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색채 1.인 도 인더스 강 유역에서 고대(B.C 2000 ~ 3000)의 청동기시대에 문화가 이미 발달하였고, 메소포타미아와 유사하고 이는 신에 관한 것이 많고, 도시계획이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 시대부터 모자이크 타일이나 돌에 의한 다채로운 재료가 사용되었다. 그 후 아리아인의 침입(B.C 1000)에 의해 카스트 제도가 형성되고 브라만교가 성행하게 되었으며, 그에 반대하는 불교가 일어나 투쟁으로 영고성쇠(榮枯盛衰)하여 현대에 이르고 있다. 색채는 인도교의 신을 나타내는 황과 흑, 그리고 불교의 색인 금과 황색을 많이 사용하였다. 또한 알렉산더 대왕의 침입(B.C 327) 이후 그레코 인도식이라 불리는 모양과 아라비아 풍이 들어간 인도 회교식이라고 하는 모양이 장식품에 많이 나타났다. 또한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에서도 인도풍이 보여지며, 건물은 금색이 많고 유적으로서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12세기), 앙코르 톰(9세기), 자바의 보로브도르(8세기) 등이 유명하다.
인도의 색채는 힌두교의 종교 의식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주황색과 황토색은 희생을 나타내는 의식에서 피를 상징한다. 인도의 색채는 대담함과 무제한적인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인도에서는 색채가 나이에 따라 구분하여 사용되며, 원색적인 여성의 사리는 출신 지역마다 다르게 사용된다. 인도의 색채는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것이 전통적인 것이든 현대적인 것이든, 장식적인 것이든, 실용적인 것이든, 자연적인 것이든, 양식화된 것이든 간에 강렬하고 화려하게 채색하는 것이 특징이다. 인도의 색채는 힌두교의 종교 의식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주황색과 황토색은 희생을 나타내는 의식에서 피를 상징한다. 심황 뿌리에서 추출한 노란색은 봄의 축제와 농작물의 성장을 의미하며, 결혼하는 신부에게 뿌려주는 색이기도 하다. 인도의 사원 앞에는 항상 다양한 밝은 염료가 준비되어 있으며, 종교 의식에 참가하기 위해 사람들은 얼굴에 채색한다. 대중의 집회나 의식이 있을 때마다 집회 장소와 사람들은 각양 각색의 색채로 치장하며, 자극적인 핑크, 주황, 노랑 등의 색채가 난무한다. 주택의 실내에도 밝고 다양한 풍부한 색채들이 사용되어왔으며, 오늘날까지도 이 전통은 소멸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울금 또는 심황이라고 하는 직접염료이다. 울금은 또한 카레의 원료로서 인도에서 유명한 재료이며, 생강과 다년생 식물인 울금의 뿌리를 찢거나 물에 우려낸 용액으로 염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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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 국 고대 중국에서는 양자강의 연안에 문화가 번성했다. 중국계로는 티벳, 중앙아시아, 터어키. 한국, 일본이 이에 속한다. 색채의 용법은 중국의 독자적인 것에 인도계(불교에 의한), 사라센계, 그리이스 로마 등의 문화에 영향이 가해진 것으로, 음양오행설에 의한 오색이 기본이며, 방위에 있어서는 녹청(청룡)이 동, 백(백호)이 서, 주(주작)가 남, 흑(현무)이 북, 황(황룡)은 중앙이다. 황은 황제의 색이고, 불교나 유교에 있어서는 신성한 색이다. 적은 일반적으로 태양, 행복, 남쪽을 나타내고, 청은 맑은 하늘, 영구(永久), 백은 화평(和平), 비애, 혹은 파괴를 나타내고 있다. 건축에서는 청장, 처마가 청색 혹은 녹색, 기둥이나 벽이 주황색, 기둥이나 처마 안은 주황색이나 금을 사용한 것도 일례라 할 수 있다. 사라센:중세의 유럽인이 서(西)아시아의 이슬람교도를 부르던 호칭.
