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 intellectuels français 현대 프랑스의 갈등과 통합 제7강 프랑스에서 지식인의 개념 Les intellectuels français 서강대학교 전종호교수
강의 개요 16세기 르네상스 이후, 프랑스에는 ‘문학 belles lettres’에 대한 중요성과 우월성이 강조되었다. 그 대표적인 모델이 몽테뉴 Montaigne 이다. 그는 도덕적 엄격함 뿐 아니라 우아함과 섬세함, 그리고 뛰어난 재치의 소유자로 프랑스 문필가의 모범이 된다. 프랑스 문화에서 문학의 위치는 매우 강조된다.
교양인의 탄생 ‘교양인 honnête homme’의 개념은 이렇게 형성된다. 17세기 고전주의 시대 프랑스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교양인은, 좋은 교육을 통해 형성된 섬세하고 우아하며 지적인 인간을 뜻한다. 프랑스에서 이러한 교양인의 교육을 담당한 주요 교육기관은 ‘예수회 Jésuites’의 학교였다. 3세기 전부터 예수회는 프랑스 교육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들은 ‘지식이 많은 사람 tête pleine’보다는 ‘양식 있는 사람 tête bien faite’을 교육하려 했다. 즉 비판정신을 길러주기 위해 그들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을 교육했는데, 고전교육의 강조, 교양교육 및 경쟁정신의 계발, 신사로서의 행동거지와 말하는 법이 주된 내용이었다.
교양인의 탄생 프랑스 대혁명 이후 이러한 교육의 원칙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져, 전통적인 교양교육에 직업교육을 융화하려 하였다. 즉 기술교육에 대한 중요성이 점차 부각된 것이다. 프랑스의 교육에서 교양 culture과 직업 culture technique교육은 이 시기부터 어떤 대립을 갖는다. 이공계 교육에서도 순수 이론 théorie pure과 기술은 나누어져, 학생의 지적인 능력이 못 미친다고 판단할 때 기술교육으로 진로를 유도한다. 즉 프랑스에서는 직업교육보다는 교양교육을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상이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프랑스와 미국의 경우를 비교하면 프랑스의 지식인전통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기득권 없이 넘어온 이민자들이 만든 나라로, 기본적으로 일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다. 그러므로 교양이라는 무상의 훈련보다는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일, 사회에 유용한 일에 더 가치를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교육의 방향도 자연히 실용주의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문화’와 ‘기술문화’를 대립시키며 전자를 ‘진정한’ 문화라고 간주하는 오래된 전통이 있었다.” (오영주,「행동하는 지성」,『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 강, 2008, 61)
교양인의 탄생 프랑스에서 정치적, 경제적, 과학적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적수준, 즉 ‘교양인’으로서의 우수함을 입증할 수 있어야한다. 실은 이들은 거의 유사한 교육 배경을 갖고 있는데 (같은 대학, 같은 그랑제꼴), 이들이 높은 직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화적인 배경, 즉 교양수준에 대한 증명을 해야 한다. 이러한 문화는 무엇보다도 문학적이고, 철학적이며, 역사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정치인이 교양이 없다는 것, 즉 완벽하게 불어를 말하고 쓰는 능력이 없는, 그래서 저서 한 권을 쓰지 못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반권력 인사 Contre pouvoir 프랑스는 문화와 정치, 영적인 것과 속적인 것이 매우 밀접하게 연계되어있는 나라이다. 