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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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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집트의 역사

2 고대 이집트시대 (BC3000~BC305) : 1~30왕조, 고왕국~신왕국시대
나일강을 중심으로 세워진 이집트의 역사는 크게 세부분(or 여섯부분)으로 나뉘어 질 수 있으며, 각각의 시기는 인종, 문화, 언어적으로 크게 다르다. 이집트역사의 구분 고대 이집트시대 (BC3000~BC305) : 1~30왕조, 고왕국~신왕국시대 헬레니즘시대 (BC305~BC30) : 프톨레마이오스왕조 로마시대 (BC30~AD395) : 로마의 황제속주 비잔틴시대 (AD395~AD642) : 기독교화된 이집트 이슬람시대 (AD642~AD1917) : 이슬람제국, 이슬람왕조, 오스만제국시대 영국의 식민지시대와 독립 이후 (AD1917~현재) : 식민지시대, 왕조시대, 이집트 아랍 공화국 고대 이집트는 아프리카 북동부 사막에 있는 오아시스와 같은 나일 강의 홍수에 의존해 농업이 이루어진다. 또한 주로 나일 강 유역과 나일 삼각주 지역에서 경제적 활동이 행해진다. 나일 강 유역은 띠처럼 길게 이어진 석회암 언덕 사이를 흐르는 나일 강의 비옥한 범람원이고, 나일 삼각주는 오늘날의 카이로 북쪽에 여러 개의 나일 강 지류를 중심으로 부채 모양으로 펼쳐져 있는 땅이다. 아스완에 있는 제1폭포는 이 나라안에 있는 국경으로는 유일하게 윤곽이 뚜렷한 경계선이었다. 이 폭포 남쪽에는 사람이 살기에 훨씬 부적합한 누비아 지역이 펼쳐져 있었다. 이집트 서쪽에는 몇몇 광물을 제외하고는 모든 자원이 부족한 메마른 사하라 사막이 있다. 북동쪽에 있는 수에즈 지협은 시나이 반도 및 서아시아와 접촉할 수 있는 주요통로로서, 이집트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교류 지역이었다. 왕조 이전 시대와 초기 왕조시대의 이집트인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다. 땅은 고위 관리들에게 할당되어 있었고, 그 땅에 살면서 일하는 사람들은 땅을 마음대로 떠날 자유도 없이 의무적으로 경작해야 했지만 노예는 아니었다. 노예가 되는 사람은 포로와 외국인 또는 가난이나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몸을 팔아 고용살이를 하는 사람뿐이었다. 공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집트 사회는 신, 왕, 죽은 사람, 인간(주로 이집트인)으로 이루어진 하향식 계급 구조 사회였다. 왕은 어떤 인간보다 잠재 능력이 크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인간이라기보다는 신이었지만 그의 지위는 주요 신들보다 훨씬 열등했다. 이집트 왕들은 보통 파라오라고 불렸는데, 이 낱말은 '큰 땅'을 뜻하는 이집트어 '페르아'(per-aa)에서 유래했다. 신왕국시대의 모든 왕은 저마다 독특한 칭호를 가진 왕비 1명과 그보다 지위가 낮은 많은 아내를 거느렸다. 왕비가 낳은 아들이 왕위 계승자로 우선권을 가졌던 것 같지만, 다른 아들들도 왕이 될 수 있었다. 대개의 경우 후계자는 맏아들(살아남은 아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아들)이었지만, 다른 친척이나 전혀 혈연 관계가 없는 사람이 왕위를 계승하기도 했다. 이집트 선사시대의 신석기 단계를 보통 '왕조 이전 시대'라고 부른다. 뒤이어 이집트의 토착 통치자들이 다스린 왕조시대는 프톨레아이오스 왕조의 신관 마네토가 BC3세기초에 쓴 〈이집트사 Aegyptiaca〉에 따라 보통 30개 왕조로 나누어진다. 이 책의 내용은 오늘날 후세 저서에 단편적으로 전해진다. 마네토는 초기 왕들의 통치연도를 숫자로 표시하지 않고 통치기간에 일어난 두드러진 사건을 따서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이 이름으로 목록을 만들었는데, 마네토는 이를 기본 사료로 삼았다. 오늘날 이탈리아 팔레르모의 지역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현무암의 팔레르모석에는 그런 목록의 일부가 새겨져 있다.