중국에서의 색채는 우주의 기본이 되는 불, 금속, 나무, 땅, 물의 다섯 가지 요소. 5가지의 행복, 5가지의 미덕, 5가지의 악덕, 또 5가지의 교훈 등이 연관되어 있다. 또한 방위와도 관련되어 있어 북쪽은 검정색, 남쪽은 빨강색, 동쪽은 초록색, 서쪽은 흰색으로 나타내고 있다. 중국은 각 왕조마다 특징적인 색이 있는데 송왕조는 갈색, 명왕조는 초록색, 청왕조는 노랑색으로 특징지어진다. 황제가 하늘을 숭배하는 경우에는 파란색 의복을 착용하였으며, 땅을 숭배하는 경우에는 노란색 의복을 입었다. 황제는 모든 서명을 주황색 잉크로 하였으며, 관리들의 지위를 구별하기 위하여 모자 꼭대기에 색 단추를 달았다. 높은 지위의 관리들은 파란색 세단 (인력거의 일종) 을 타고 다녔으며, 낮은 지위의 관리들은 초록색 세단을 탔다. 중국의 연극을 보면 성격과 계급 등 등장 인물의 특징에 따라 얼굴색이 다르게 칠해졌다. 신성한 사람들이나 의리가 있는 붉은색으로, 시골 사람들, 그리고 공명정대한 사람들은 검정색으로, 도시 사람들, 광대나 야비한 사람들은 흰색으로, 청색은 화를 잘 내는 사람으로 얼굴을 칠해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신성한 사람들이나 의리가 있는 붉은색으로, 시골 사람들, 그리고 공명정대한 사람들은 검정색으로, 도시 사람들, 광대나 야비한 사람들은 흰색으로, 청색은 화를 잘 내는 사람
3. 일 본 일본의 색채는 두 가지의 매우 상반된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 하나는 건축과 실내에 사용된 색으로 목재와 왕골 같은 자연적인 색조와 넓은 면적을 중성색으로 사용하는 단조로운 느낌의 이미지이며, 또 하나는 일본 의상에 나타나는 화려하고 다양한 이미지이다. 건축과 실내에 사용된 색채는 매우 절제된 중성색과 다다미의 가장자리를 두른 검정색 선이나 도코노마를 장식하는 짙은 나무색이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차 문화가 발달한 일본의 의식적인 인공의 조형은 자연적인 색채의 사용에 있어서도 매우 의도적인 구성 방법을 보여준다. 일본 전통 의상인 기모노의 색상은 주로 바탕과 문양 간에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있으며, 다양하고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의 양면성은 전체적으로 절제된 색과 강조색을 확연히 구분하는 특징을 갖게 한다.
한국의 색채사 우리 나라 최초의 색채는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강변과 해변에서 발견된 기원전 3000년 이내로 추정되는 신석기인의 간단한 도구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기원전 2333년에 단군은 태백산 북쪽에 나라를 일으킨 이래 색명이 들어 있는 인근의 9부족- 황(黃), 백(白), 현(玄), 적(赤), 감(監), 천(千), 방(方)을 다스리다가 기원전 2311년에 도읍을 평양으로 옮겨 조선을 건국했다는 설화가 전하여지고 있다. 이 시기에 볼 수 있는 색상으로는 수렵과 농경을 겸하여 생활하였던 이 시기의 토기 유물 중에서 특히 홍색 도자기 전하여지고 있다. 이것은 토기의 표면에 산화철을 바르고 연마한 것으로 이것이 후에 신라토기로 계승된다.
고구려(B.C 37 ~ A.D 668) 고구려 시대는 5세기 초에 분묘와 벽화를 많이 남겼다. 황해도 안악군 유순리의 동수묘에는 10.5m벽면에 250 명의 대행렬이 그려져 있는데 의상의 형태와 색이 뚜렷하다. 만주 퉁구에 있는 고분벽화에는 주인접객도와 가무도, 수렵도, 삼림도 등이 그려져 있고, 비천, 선인, 사신, 인면조 등이 있다. 이 그림들은 빨강색, 갈색, 노랑색의 따뜻한 색을 주조로 하여 화면이 밝게 처리되어 있으며, 빨강색과 초록색의 보색대비가 특색으로 나타난다. 고구려 시대의 벽화에 쓰인 색들도 채도나 색상이 밝아 문화수준이 높고 생활이 풍요로움을 알 수 있다. 사신도(四神圖:청룡,백호,주작,현무)
동수묘 행렬도:북한 국보 제28호. 널방[玄室] 안에 진(晉)나라 때 사경체(寫經體)로 쓴 묵서(墨書)가 있어 이 고분이 357년(고국원왕 27)에 조성된 한국 최고(最古)의 벽화고분임이 밝혀졌으며 고구려 미술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벽화이다. 잘 연마한 석회암의 대판석(大板石)으로 구축하였고, 그 위에 직채(直彩)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즉 널방 복도에는 높이 2m, 길이 6m의 큰 판석에 250여 명의 기사(騎士) ·보졸(步卒)의 대행렬도(大行列圖)가 있고, 앞방 동쪽에는 씨름도와 그 밑에 도끼를 들고 행진하는 무사들의 그림이 있다. 앞방 서쪽 벽에는 앞서 말한 묵서가 있고, 남쪽에는 ‘전리(戰吏)’라는 붉은 글씨와 깃발을 든 7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으며, 서쪽 옆방의 좌우 벽에는 각각 칼을 짚고 서 있는 한 사람씩의 그림과 그 위에 붉은 글씨로 ‘장하독(帳下督)’이라고 쓰여 있다. 