근대적인 프랑스 지식인의 탄생은 18세기 즉 계몽주의시기로 보는데, 역사학자인 토크빌 Tocqueville은 이 시기 군주정이 자신의 이익 raison d'Etat 과 금권에 반대하는 볼테르 Voltaire, 디드로 Diderot, 루소 Rousseau, 꽁도르세 Condorcet 등을 권력에서 추방함으로 이들이 반권력 인사가 된 사건을 ‘문필가 homme de lettres’가 도덕과 진실의 보호자가 된 것으로 보고 이를 근대적인 프랑스 지식인의 탄생으로 본다. 이들이 직접적으로 ‘구체제’를 무너뜨린 것은 아니나 프랑스대혁명은 이들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지식인 intellectuel의 탄생 19세기 동안 프랑스의 지식인은 권력에 맞서서 논쟁을 벌이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드레퓌스 사건’이다. 이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이 선언으로 프랑스의 지식인은 두 파로 갈리는 데, 하나는 드레퓌스의 옹호자로 좌파 지식인들의 모임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파적 민족주의자와 반유태주의의 그룹이었다. 이러한 논쟁의 핵심은 개인의 인권과 이성의 존중, 그리고 국가의 이익과 인종에 근거한 민족의 옹호자들의 갈등이었다. 여기서 ‘지식인 intellectuel’이란 단어는 형용사에서 명사가 된다. 즉 현대적인 프랑스 지식인이 탄생한 것이다. 이는 제 3공화국에서 한 프랑스의 유태계 장교를 무고하게 독일의 간첩으로 몬 사건으로, 1898년 졸라 Zola는「나는 규탄한다 J'accuse」라는 기사를 당시의 신문에 발표하는데, 이의 부제는「지식인들의 선언 Manifeste des intellectuels」이었다. 드레퓌스 에밀 졸라
좌파 지식인 Intellectuels de Gauche 좌파 Gauche라는 단어는 1789년 국민의회 Assemblée nationale에서 자유와 평등을 지지하는 민중지향의 의원들이 의회의 왼편에 앉은 것에서 시작된다. 반면 오른편에 앉은 의원들은 왕정과 가톨릭을 지지하는 그룹이었다. 이후 프랑스의 좌파와 우파의 이념이 형성된다.
좌파 지식인 Intellectuels de Gauche 우파는 보수주의, 인종차별주의, 반 개혁주의로 좌파는 진보와 민주주의, 제 1차 및 2차 인터네셔날로 대표되는 국제적인 노동운동으로 구별되는 이러한 상황은 특히 양차대전 사이에 파시즘과 사회주의로 극단화된다. 1920년대부터 루이 아라공 Louis Aragon, 폴 엘뤼아르 Paul Eluard, 앙드레 브르통 André Breton 등의 초현실주의자들은 반식민투쟁을 지지했고 공산주의 운동에 가까워졌다. 19세기 동안 좌파는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계승한 공화국의 지지자로 정교분리를 위해 투쟁한다. 우파는 구체제와 특권을 옹호한다. 이러한 갈등은 나폴레옹이 1815년 왕정복고를 이루었을 때, 제 3 공화국의 정교 분리 시 그리고 드레퓌스 사건 등에서 표출된다. 1970년까지 이러한 좌우의 대립은 특히 사회적인 문제에서 입장을 달리하며 계속되는데, 좌파는 노동문제, 레지스탕스, 알제리전쟁, 식민지해방, 러시아 혁명, 스페인전쟁, 인도차이나 전쟁 등의 사건에서 강한 역할을 했다.
좌파 지식인 Intellectuels de Gauche 1936년 인민전선당 Front populaire의 집권 시기에 사회주의는 유럽에 퍼져 가는 파시즘에 저항한 유일한 세력이었다. 파시즘의 대두, 스페인 내전, 또 다른 세계대전에 대한 불안감등의 정치적인 사건들이 당시 지식인들로 하여금 무관심하게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지식인들은 인민전선당에 대거 담하였다. 모라스 Maurras, 드리외 라 로쉘 Drieu La Rochelle이나 브라실라크 Brasillach (나치와의 협력 때문에 1945년에 총살당함) 같은 몇몇 우파 문학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프랑스 지식인들은 모여서 파시즘에 대항했다.