3 이집트 역사를 알려주는 고고학 및 금석학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만 근대이전까지 역사 해석을 시도한 적이 없으며, 자료의 분포 또한 고르지 못하다. 예컨대 자료가 전혀 없는 수십 년의 공백기도 있고, BC2000년대에는 역사적 사건을 연속적으로 기록한 왕실 금석문 자료가 하나도 없다. 제5왕조(BC2465~2325경)부터 로마에 정복될(BC30) 때까지 만들어진 개인의 전기적 금석문은 개인과 사건의 관련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있지만, 그 사건의 전반적 의미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제12왕조(BC1938~1756경)부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BC305~30)까지 만들어진 왕실 금석문은 왕이 세계 질서의 재창조자이며 세계의 지속적인 안정이나 팽창을 보장하는 존재라는 포괄적인 '역사' 개념에 따라 왕의 행위를 제시하고자 했다. 고대 이집트에 대한 유럽의 관심은 로마 시대에 강했고 르네상스 시대에 되살아났다. 로마에 남아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풍부한 이집트 유물과 이 나라를 방문한 사람들이 제공하는 약간의 정보가 이를 보완해주었다. 당시 이집트에 대한 견해를 지배한 것은 이집트가 고대에 지혜의 땅이었다는 고전시대의 전설이었다. 1798년에 나폴레옹이 이집트로 원정했을 때 원정대에 포함되어 있던 학자들은 그들이 발견한 것을 기록해 〈이집트 묘사 Description de l'Égypte〉(1809~28)로 출판했다. 이 저서는 상형문자를 해독하기 전에 나온 연구서 중에서는 가장 포괄적인 것이다. 나폴레옹 원정대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 에피파네스의 포고문을 상형문자와 민중문자 및 그리스문자로 기록한 로제타석을 발견했다. 프랑스가 항복한 뒤 로제타석은 영국으로 넘어갔지만 이 비문을 1822년에 프랑스의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이 해독했다. 19세기 전반에는 수많은 고대 유물이 이집트에서 반출되어 세계 각지 주요박물관의 소장품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이집트 고대 유적은 발굴 과정에서 커다란 손상을 입었기 때문에, 이 유물들은 발굴되었다기보다 오히려 도굴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19세기 중엽에 프랑스와 프로이센에서는 이집트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했다. 프랑스의 이집트 학자인 오귀스트 마리에트는 이집트에 고대 유물 관리청과 이집트 고미술품 박물관을 세웠고,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브루크슈는 여러 시대의 문헌을 해석하는데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으며 최초의 중요한 이집트어 사전을 출판했다. 1880년에 드디어 영국의 이집트 학자인 플린더스 피트리는 체계적인 발굴 작업을 전개했다. 40년 넘게 걸린 이 발굴 작업은 오래 된 선사시대를 제외하고 이집트 문화의 모든 주요시기에 대한 고고학적 뼈대를 만들었다. 20세기 전반에 몇 가지 두드러진 고고학적 발견이 이루어졌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1922년에 하워드 카터가 발견한 투탕카멘의 무덤이었다. 1950년대말~1960년대에는 1970년에 아스완 하이 댐이 완공되기 전에 이집트와 수단에 걸쳐 있는 누비아 지역의 유적을 발굴해 기록하자는 국제적인 운동이 벌어졌다. 그후 하(下)누비아에 있는 대부분의 신전이 좀더 높은 지역이나 여러 외국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 운동 덕분에 이집트에는 광범위한 고고학 기술이 도입되어 발굴 및 기록 수준이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

4 1. 파라오 이전의 상,하 이집트 세계에서 가장 긴 강 나일(The Nile)은 적도 지방의 빅토리아 호수에서 발원하여 6,671 km 를 흘러 지중해로 들어간다. 강이 바다에 도착하기 1,000 km 쯤 전 아스완에 있는 '나일 제1폭포'를 통과하는데, 이집트 역사는 대략 이 마지막 1,000km 구간, 즉 나일 제1폭포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유역에서 지난 6,000년 동안 일어난 일들이다. 12,000∼10,000년 전 쯤인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기상변화가 계속되어 원래 드넓은 숲이었던 북부 아프리카 지역이 점차 사막으로 변해갔다. 해마다 강물이 범람하는 이곳도 처음부터 사람이 편히 살 수 있는 풍요한 땅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범람으로 비옥해진 땅에 농사를 지으면서 범람에 대처하는 토목과 관개기술을 개발해내고 도시를 건설하고 또 신화를 창조해내면서, 후세의 사람들이 '고대 이집트 문명'이라고 부르게 되는 위대한 문명의 기초를 다져놓은 것이다. 지금부터 6,000년전쯤이 되자 이집트는 주민의 생업과 정치, 종교, 문화적 정서가 서로 다른 두 지역으로 구분 되었는데 나일 삼각주의 하(下) 이집트와 상류지방인 상(上) 이집트가 그것이다. 상이집트는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이용할 만한 토지가 점차 줄어들고 생산성도 떨어져 가는 나일 강변의 좁고 긴 지역이고, 하이집트는 오늘날 카이로 북부에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있는 인구가 밀집된 풍요로운 땅으로, 다른 이민족들과의 교역과 교류가 육지와 바다를 통해 활발히 이루어지던 지역이었다.