남쪽 옆방 벽에는 이 무덤의 주인인 동수와 동수 부인이 시녀들을 거느리고 각각 가마 위에 앉아 있는 호화로운 그림이 있으며, 이 밖에도 일상생활 ·기구 등 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무용도〉는 열네 명의 무용수와 악사가 상하로 그려져 있다 이 〈무용도〉는 열네 명의 무용수와 악사가 상하로 그려져 있다. 중앙에는 춤을 추는 다섯 명의 무용수가 그려져 있고, 앞에는 춤을 지도하는 듯한 무용수와 아래쪽에는 가락을 넣는 일곱 명의 악사가 있다. 이들은 소매가 길고, 흰색 바탕에 검은 점무늬나 황색 바탕에 붉은색 점무늬가 있는 옷을 입고 있어서 화려한 패션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무용 장면은 움직임의 표현에 역점을 둔 것으로 서서 춤을 추는 사람들을 약간씩 흐트러지게 배치하고 있다. 뒤로 뻗은 두 팔의 묘사에서는 표현상 어색함도 보이지만 한민족 특유의 어깨춤을 추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무악(舞樂)을 즐기는 우리 민족의 낙천적인 감성을 표현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런데 지금은 이슬맺힘[結露] 현상으로 많이 훼손되어 제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다. 주인 접객도 - 무용총 현실 . 북벽
중국 길림성 즙안현 여산남록 가무도:무용총 현실. 동벽 무용총(고구려)의 고분벽화 중국 길림성 즙안현 여산남록 가무도:무용총 현실. 동벽
현실 서쪽 벽면에 있는 것으로, 평양 약수리 고분의 수렵도와 함께 고구려인의 활달한 기상을 전하는 대표적 그림 중 하나다 현실 서쪽 벽면에 있는 것으로, 평양 약수리 고분의 수렵도와 함께 고구려인의 활달한 기상을 전하는 대표적 그림 중 하나다. 수렵도의 아래 부분에는 호랑이를 쫓는 무사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쏜살같이 달 리는 말 위에서 이를 포획하려는 무사의 기백과 긴장된 움직임이 화면에 가득하다. 오른쪽 부분에는 소가 끄는 수레가 있다. 소가 끄는 수레에는보통 여자가 탔고 말이 끄는 수레에는 남자가 탔다는 설이 있다. 마부는 채찍을 들고 있다. 고구려 고분에 남아 있는 수렵도 또한 제사의 한 형태로, 수렵 후에 그 희생제물을 통해 하느님과 교통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수렵도
고분벽화는 고대 회화의 제작과정, 표현기법과 수준, 안료 및 아교 제조술 등 여러 가지 특징을 잘 보여준다 고분벽화는 고대 회화의 제작과정, 표현기법과 수준, 안료 및 아교 제조술 등 여러 가지 특징을 잘 보여준다. 또한 고대 사회의 생활 풍속, 신앙, 종교, 사상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어 역사, 문화 자료로서 높은 가치가 있다. 벽화를 그리는 방법은 벽이나 천장 면에 직접 그리는 조벽지법(粗僻地法)과 회칠을 하여 벽면을 고른 후 그리는 화장지법(化粧地法)이 있다. 화장지법은 다시 회가 마르기 전에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습지 벽화법(프레스코법)과 회가 마른 후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건지 벽화법으로 나뉜다. 채색 안료 로는 녹청석, 군청석, 진사(辰沙), 자토(紫土), 황토(黃土), 금과 같은 광물질 가루를 투명성이 높고 점액성이 낮은 특수 아교에 개어 썼다. 색채는 갈색조를 바탕으로 흑색, 자색, 청색, 녹색 등을 자주 써 무덤 칸 내부가 화려하면서도 부드럽고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벽화의 주제로는 보통 생활 풍속, 장식 무늬, 사신(四神) 등이 선택된다. 생활 풍속을 주제로 한 고분벽화에는 주로 묻힌 자의 살아 있을 때의 생활 가운데 기념할 만한 것과 풍요로운 생활 모습을 보여준다.
백제((B.C 18 ~ A.D 660) 충남 공주에 남아 있는 백제 고분 중에서 벽면이 아치형으로 된 벽화전축분이 있는데 분묘내에 진흙에 호분으로 그린 사신과 토기, 금관, 귀걸이 등에 그 시대의 색채가 남아있다. 또한 이 시대의 고구려의 담징이 백제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일본에 있는 법륭사 금당의 벽면에 백제 관음상과 사불정토도를 그렸으며,그 일부가 현재까지 일본에 남아 있는 그 그림은백색을 바탕으로 하여 빨강색과 검정색으로 윤곽을 그린 후 파랑색, 초록색, 노랑색 등을 사용하여 프레스코 색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기법은 색을 섞지 않고 색점을 그라데이션으로 배치하여 색이 탁하지 않고 채도가 높은 색상으로 그려져 있다.