좌파 지식인 Intellectuels de Gauche 그들 대표적인 작가들은 앙드레 지드 André Gide, 로맹 롤랑 Romain Rolland, 앙드레 말로 André Marlaux(스페인 내전 참전)등이었고, 또한 가톨릭 작가들인 프랑수아 모리악 François Mauriac과 조르주 베르나노스 Georges Bernanos도 교회의 입장에 반대하여 스페인 공화주의자들의 편을 들었다. 앙드레 지드 로맹 롤랑 앙드레 말로 프랑수아 모리악 조르주 베르나노스
좌파 지식인 Intellectuels de Gauche 2차대전의 패배 후 비시 Vichy 정권은 이러한 인민전선당의 흔적을 지우려했다. 이들은 공화국 헌법을 폐지하고, 반 유태법령을 만들고 나치와 협력했다. 이 시기 많은 우파의 그룹이 비시정권과 협력하고 좌파, 특히 공산주의자들이 레지스탕스에 참가한다. 이는 전쟁 후 좌파가 승리와 영웅의 그룹이 되는 원인이 된다.
좌파 지식인 Intellectuels de Gauche 전쟁 후 냉전은 좌파와 우파를 더 분열시켰다. 지식인의 사회 참여는 세계를 사유하고 해석하는 것에서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으로 변한다. 이런 맥락에서 좌파와 지식인은 동의어로 인식되었다. 이들에게 마르크스주의는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고,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직접 당에 가입을 안 해도 이와 동반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예를 들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는 이러한 ‘참여지식인 intellectuel engagé’의 좋은 모델이었다. 공산당은 노동자와 농민의 당이었고 더 우애 있고 평등한 사회, 더 많은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문화를 지향한다고 판단한 당시의 지식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Jean-Paul Sartre
좌파 지식인 Intellectuels de Gauche 좌파 가톨릭 신자들은 1932년 만들어진 잡지 『에스프리 Esprit』의 디렉터이자 인격주의의 선두인 엠마누엘 무니에 Emmanuel Mounier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반공산주의 지식인들은 이 당시에는 드물었는데, 레이몽 아롱 Reymond Aron은 반공산주의 지식인 중 하나였다. 그는 1955년 마르크스주의와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인『지식인의 아편 L’Opium des intellectuels』을 출간했다. 이 책은 그를 20년 가까이 프랑스 지식층의 대열에 끼게 했다.
좌파 지식인 Intellectuels de Gauche 1968년 5월 혁명은 결정적으로 지식인 젊은이들을 공산당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공산당은 대학생들의 반기를 지지하지 않았고 대학생들이 너무 무정부주의적 영감을 받았다고 여겼다. 그 후에는 대학생들이 트로츠키주의나 모택동주의 조직에 오히려 이끌렸고, 이 조직들은 공산주의와는 완전히 구분되었다. 프랑스 극좌파 세력이 당원들이 많은 적이 전혀 없다 하더라도 이 세대의 지적 사고에는 많은 영향을 끼쳤다 (68세대). 50년대 중반까지 공산당은 프랑스 지식인에 대한 피할 수 없는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1956년부터는 공산당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는데, 소련에서 스탈린의 범죄들을 폭로하는 흐루시초프의 보고서 출간과 헝가리 폭동의 진압과 함께였다.
좌파 지식인 Intellectuels de Gauche 70년대 중반은 대전환점을 이룬다. 1974년 솔제니친의 저서『수용소 군도 L’Archipel du goulag』가 프랑스에서 출간되면서 큰 충격을 일으켰다. 1976년 반소련 비판에서 반마르크스주의 비판으로 넘어가는 '새로운 철학자들'이 미디어 무대에 등장했다. 베르나르 피보 Bernard Pivot의 텔레비전 프로(아포스트로프, 1976년) 때 베르나르 앙리 레비 Bernard-Henri Levy와 앙드레 글뤼크스 André Glucksman만은 프랑스 지식인 모델에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한 마르크스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밝혔다. (사르트르 Sartre와 들뢰즈 Deleuze에게 많은 비판을 받은) '신철학자들'은 토크빌과 레이몽 아롱 처럼, 우파 자유주의 작가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데 기여했다. 여세를 몰아 알랭 드 브누아 Alain de Benoir는 GRECE(서구문명조사 연구단체)를 창설했고 스스로를 '신우파'라고 자처했다.