5 2. 고대 이집트 : 파라오들의 시대 1) 초기왕조시대 (기원전 3000-2780년경)
1,000여년에 걸쳐 끊임없이 적대하고 경쟁하던 상,하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 무렵 상이집트의 나르메르라는 왕에 의해 최초로 통일되고 수도는 상,하 이집트의 중간 지점인 멤피스에 건설되었다. 이집트 민족의 통합과 이집트 문명의 비약적 발전의 계기가 되었고, 이집트 고대사의 시발점이 된 나르메르의 통일은 히에라 콘폴리스에서 출토된 '나르메르 팔레트'라는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다. (호루스 밑에 꿇어 앉아 있는 하이집트 왕이 나르메르왕에게 항복하는 모습) ※2,700년쯤 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년)의 신관(神官) 마네토는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파라오(군주,왕) 들의 계보에 따라 모두 30개의 왕조로 나누어 서술하였는데, 마네토의 서술은 그가 메네스라는 이름으로 부른 나르메르의 상,하이집트 통일에서 시작하여 이집트 출신의 마지막 파라오 넥타네보2세의 죽음 (기원전 343년)으로 끝을 맺는다.

6 2) 고왕국시대(BC2780-2270)와 제 1중간기(BC2263-2040)
고왕국시대는 마네토의 제3-6왕조에 해당된다. 제3왕조의 2대 군주 죠세르는 이집트 왕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피라미드를 건설한 군주로도 유명하다. 조세르 치하의 재상이며, 제사장이고, 의사이며, 사상가이자 건축가인 임호텝이 조세르의 무덤으로 고안해 사카라에 건설한 '계단식 피라미드' 는 세계 최초의 대규모 석조 건축물로서 파라오의 절대권력과 조직화된 국력을 짐작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임호텝은 훗날 '치료의 신'으로 추앙받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서기관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피라미드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제4왕조 (BC )에서 나타난다. 제4왕조의 초대 왕은 스네프루였는데, 그의 후계자 쿠푸가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대 피라미드를 기자 지방에 세운 것이다. 평균 2,300kg 짜리 돌 2백30만개가 들어간 이 공사는 고대 이집트 인들의 건축 기술, 측량과 설계의 정확함, 국가 동원 체제, 기획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쿠푸의 아들 카프레가 세운 피라미드도 아버지의 것 못지 않으나 그는 '계곡신전'에 있는 스핑크스로 더 유명하다. 왕릉 단지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스핑크스의 얼굴은 카프라의 것이라고 한다. 멘카우레의 피라미드도 똑같이 유명하다. 이 두 피라미드는 대 피라미드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그 옆에 서 있다. 제4왕조는 고대 이집트왕국이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으며, 사람인 동시에 신(神)이기도 했던 왕과 그의 왕권이 문자 그대로 절대적이었던 시기였다. 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의 아들 우세르카프가 세운 제5왕조 (BC )에 와서는 태양신 숭배가 절정에 이른다. 오시리스 신을 대신하여 태양신 ‘라’가 최고신이 되었고, 군주들은 태양신의 아들임을 자처했으며, 태양신을 위한 신전이 건축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집트 신화에서 태양신 라는 때로는 오시리스 신과 동일시되기도 하며, 때로는 호루스 신과 합성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태양신 라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은 호루스 신과 같이 매의 얼굴을 한 사람이 머리에 태양을 얹고 있는 형상이며, 태양은 뱀이 둥글게 한번 몸을 튼 모습으로 표현된다. 제5왕조 파라오들의 피라미드 벽화에는 이집트 인들이 시리아, 누비아 등지에서 벌인 원정 사업이 그려져 있으며, 이러한 업적은 '팔레르모 스톤(Palermo Stone)' 같은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제5왕조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군주의 절대 권력은 제6왕조 (BC ) 때 완전히 약화되고, 이후 이집트는 폭력과 내전이 계속되는 혼란한 제7∼10왕조의 제1중간기를 겪게 된다. 카프레 멘카우레 쿠푸

7 3) 중왕국 시대(BC2133-1785)와 제 2중간기(BC1785-1575)
상이집트 총독으로서 이러한 원정 사업의 책임자였던 재상 아메네메트가 제12왕조를 연다. 이 왕조시대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기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아메네메트는 아문을 수호신으로 하는 테베 출신이었으나 이집트 전역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멤피스 남쪽에 새로운 도시 이트즈-토위 ('두 땅을 쥔'이라는 뜻)를 건설하고 천도했다. 그리고 근처에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누비아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나일 제2폭포' 지역에 요새를 건설했으며, 아시아인들의 델타 지역 침입을 막기 위해 와디 툼밀라트에 '통치자의 성' 이라는 요새를 세웠다. 그의 후계자들도 신석기시대 농경문화의 발상지인 파이윰 지방을 재확보하는 등 이집트 번영에 박차를 가했다. 이집트 역사의 황금기라고 하는 세소스트리스3세와 아메네메트3세의 재위기간은 평화와 안정의 시기였으며, 신인 동시에 인간이었던 군주들이 인간쪽에 더 가까워진 시기였다. 제12왕조 초기부터 번영하는 이집트는 외국인들, 주로 아시아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으며, 통상과 외교의 확대로 이집트에 외래문화와 사상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세소스트리스3세와 아메네메트3세의 황금기에 이어 아메네메트4세와 세벤크네프루 여왕 통치기에도 아시아 인들이 기회의 나라 이집트로 몰려와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하여 이집트 문화와 사회발전에 기여하면서 자신들의 입지와 세력을 강화했다. 여러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제12왕조 말부터 점차 국가의 통제권이 약화되고, 나라가 분열되면서 여러 대 전부터 이집트 땅에 들어와 정착한 아시아계 외국인들이 제16왕조와 제17왕조 시기에는 이집트를 지배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들을 힉소스(이민족 통치자들)라고 부른다. 아시아인들의 지배는 이집트에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는 전기가 되었다. 새로운 악기와 음악 양식, 청동 세공술에서 도자기 제조, 직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품종의 동물과 곡식이 도입된다. 전쟁에는 새로운 유형의 무기와 아울러 전차와 말이 등장하였다. 제13왕조 때부터 힉소스 지배가 끝날 때까지의 혼돈기가 제2중간기 (BC ) 이다.

