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기 변상윤,김준수,신아름,장수현,김은서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의 통일 왕건(태조)은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고 정함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개경) 으로 도읍을 옮김 호족의 동요가 일어남 (ex:웅주 인근 지역이 후백제에 투항, 서원경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이에, 1.태조는 지방의 호족을 겸손하게 대하고 그들의 딸과 혼인함 2.신라에 화친 정책을 취해 신라 지역의 호족들에게 지지를 얻음 (이로 인해 고려와 후백제가 대치했을 때, 안동 지역 호족들의 도움으로 대승을 거둠)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의 통일
후백제에서는 왕위 계승권을 두고 내분이 일어남 견훤의 큰 아들 신검이 정변을 일으켜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왕이 됨 그러나 견훤은 탈출하게 됨 탈출 후 견훤이 한일 1.고구려에 투항 2.신라의 경순왕과 통합함 (경순왕이 나라를 지탱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요청을 함) 이후 고려는 후백제군을 격파하여 후삼국을 통일함
태조의 정책과 발해 유민의 통합 태조가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한 행동 1.빚으로 노비가 된 일부 양민을 값을 치르고 풀어줌 2.세율을 10분의 1로 정하여 호족이 지나친 세금을 걷지 못하게 함 3.태봉과 신라, 중국의 제도를 참고,정치 제도를 마련 함 4,기인 제도와 사심관 제도를 시행해 호족을, 견제 지방 통치를 보완 함 5.정계와 계백료서를 짓고 예절을 강조하여 국왕과 신하의 구분을 엄격히 함 6.훈요10조를 남겨 후대의 왕들이 지켜야 할 정책의 기본 방향을 지시 함
기인제도-지방 호족의 자제를 볼모로 중앙에 머물게 하는 것 사심관제도-그 지방의 관리를 그 지방 사람으로 임명하여 지방에서 반역의 일이 발생하면 사심관 직에 임명된 관리에게 연대 책임을 지게 하는 것
연호-왕이 즉위한 후부터 물러날 때 까지의 기간을 독자적인 칭호를 붙여 사용한 연대표기식의 다른 형태 전시과제도- 고려시대 벼슬아치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던 제도 향리제도- 고려,조선시대 지방관청의 행정실무를 처리하던 하급 관안계층 즉위-임금이 될 사람이 예식을 치른 뒤 임금자리에 오름 연등회- 신라에서 시작하여 고려시대에 국가적인 행사로 자리잡은 불교행사 팔관회- 국가행사로 치러진 종교행사
왕권의 안정 태조는 왕건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호족의 세력을 약화 시키지 못함 호족들은 왕자들의 배후 세력이 됨(정권 쟁탈전이 벌어짐) 태조 사후에 혜종과 정종이 단명하자 왕권이 불안정해짐 이에 광종은 호족의 세력을 누르고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을 추진함 1.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의 경제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재정 기반을 확대함 2.과거제를 실시하여 유학을 공부한 인재를 관리로 선발함 (자신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세력을 삼고자 함)
국가의 위상과 국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황제를 칭하고 개경을 황도라 부르며 독자적 연호를 사용함 이러한 개혁 정책으로 왕권이 강화되었으나 호족 세력은 크게 반발 함 경종은 1.광종의 정책을 철회함 2.광종의 정책을 뒷받침 하던 신진 세력을 제거 함 3.전시과 제도를 실시하여 호족의 경제 기반을 안정시킴 성종이 즉위하자 최승로는 이전의 혼란을 반성하고 유교 정치 실시를 주장함 최승로는 1.지방 세력의 통제와 지방관의 파견을 건의함 2.유교의 진흥과 불교 행사의 축소를 건의함 3.토속적인 신앙 의례의 폐지를 건의함 이에 성종은 12개의 주요 지역에 지방관을 파견, 향리 제도를 정비함