좌파 지식인 Intellectuels de Gauche 그 후로 정당에 대해 독립된 좌파 지식인들은 결사활동이나 탈세계화 운동(국제금융관세연대 ATTAC, 코페르니쿠스 재단 등)을 더 선호했다. 그리고 정확한 이슈(인권, 불법체류자, 인종차별주의 반대자들의 투쟁, 1995년의 사회 운동)에 대해서만 모였다. 피에르 부르디외 Pierre Boudieu는 아마도 이 새로운 활동 방식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80년 대 이후 언론은 좌파 지식인의 몰락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점차 정치의 장에서 떠나는데, 위대한 지식인들, 즉 사르트르,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알뛰세르 Althusser, 푸꼬 Foucault, 라깡, 시몬느 드 보부아르 등의 사망이 그 주된 원인이 된다. 이들의 사망은 사회 여론을 이끄는 큰 존재가 사라짐을 뜻한다. 또한 프랑스에서 중산층의 성장으로 좌파와 우파의 구분이 희미해짐도 그 원인이 된다. 특히 1981년 좌파와 우파의 동거정부는 그 상징적인 사건이 된다.
지식의 집합처 프랑스의 독특한 면 중 하나는 지식인들의 논의의 장이 항상 파리라는 것이다. 이들은 파리에서 강의하고 저서를 출판하고 논쟁을 함으로 권위를 부여받는다. 이러한 상황은 18세기 이후 프랑스의 살롱 Salon의 전통으로 볼 수 있는 데, 이곳에서 사람들은 토론하고 자신의 의견을 유포했다. 이는 2차대전 이후 카페 café로 옮겨진다. 파리의 생 제르망 데 프레의 카페들은 실존주의 지식인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되 마고 Les Deux Magots’나 ‘플로르 le Flore’등과 ‘브라스리 리프 Brasserie Lipp’등은 그 주요 장소였다. 라틴 쿼터 Quartier Latin는 소르본느 Sorbonne와 꼴레쥬 드 프랑스 Collège de France가 위치한 곳으로,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문화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극장과 서점들이 즐비하다.
지식의 집합처 라틴 쿼터 Quartier Latin는 소르본느 Sorbonne와 꼴레쥬 드 프랑스 Collège de France가 위치한 곳으로, 학생들과 지식인들의 문화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극장과 서점들이 즐비하다. 몽빠르나스 Monparnasse의 선술집들도 이러한 역할을 했다. 파리의 5구와 6구의 사이에는 대부분의 출판사들이 몰려있다.
지식의 집합처 프랑스 지식인들의 논쟁은 우선, 유명 잡지를 통해 유포된다.『누벨 르뷔 프랑스 Nouvelle Revue France』,『에스프리 Esprit』,『현대 Les Temps Modernes』,『논쟁 Le Débat』등이 그 것이다. 이외 『르 몽드 Le Monde』,『리베라시옹 Libération』 두 지식인 신문도 그 역할을 한다. 주간지로는『누벨 옵세르바뙤르 Le Nouvelle Observatue』가 대표적이다. 텔레비젼의 토론도 중요한 논쟁의 장이 되는데, 베르나르 삐보 Bernard Pivot가 진행하는 ‘아포스트로프 Apostrophe’ (‘부이용 드 뀔뛰르 Bouillon de culture’ 로 이름이 바뀜)에서 좋은 평을 받은 서적은 다음날 수 만권이 팔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http://blog.daum.net/espoir/ http://left21.com/article/9061 http://www.flickr.com/photos/25143217@N05/3571065134 Mauchamp, Nelly, La France d'aujourd'hui : Civilisation, Cle international, 1991. _________________, Les Français : Mentalité et comportement, Cle international, 1998. _________________, Les Français : Histoire et civilisations, Le Chevalier Bleu, 2006. 서울대학교 불어권문화연구소, 『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 강,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