8 4) 신왕국시대(BC1575-1085)와 제 3중간기(BC1085-664)
제18왕조(기원전 년)는 이민족 힉소스의 지배를 벗어 던지기 위해 여러 대에 걸쳐 투쟁하던 테베의 왕가 출신 아흐모세가 열었다. 아흐모세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아문 신의 아내'라는 칭호를 가진 친누이 노프레타리와 결혼하였는데 이러한 친오누이 간의 결혼은 신과 여신의 결혼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중왕국시대부터 상실되기 시작한 왕의 신성성을 회복하려는 고도의 정치 행위였다. 아흐모스는 힉소스의 세력을 델타 지역에서 소탕하고 상,하이집트를 재통일하였으며, 이집트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멘호텝1세는 이집트 국경을 남쪽의 제3폭포까지 확대했다. 제18왕조의 4대 군주 투트모세2세의 왕비 하셉수트는 그녀의 남편이 후궁에게서 낳은 투트모세3세가 겨우 열 살의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섭정을 하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녀는 회화나 조각에서는 남자의 복장을 하고 수염을 단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문헌에서는 그녀를 가리키는데 여성형 인칭대명사가 사용되고 있다. 그녀의 집권 기간 중 이집트는 대체로 평화로웠으나 통치영역이 크게 축소되었다. 그녀가 죽은 뒤 투트모세3세는 스스로 이끈 여러 차례의 원정에서 승리하면서 이집트의 옛 땅을 수복하고 아시아 지역을 편입하여 '나일 제4폭포'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이집트의 정치 세력은 아멘호텝3세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그는 황금의 호루스, 진리의 통치자, 상,하이집트의 왕, 라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아멘호텝4세는 이집트의 모든 왕들 중 가장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테베의 수호신 아문을 버리고 역사상 최초로 유일신 개념을 확립한 종교 개혁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5년 되는 해에 자신의 이름을 태양신의 숭배를 뜻하는 아케나텐('아텐에게 봉사하는'이란 뜻) 으로 바꾸고, 태양신의 구체적인 형상인 아텐(태양판)을 유일한 존재로 숭배하고, 아텐에게 바치는 수많은 신전을 지었다. 그는 수도를 중부 이집트의 알아마르나로 옮기고 신도시 아케타텐(아텐의 지평선)을 건설하였다. 신왕국시대에 누렸던 영화는 1922년 발굴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왕들의 골짜기'에서 출토된 화려한 부장품들, 그 중에서도 파라오 시신의 얼굴 덮개인 '투탕카멘 왕의 황금 가면' 등으로 잘 확인된다. 9살에 왕위를 계승한 소년왕 투탕카멘은 즉위 3년째되는 해에 죽고, 그 뒤 왕권은 아이, 호렘헵을 거쳐 재상이자 장군이었던 람세스의 가문으로 넘어간다. 19왕조(BC )는 람세스1세부터 시작한다. 그의 뒤를 이은 세티1세는 훌륭한 군사 지도자로 아시아의 지배자가 된 히타이트 왕국을 무력으로 제압하였고, 나일 삼각주로 들어오려는 리비아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처하였다. 3대 군주 람세스2세는 66년 간이나 이집트를 다스린 위대한 왕이다. 평화 조약과 혼인 동맹을 맺는 등 히타이트 족과의 오랜 적대 관계를 청산하는데 성공했다. 성경의 출애굽기에 나오는 파라오가 람세스 2세이다. 뒤를 이은 그의 13째 아들 메르네프타는 유대 민족이 이집트에서 대탈출 (출애굽) 할 당시의 군주로 추정되고 있다. 메르네프타의 전승기념비에 있는 '이스라엘은 황량하며, 씨 뿌릴 땅이 없다'는 대목은 이스라엘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문헌자료다. 제20왕조(BC )에는 바다민족의 침입이 있었으나 격퇴하였고 평화 시대가 유지되었다. 왕권이 몰락하고 사제들이 정치를 농단하고 외세의 침입을 받는 제21∼25왕조(BC1009∼664)가 이어진다. 제3중간기라고 불리는 이 혼돈과 좌절의 시기에는 리비아계 군주들이 통치하고, 누비아인들이 상이집트 전역과 중이집트의 멤피스까지 약탈하며, 이디오피아 군주들과 앗시리아 의 지배를 받게 된다.