성종은 1,과거제를 정비하고 지방의 인재를 불러 교육함 2.유교적인 모범 사례를 발굴하여 표창함 3.연등회를 축소하고 팔관회를 폐지하여 국가적인 불교 행사를 억제함 현종은 연등회와 팔관회를 다시 성대하게 거행하는 등 자주적인 문화 정책을 펼침
중앙 정치 체제의 정비 -----중앙 정치 체제의 정비----- 성종은 2성 6부와 중추원, 삼사 등의 중요한 기구를 설치했다. 먼저, 중서문하성은 중서성과 문하성을 통합한것이다. 이것은 2품 이상의 최고급 관리인 재신과 3품 이상의 낭사로 구성되었고, 장관은 문하시중으로 왕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비판할 권리를 가지고있었다. 재신과 추신은 6부의 판사와 상서 등을 겸하며 정책의 결정과 집행에 모두 관여하였다. 상서성- 행정부의 기능을 가졌는데, 6부를 하부 기구로 두었다. 문하시중-중서문하성의 장관으로 국정을 총괄, 정책 결정 중추원-군사 기밀과 왕명 출납을 담당 상서-6부를 통솔, 정책 집행
고려귀족정치의 특징 중서 문화성의 재신과 중추원의 추신은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에서 회의를 열어 정책 결정 중서문화성의 낭사와 어사대의 관원은 대간으로 불리며 왕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비판할 권리를 가짐
지방 제도의 완성 . 성종은 12목에 지방관을 파견 경주를 동경으로 승격하여 개경,서경의 3경 체제를 갖춤 →이후 동경대신 남경이 3경에 편제됨 →현종은 도회부,목,주,군 현의 순으로 행전 단위를 정비 ·일반 행정 구역인 5도에 안찰사 파견하여 행정 살핌 중요한 지역에는 북계와 동계를 두고 병마사를 파견 양계의 군,현 에는 대부분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의 통제력 강화 국방상 요충지에는 군사적 특수 지역인 진을 설치했다.
관리 등용 제도 -----관리 등용 제도----- 고려의 과거제도는 광종때 중국인 쌍기의 건의에 의해 처음 실시되었다. 과거제는 제술과, 명경과, 잡과, 승과로 나뉘었다. 제술과는 문학적 소양과 당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시험하였다. 경경과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를 시험하였다. 잡과는 의학, 천문, 회계, 지리 등 실용 학문을 시험하였다. 승과는 불교 경전의 이해 능력을 시험하였다. 제술과와 명경과에는 주,군,현의 차관급 즉 부호장 이상의 자제들이 응시하였고 잡과에는 주로 양민들이 응시하였지만 일종의 기술자 채용시험으로 천민을 제외한 일반 서민도 응시했다. 시험에 합격하면 홍패를 주었는데 홍패에는 응시자의 이름과 지위, 성적, 고시관의 명단이 기록되었다.
군사 제도의 정비 고려의 군사제도는 중앙굱과 지방군으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은 국왕의 친위 부대인 2군과 수도와 국경의 방어를 담당하는 6위가 있다. 지방군은 남부 5도의 주현군과 변경지대인 주진군으로 편성되었다.
거란과의 전쟁 원인: 몽골과 만주지방의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던 중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일 하고 916년에 요나라 건국 922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킴 고려가 거란에 적대적 태도를 보임 이후 송과의 화친정책 실시 북진정책과 거란의 대한 강경책 실시 1차전쟁-993년 소손녕이 6만대군을 대리고 고려를 침공→고려조정에서 서희를 보냄 → 소손녕과 의 외교담판에서 강동6주를 획득함 (고려의 승리로 끝남) (전쟁의 의도: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 시키기 위해) 2차전쟁-1010 요나라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 침략 (이유: 이 당시 고려에서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불륜관계에서 나온 아들을 왕으로 잇게 하려 하고 그에 대해 강조가 정변을 일으킴) (전쟁의 의도: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 시키고 강동6주를 다시 되돌려 받기 위해 ) 양규가 흥화진에서 항전으로 승리 →강조가 통주에서 대패 →이후 강조 죽음 →고려의 화친 요청 →양규의 분전과 죽음으로 전쟁은 끝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