에 대여해주었다. <게르니카>는 "민주화한 조국에 그림을 돌려주라"는 피카소의 유언에 따라 1981년 스페인으로 반환되었다. 81년 스페인으로 반환 후 <게르니카>는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었다가 보관상의 문제로 92년 소피아왕비 미술센터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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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
헤밍웨이 소설작품, 영화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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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의 스페인 1975년 프랑코의 사망으로 후안 카를로스 1세가 합법적으로 프랑코를 계승하고 수아레스 수상이 들어서면서 국민투표에 의한 정치개혁법통과에 이어 신헌법제정, 언론자유 등의 민주화조치가 진행되어갔다. 정치적으로는 의회제에 바탕을 둔 입헌군주제의 민주주의국가가 되었다. 노동조합과 정당에 대한 헌법상의 지위를 부여하고, 모든 기본적 자유를 보장하였으며, 국왕은 국가 원수이고 군의 최고 통수권자라고 규정하였다. 1981년 1월 군부의 비판과 경제사정 악화로 총리 수아레스가 물러남과 함께 2월에는 대령 테헤로를 주동으로 한 쿠데타 미수사건이 일어나고, 치안경비 대원들이 국회를 점거하는 등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2월에 수아레스의 후임으로 소텔로 내각이 발족되어 지방자치권의 점진적 확대 등의 시책을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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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총선거에서 사회노동당(PSOE)이 승리, 40년간의 우익보수정권이 붕괴되고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1985, 1986년 유럽 경제 연합에 가입하였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세비야세서 EXPO 92개최, 마드리드가 유럽 문화도시로 지정되었다. 1996년 중도 선거를 치루고 결과는 국민당(PP)의 승리로 돌아갔다. 2000년 봄에 치른 선거에서 국민당은 다시 압승을 거두었으며 2004년 총선까지 권력을 유지하였다. 경제적으로는 90년 초의 고도 성장과 실업율을 내리면서 국민 경제의 향상을 가져왔고 EU 초대국가로 유럽에서도 힘있는 국가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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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아라크 전쟁이 발발하였으며 스페인은 이라크에 평화유지군을 파병하였다.
2004년 3월에 알카에다에 의해 마드리드역 기차폭발 테러가 있었는데 불과 선거를 3일 앞두고 있었다. 이 선거에서 사회노동당(PSOE)이 승리하여 재집권하게 되었으며 선거 공약대로 이라크에서 스페인 병사를 철수 시켰다. 이후 미국과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유럽헌법에 서명하였고 국민투표를 통하여 이를 인준하였다. 동성결혼법도 통과시켜서 정치에서 가장 열린 정부를 만들었다. 2006년 4월에는 바스크독립운동단체(ETA)에서 휴전을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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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ilia Real Española S.M. el Rey Don Juan Carlos S.M. la Reina Doña Sofía S.A.R. el Príncipe Don Felipe S.A.R. la Princesa Doña Letizia S.A.R. la Infanta Doña Leonor S.A.R. la Infanta Doña Elena S.A.R. la Infanta Doña Cristina Excmo. Señor Don Jaime de Marichalar Excmo. Señor Don Iñaki Urdanga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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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력 비교: "(9위를 차지한) 스페인(1조1248억달러)까지는 GDP 규모가 1조달러가 넘어가 차이가 많이 나지만 우리나라와 인도, 브라질은 매년 왔다갔다한다"며 "10위부터 13위, 14위까지는 경제규모에서 큰 차이가 없어 각 나라의 환율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10위 인도는 8003억달러, 11위 브라질은 7961억달러, 12위 한국은 7875억달러다. 10위,11위인 인도, 브라질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3위 멕시코(7684억달러), 14위 러시아(7636억달러), 15위 호주(7081억달러)와도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9위 스페인과 12위인 우리나라의 GDP 규모 차이는 3373억달러. 반면 10위 인도와 15위 호주 사이의 경제규모 차이는 922억달러에 불과하다. 그만큼 10위권이라고 할 수 있는 10위에서 15위까지의 경쟁이 치열하다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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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경제규모 => 한국의 1.5배 정도이다
○ GDP(2005년발표) : 9,551억 달러(OECD국가 중 7위) =>1조1248억달러 (전체9위, 2006년발표) ○ 연간 성장률 : 3.5% ○ 1인당 GDP : 2만 2,421 달러 => 2만7,542달러 (전체 25위 2006년발표) <=> 지난해 한국의 GDP는 12위인 7875억달러(2006년발표)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한 1만6291달러로 세계 29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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