9 3. 고대 이집트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 1) 마케도니아의 정복
BC332 가을, 페르시아군을 수 차례 무찌른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마케도니아군과 그리스군을 이끌고 이집트를 침략했다. 이때 이집트인들은 페르시아의 억압 통치를 벗어 준 알렉산드로스를 해방자로 환영 했고 결국 별다른 전투도 하지 않고 이 나라를 차지했다. 그는 리비아 사막에 있는 시와 오아시스까지 가서 그리스 세계에 명성이 자자한 아몬 신탁을 방문했다. 이 신탁은 알렉산드로스가 아몬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내렸다. 2)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305~30) BC323에 알렉산드로스가 바벨론에서 죽자 제국은 여러 장군들의 분할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중에 이집트 총독인 사트라프의 지위를 가진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인 프톨레마이오스가 BC305에 프톨레마이오스1세 소테르로 즉위했다. 그의 치세에 대한 비문은 페르시아인들한테서 땅을 빼앗은 그의 업적을 강조하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후손들은 BC30에 클레오파트라 7세가 죽을 때까지 이집트를 다스렸다. 이집트는 가장 부유했고, 그 후 300년 동안 거의 내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장 강력한 나라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꾸준히 그리스화하고 있는 지중해 세계와 관계를 확고히 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성장과 그 중요성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왕조의 가진 마케도니아-그리스적 성격은 지속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BC331에 알렉산드리아 대왕이 나일 삼각주 북서쪽에 있는 라코티스라는 작은 이집트 마을을 없애고 그 자리에 세운 도시였다. 이 도시는 4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이 건설될 때까지 지중해 동부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이집트 왕국의 수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지 몇 년 뒤에 멤피스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졌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가장 번영했던 시대는 초기의 160년 동안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프톨레마이오스2세 필라델포스(BC285~246 재위) 때의 문헌적·금석학적·고고학적 증거를 보면, 이 왕국의 행정과 경제가 철저한 개편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는 또한 농업에서 중요한 혁신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농작물이 도입되었고 광범위한 관개 사업으로 새로운 경작지가 많이 생겨났다. 프톨레마이오스2세 필라델포스, 프톨레마이오스3세 에우에르게테스(BC246~222 재위), 프톨레마이오스4세 필로파토르(BC 222~205)가 왕위를 물려 받았다. 필로파토르의 죽음과 젊은 프톨레마이우스5세 에피파네스(BC205~180 재위)의 즉위를 둘러싼 사건은 궁정의 음모 때문에 진상을 알기 어렵지만 에피파네스가 왕위에 오른 뒤 10년 동안 남부에서 이집트인들의 반란이 일어나 왕국의 중요한 부분에 대한 왕의 지배력은 약해졌고, 왕을 자칭하는 사람이 잇따라 나타났다. BC196년경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집트 외부에 있는 영토의 대부분을 계속 잃어버렸다. 프톨레마이오스6세 필로메토르(BC180~45 재위) 시대에 시리아의 안티오코스4세가 이집트를 침략했다. BC168에 그는 멤피스에서 대관식을 올리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인물을 이집트 총독에 앉혔지만 BC168 여름 로마의 특사 포필리우스 라이나스가 이집트에서 철수하라고 안티오코스에게 요구했다. 7월말에 안티오코스는 이집트를 떠났다. 프톨레마이오스6세 필로메토르와 그의 동생(프톨레마이오스8세 에우에르게테스 피스콘)의 경쟁은 로마의 중재에 따라 피스콘이 키레네로 감으로써 해결되었다. 피스콘은 BC145 필로메토르가 죽은 후 BC116까지 누이인 클레오파트라2세 및 클레오파트라2세의 딸인 클레오파트라3세와 함께 이집트를 다스렸다. 그리스인들은 그를 폭군이라 하여 싫어했고, 그의 치세에 대한 역사 기술은 그와 알렉산드리아 주민들의 험악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1세기 동안 이집트는 로마의 보호를 받아 독립을 유지했다. 이집트의 독립은 순전히 로마의 뜻에 달려 있었다. 이 시기에 로마는 로마의 이익이나 안전을 위협하겠다는 야망도 전혀 없는 왕조를 지원하는데 대체로 만족하고 있었다.