일본 법륭사;특히 금당 내부의 벽화는 610년(고구려 영양왕 21) 고구려의 담징(曇徵)이 그린 것으로 중국의 윈강석불[雲崗石佛], 경주의 석굴암 등과 함께 동양 3대 미술품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담징이 그런 것으로 알려진 호류사의 금당벽화는 석가·아미타·미륵·약사 등으로 구성된 사불정토도(四佛淨土圖)이나, 1949년 수리 중에 일어난 화재로 불타버리고, 현재는 모사화(模寫畵)만이 일부 남아 있다
백제 기와는 연회색을 띠며, 넓고 부드러운 연화문이 대부분이며 연꽃잎의 끝이 곡면을 이루며 약간씩 반전되어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단아한 맛을 주며 사실적이다. 초기에는 낙랑과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며, 웅진시대 이후에는 동진의 영향을 받는다. 백제의 와전 문화는 일본 아스카 문화에 영향을 주어 백제계 기와라는 새로운 유형을 낳는다.
송산리 6호분 벽화(내부) 송산리 6호분은 이 지구에서 발견된 유일한 벽화전축분인데 길이 4m 에 폭이 2.5m의 남북으로 긴 터널 형이다. 남벽과 북벽은 수직이고 동서의 두 장벽은 상부가 둥글게 돔처럼 내경으로 접합되어 있으며, 동서 양벽에 각3개, 북벽에 1개의 화염형 소룡이 있다. 무령왕릉과 거의 같은 방법으로 구축한 것이다. 벽에는 그릴 부분 에만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호분으로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를 그렸다. 남벽 주작의 좌우에는 일월을 그려 장식했음이 특이하다. 백제의 무덤 중 벽화가 그려진 것은 공주송산리 6호분 과 부여능산리 1호분(동하총이라고 부르기도 함)이다.
공주 송산리 6호분 서 백호도
신라(195 ~ 935) 신라는 백제문화와 또 백제를 통하여 세련된 중국의 남조문화를 받아들여 수, 당나라와 직접 문화 교류를 하여 불교문화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신라문화의 출토품 중 장신구와 채색칠기가 있는데 칠기는 검정색 바탕 위에 주홍색, 노랑색, 초록색, 흰색으로 초화문,당초, 연화문 등을 다채롭게 그린 특이한 작품이다. 신라 초기에는 유색녹골호(국보 125호)와 도제 기마인물상(국보91호)에 녹색 계통의 자연 유가 때때로 나타나며, 인공유인 황갈색 또는 황록색유를 쓰기 시작하였다.또한 신라시대의 사군기병대는 군복을 청, 흑색 등으로 흔적이 남아 있다.
고려(918 ~ 1392) 고려 초기의 미술 양식은 신라 말의 문화에 작용한 당나라의 양식이 계승되어 불교의 부흥과 귀족의 사치에 의해서 발달하였다. 이 시대의 고분벽화로는 공민왕릉과 법당방고분과 같이 사신도와 12지신상을 주제로 한 것이 많다. 부석사와 보살상, 수덕사 대웅전의 야화도, 수화도 등이 있으며, 이것들도 역시 프레스코 기법으로 짙은 초록색을 바탕으로 하여 홍(紅), 녹(錄), 백(白), 다(茶), 금(金)색 등으로 채색하였다. 또한 고려자기는 그 색채로써 유명한데 특히 상감청자의 비색은 그 색채가 띄어나다.
조선(1392 ~ 1920) 한국 미술의 색채는 조선 전반기의 도예문화에서 전통적인 표현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으나 아쉽게도 이 시대의 미술이 일부 귀족의 사색당쟁, 외족의 침입 등의 정치적 환경의 영향으로 뛰어난 미술로 승화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유채나 장식이 단순하고 소박하여 실용성이 있으며, 그림에서도 차츰 채색화가 나오기 시작하였으나 문인화 중심이었기 때문에 ‘뚜렷한 색채적인 특색은 없다. 그러나 건축의 색채는 후기로 갈수록 화려해져서 차츰 다양해진다. 공예에 있어서도 칠기, 색 화각, 목기, 가구 등의 민예품뿐만이 아니라 서민의 일상 생활용품에까지 많은 색채를 사용했다. 특히 일상 생활용품으로 칠보와 은세공으로 된 노리개를 많이 애용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