10 3. 고대 이집트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 3) 로마의 지배
왕이 잇달아 바뀌는 불안정한 시대가 계속된 뒤, BC80에 프톨레마이오스12세 아울레테스가 왕위에 올라 30년 동안 지배했다. 죽기 전 해인 BC52에 아울레테스는 딸 클레오파트라7세 및 맏아들 프톨레마이오스13세(BC47 죽음)에게 공동왕위를 넘겼다. 클레오파트라는 적극적이고 보기 드물게 유능한 여왕으로, 로마와 손을 잡고 영향력을 키움으로써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명성을 되살리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BC48에 이집트까지 폼페이우스를 추격해 왔을 때 로마와 관계를 개선할 기회가 왔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살해당한 것을 알았으나 이집트에 머물면서 BC47에 여왕과 함께 나일 강을 유람하며 관광을 즐겼다. 그가 로마로 떠날 때 클레오파트라는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 아이가 카이사르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카이사리온('작은 카이사르')이라고 이름 지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 후 카이사리온을 데리고 카이사르를 뒤따라 로마로 갔지만 BC44에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아들과 함께 이집트로 돌아왔고 얼마 동안 로마제국의 내전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애썼다. 클레오파트라는 BC41 타르수스에 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찾아가 동맹을 맺고 그와 함께 이집트로 돌아왔다. 안토니우스의 정적인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장군과 동양 여왕의 유명한 연애사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했다. BC34 카이사리온은 공식적으로 클레오파트라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지만 그를 공동 통치자로 삼은 것은 죽은 카이사르의 계승자 임을 알리려는 책략임이 분명했다. 내전은 BC31 9월 그리스 서부의 악티움에서 벌어진 해전으로 판가름 났다.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함대가 퇴각했고, 안토니우스도 결국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로 달아났지만 전세를 뒤집을 수 없었고 10개월 뒤 승기를 잡은 옥타비아누스가 도착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BC30 8월에 자살했다. 안토니우스는 칼 위에 쓰러져 죽었고 클레오파트라는 독사에게 물려 죽은 것으로 보인다. 옥타비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자 그 도시에 보존되어 있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해를 참배했다.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클레오파트라의 죽음과 함께 끝난 것으로 간주된다.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뒤에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이런 상태는 4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속주를 다스린 총독은 로마 황제가 직접 임명 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AD330에 수도를 그리스 도시인 비잔티움으로 옮김으로 비잔틴 제국이 긴 역사를 시작하였다.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이 바뀐 새 도시는 동방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로 성장했으나 알렉산드리아는 비잔틴 제국의 중요한 거점 도시로 남아있었다.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이집트인들은 대다수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으며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티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에는 총대주교가 임명되었다. 비잔틴 제국이 쇠락해가고 아라비아 반도에서 새로운 종교 이슬람이 제국을 확장해 가는 중에 AD642에 2대 칼리프 오마르가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이집트를 정복했다.

11 4. 이슬람교 시대 1) 정통칼리프 시대 (正統caliph時代; AD632∼661)
2) 우마이야조(Umayyad dynasty; AD661∼750) 무아위야 1세가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하여 세운 이슬람 칼리프조이다. 우마이야조의 제1대 칼리프 무아위야(AD )는 선출로 칼리프를 뽑는 전통을 무시하고 아들 야지드(Yazid)에게 칼리프위를 세습했다. 이로서 칼리프제는 선출에 의해 지도자를 뽑던 전통적 관행을 깨고 세습제로 전환되었다. 그는 또 군사조직도 비잔틴 양식에 따른 새 편제로 바꾸고 강력한 중앙정권의 수립하면서 제국의 영토확장을 계속하였다. 우마이야조는 제5대 칼리프 압둘 말리크와 그의 아들인 왈리드 1세( )때에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지방부터 북아프리카 서쪽까지 점령하였다. 711년에는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스페인 전역을 지배하였다. 3) 아바스조 (Abbasids dynasty; AD750∼1258) 우마이야조의 마지막 칼리프 마르완 2세(Marwan b. Muhammad II: 744~749)때에 칼리프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계(하심 가문)에서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하쉬미야(Hashimiyya)파가 반란을 일으켰다. 하쉬미야 가문의 일원인 아바스가(마호메트의 숙부 알 아바스의 후손)의 이브라힘(Ibrahim)은 745년부터 호라산을 중심으로 세력을 모아 747년 마침내 호라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749년 사파흐가 쿠파에서 칼리프임을 선언하고 이듬해 우마이야조 최후의 칼리프를 피살함으로서 아바스조를 정식으로 성립했다. 제5대 칼리프인 하룬 알라시드(786∼809)와 그의 아들 알 마아문(813~817) 시대는 아바스조의 전성기였다. 칼리프 알 무으타심(833~842)시대 부터 맘루크라 부르던 터키 노예 용병들을 궁성의 경호원으로 고용하기 시작하였다.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간의 갈등과 맘루크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사용하면서 아바스조는 쇠퇴하게 된다. 861년부터 아바스조 칼리프는 맘루크에 의해 좌우되었다. 맘루크들이 권력을 가지면서 제국 전역에서는 사실상의 여러 독립왕조가 생겨났다. 파티마조(909~1171), 페르시아계 시아파 부와이흐조(945~1055), 후우마야조 등으로 제국이 나뉘면서 칼리프는 그 명맥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11세기 전반에 이르자 파티마조, 부와이흐조의 세력이 쇠퇴하고, 셀주크가 1055년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아바스조의 통치권을 장악했다. 셀주크투르크(1038~1194)는 칼리프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대신 세속통치의 절대권력을 의미하는 술탄 칭호를 사용했으며, 칼리프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셀주크가 세력을 잃은 13세기 초 아바스조의 칼리프는 독립할 수 있었으나 1258년 칭기즈칸의 손자 훌라구(Hulagu: )가 바그다드를 점령하면서 마지막 칼리프 알 무스타심이 살해당하고 칼리프제(制)는 완전히 몰락하였다. 훌라구의 일한국( )은 약90여년간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통치하였다.

12 4. 이슬람교 시대 4) 파티마파티마왕조(Fatima; 909-1171)
시아파 이슬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 성향의 독립왕조로서, 당시 아바스제국에서 독립한 군소 왕조 중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위이자 사촌인 알리의 후손만이 이슬람 공동체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인 칼리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이드 빈 후세인(Said ibn Husayn: ? ~ 934)은 자신이 이맘 이스마일의 직계 후손임을 주장하며, 909년에 북아프리카를 차지하고 있던 아글라브 왕조( )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이슬람 왕조를 세웠다. 그리고 왕조의 이름을 예언자 무하마드의 딸이자 칼리프 알리의 부인이었던 파티마의 이름에서 따왔다. 파티마왕조는 아바스제국의 영토를 계속 공격했으며,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아바스제국의 제4대 칼리프 알 무이즈 집권기에 이집트가 극심한 기근으로 약화된 것을 기회로 이집트를 차지하게 되었다. 파티마왕조는 이집트를 정복한 뒤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 도시 알-카히라(현재 카이로)를 세웠으며 972년에 알-아즈하르 사원을 세웠는데 오늘날까지도 이슬람 신앙과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파티마왕조의 세력은 11세기 이후 계속된 십자군 전쟁에 의해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아스칼란, 아크레, 하이파 등을 점령당하면서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파티마왕조는 십자군 전쟁의 영웅인 누르 알-딘과 살라흐 알-딘(살라딘)에 의해 1168년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1171년 마지막 칼리프가 사망하며 왕조가 끝나게 된다. 5) 아이유브왕조 (AD1169∼1250) 살라흐 알-딘(살라딘)이 건설한 이집트의 이슬람 왕조이다. 십자군의 공격으로 1163년에 파티마조의 원조 요청이 오자 시리아의 투르크 사령관 누르 알-딘은 쉬르쿠흐를 이집트로 파견했다. 쉬르쿠흐는 1169년 파티마조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두 달 뒤 사망하고, 그 자리는 조카 살리흐 알-딘이 계승하게 되었다. 정통 수니파 무슬림이었던 살라흐 알-딘은 이집트 지역에 파티마조의 시아파 대신에 수니파를 부활시켰다. 1175년 살리흐 알-딘은 아바스조의 칼리프 알-무스타디에게 서한을 보내 이집트, 북아프리카, 예멘, 시리아의 영토에 대한 서임 증서와 술탄의 칭호를 받았다. 1187년 7월 4일 하틴 전투에서 루지냥의 기(Guy of Lusignan)와 예루살렘 왕 트리폴리의 레이몬드 3세 연합군의 십자군 부대를 괴멸시켰다. 살라딘은 88년간 십자군 도시였던 예루살렘을 1187년 10월 2일 협상을 통해 접수한다. 1193년 3월 4일, 살라딘은 다마스커스에서 눈을 감았다. 현재 그의 무덤은 시리아 다마스커스의 우마야드 모스크(Umayyad Mosque) 북서쪽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다. 살라딘이 죽자 그 영토는 일족들에 의해 이집트·다마스쿠스·알레포·하마단 등으로 분할되었으며, 이집트·다마스쿠스는 살라흐 알-딘의 아우 아딜에게 귀속되었다. 그러나 1250년 이집트의 지배권은 군대를 가지고 있던 맘루크에게 들어갔으며 1258년 몽고의 훌라구가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이어서 훌라구의 장군 키트부카가 다마스커스를 점령함으로 아이유브 왕조는 완전히 사라진다. 6) 맘루크왕조(Mamluk dynasty; AD ) 군사를 담당했던 노예, 맘루크가 세운 왕조로 13~16세기에 걸친 약 250년 간 이집트 지역에 성립되었던 왕조이다. 아이유브조(AD ) 말기 술탄 알-말리크 알-살리흐 아이유브(Al-Malik al-Salih Ayyub, )는 터키계 맘루크 병사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용하여 기독교도가 장악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재탈환(1228년 6차 십자군과의 협상으로 예루살렘을 양도한 상태였다)하였는데 이 맘루크들이 군대를 장악하고 이집트를 자치하였다. 맘루크 왕조 초기에는 노예가 이집트 지역의 술탄이 된 데에 저항이 있었으나 몽고의 장군 키트부카에 대항하여 아인 잘루트 전투(the Battle of Ain Jalut, AD1260)를 승리하고, 아바스조 칼리프 부활이라는 공적에 의해 차츰 이슬람 사회에 수용되어 갔다. 맘루크 왕조는 일반적으로 주요 정파들이 권력 쟁탈을 벌이고 그 중 승리한 정파의 지도자가 술탄의 자리에 올랐다. 이는 매우 불안정한 제도처럼 보였으나 250년 이상 지속되었는데, 그 이유로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정권을 잡은 자가 잔인하고 무자비한 동시에 뛰어난 통치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맘루크 왕조는 크게 두 기간으로 나뉘는데, 전반부는 알-바흐리조 (Al-Bahri, AD )로서 터키계가 주를 이루었다. 후반부는 알 부르지조 (Al-Burj, )로서 시르케시계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그리스 계열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맘루크 왕조 말기 1492년 치명적인 페스트가 이집트에 창궐하고 과도한 세금 징수로 불만이 높아졌으며, 1497년 아프리카 희망봉을 경유하는 신항로 개척으로 인도양의 해상권을 빼았겼으며, 1509년에는 기존에 맘루크 왕조가 갖고 있던 중계무역의 이권도 빼앗겨 경제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결국 맘루크 왕조는 1516년 오스만의 술탄 셀림 1세의 공격을 받아 마지막 술탄 투만 베이(Tuman Bey, 1517년 4월 13일 사망)가 처형되었고, 그가 죽기 전 1517년 1월 22일 맘루크 왕조는 공식적으로 끝나게 되었다.

13 4. 이슬람교 시대 7) 오스만 제국 (AD ) 오스만 가문을 왕가로 한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現 터키의 최대 도시인 이스탄불을 만들고 수도로 정하여 서쪽의 모로코부터 동쪽의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러 북쪽의 우크라이나에서 남쪽의 예멘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했던 다민족 제국이다. 1299년 오스만 1세는 아나톨리아에서 주변의 영주를 병합하여 쇠귀트에 오스만 군후국을 건국하였다. 이후 술탄들이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차례로 점령하여 나갔으면 기독교연합국의 공격을 차례로 격파하였다. 1402년 세력을 넓히던 티무르와 충돌, 앙카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심한 타격을 입기도 하였으나 티므르 사후 국력을 회복하고 1453년 메메드 2세는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여 마침내 점령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로 개명되고 수도가 되었다. 15세기 말 오스만 제국은 발칸과 아나톨리아의 거의 모든 땅을 평정하고, 흑해 북해안과 에게 해의 섬들까지 차지하였으며 1512년 셀림 1세는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켜 이집트까지 지배 영역을 확대하였다. 맘루크 왕조가 소유하고 있던 이슬람교의 2대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의 보호권마저 장악하면서 오스만의 술탄은 맘루크 왕조의 비호 아래 있던 아바스 왕조의 후예로부터 칼리프의 칭호를 양도 받아 칼리프까지 겸하게 된다. 그러나 18세기부터는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땅을 되찾는 한편, 아랍인을 비롯한 피지배 민족들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1829년에는 그리스가 왕국으로 독립하고, 국토가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침략을 받는다. 압둘 하미드 2세( ) 의 통치 기간 동안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가 독립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역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영토가 된다.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와 함께 동맹국으로 참전하였다가 패전국이 됨으로써 세브르 조약의 결과, 1914년 현 터키의 영토 외 대부분을 상실했다. 1922년 메메드 6세가 폐위되고 1924년 압둘 메지드 2세도 칼리프제가 폐지됨에 따라 프랑스로 망명하였다. 1923년 케말 아타튀르크를 비롯한 군인들이 혁명을 주도하여 지금의 터키 공화국이 세워지고 케말 아타튀르크가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4 6. 식민지시대와 독립이후 1) 영국의 보호국 (1917~1922)
오스만 제국은 18세기부터 밖으로는 유럽 열강들의 침략을 받았고, 러시아의 남하로 세력이 위축되었다. 1798년말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점령하면서 프랑스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아 민족 의식이 고양되었다 년 프랑스 군대가 철수하자, 오스만 제국은 무함마드 알리를 총독으로 임명하여 자치권을 주고 이집트를 다스리게 하였다 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그리스가 독립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둘러싼 서구 열강의 싸움이 더욱 격렬해졌다. 1869년 수에즈운하가 완공되었으나 지나친 외채로 영국과 프랑스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1880년 정부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자 영국은 1882년 군대를 파병하여 진압하고 이집트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이 영국군은 1956년까지 주둔하게 된다. 1914년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만제국은 영국이 적대국이 대고 영국은 이집트를 오스만제국에서 독립시키고 보호국으로 삼는다. 1922년 전쟁이 끝난 후 이집트인의 거국적인 독립요구가 일어나자 영국은 조건부로 이집트의 독립을 허용하게 되었다. 이집트는 1923년 총선을 통해 입헌군주국으로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공용어 : 아랍어 정부 형태 : 군정 하의 공화국 수도 : 카이로(Cairo) 독립 : • 왕국 독립 1922년 2월 28일 (영국으로 부터) • 공화국 선포 1953년 6월 18일 면적 : 1,002,450 ㎢ (30위) 인구 : (2010년) 79,089,650명 GDP (PPP) : • 전체 $4,966억 6,040만 • 일인당 $6,347 통화 : 파운드 (ISO 4217: E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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