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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강 정교분리원칙 (라이시테 LAÏCITÉ)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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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8강 정교분리원칙 (라이시테 LAÏCITÉ)에 대해서
현대 프랑스의 갈등과 통합 제8강 정교분리원칙 (라이시테 LAÏCITÉ)에 대해서 서강대학교 전종호교수

2 강의 개요 정교분리원칙은 프랑스 공화국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프랑스의 공립학교에서 모든 '공공연한 종교적 징표'들을 금하는 2004년 법은 프랑스 사람들 사이에서의 열띤 토론 뿐 아니라 외국 언론에서도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프랑스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랑스공화국의 원칙인 ‘라이시테’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3 라이시테란? “프랑스는 정교분리원칙(라이시테)을 중심으로 세워졌다. (...). 정교분리원칙은 세 가지 분리 불가능한 가치관에 기초를 두고 있다. 신앙의 자유, 정신적, 종교적 선택권의 평등, 정치권력의 중립성.” ( 월, 정교분리원칙에 대한 Stasi 위원회 보고서) “프랑스 공화국은 하나이며 나눌 수 없다.” (1793년 헌법 제 1조) “프랑스 공화국은 민주적이고 하나이며 나눌 수 없다.” (1848년 헌법 제 1조) “프랑스 공화국은 하나의 나눌 수 없고 정교분리적이며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공화국이다. La France est une République indivisible, laïque, démocratique et sociale” (1946년 헌법 제 1조)

4 라이시테란? 라이시테 LAÏCITÉ ‘백성에게 속한 것’이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laikos’에서 발생한 단어로, 종교적인 의미로는 성직자가 아닌 것, 형용사 laïque(평신도의, 속인의, 종교와 무관한)는 religieux(종교인의, 종교적인) 와 대비되어 인식됨 기독교 공동체는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음. 이는 프랑스 제3공화국 때 만들어진 일종의 신조어로 ‘국가의 정치제도에 대한 비종교화’를 뜻함. 국가가 어떠한 국교를 인정하지 않고 어떤 종교에도 공식적인 지원을 하지 않는 것. 이를 ‘정교분리원칙’, ‘세속적인 것’, ‘국가세속주의’ 등으로 번역하나 적절한 번역어는 없음 이는 ‘정치적인 것’에 ‘종교적인 것’의 어떠한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으려는 프랑스인의 의지가 반영된 것임. 즉 종교기관을 정치권력과 구분하는 동시에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는 하나의 원칙임. 또 이는 양심의 자유를 확인하고 종교, 무신론, 불가지론, 자유사상 등 다른 견해들 위에 그 어떤 견해도 위치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

5 라이시테란? 정교분리원칙은 프랑스의 특성은 아니다. 모든 민주 국가에서는 오늘날 정치와 교회를 분리하고, 적어도 국가의 중립성이 사회의 속화의 한 형태와 연합하면서. 그러나 프랑스는 정치권과 권력의 상징체계에서 모든 종교적 기준을 배제시킨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다. 또 하나 특별한 것은 정교분리원칙이 공화국 법의 근간이고 프랑스의 정체성의 한 요소처럼 여겨지는 것, 그리고 학교 문제와 항상 밀접하게 연결되어왔다는 점이다.

6 라이시테란? 프랑스의 정교분리원칙의 개념을 법적으로 세운 것은 1905년 12월의 정교분리법이다. 이 법은 약간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행법이다. 또한 이 법은 "공화국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종교의식을 자유롭게 행할 것을 보장한다"고 정한다. 다른 한편, "공화국은 어떠한 종교의식도 인정하거나 급여를 주거나 보조금을 지원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정교분리원칙(라이시테)이라는 용어는 텍스트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고, 1946년이 되어서야 헌법의 한 원칙이 된다.

7 라이시테란? "공화국은 분할할 수 없고(불가분하고) 정교분리적이며 민주적이고 사회적이다. 공화국은 법 앞에서 모든 시민의 평등을 보장한다. 출신, 인종이나 종교의 구분 없이. 공화국은 모든 신앙을 존중한다." (제 5공화국 헌법 1조) 1905년의 법과 함께 정교분리적인 국가가 무신론을 장려하려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인권선언문(1789년) 10조에서 이미 인정된 권리인 모든 사람의 신앙의 자유를 보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분명히 구분했다. 종교는 사적 영역에 속해 있어야 했고 중립성은 공적 영역(국가에 속하는 장소들)에 부과되어야 했다. 그 첫 번째 장소가 지식과 이성을 전달하는 곳인 학교다. 학생들을 '반계몽주의'와 가정의 잠재적인 압박에서 떼어놓기 위해 종교를 학교 밖에 두어야 했다.

8 정교분리원칙은 종교와 정치가 그 어느 곳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역사를 가진 프랑스가 만들어낸 산물임
II. 프랑스의 가톨릭 전통과 정치 정교분리원칙은 종교와 정치가 그 어느 곳보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역사를 가진 프랑스가 만들어낸 산물임

9 1. 가톨릭과 왕정 La fille ainée de l'église - 교회의 맏딸
- 프랑스는 496년 프랑크족 국왕 클로비스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렝스에서 세례를 받은 이후 공식적으로 가톨릭국가가 됨, ‘로마 가톨릭교회의 맏딸’이라는 것은 여기서 연유함 - 800년 에는 샤를마뉴 대제가 교황에 의해 왕관을 수여받으며 왕권신수설의 기초를 놓게 됨 로마에서 제관 수여 장면

10 1. 가톨릭과 왕정 Les roi Très-Chrétiens - 매우 기독교적인 왕
- 11세기 이후 카페왕조의 왕들은 신의 은총을 받은 통치자 뿐 아니라 신이 선택한 자들이었음 - 다른 봉건 제후들이 모방할 수 없었던 이 특징은 프랑스국왕에게 신성한 정통성을 부여하였고 이로 인해 프랑스는 ‘가장 강력한 기독교국왕’이 통치하는 ‘가장 기독교적인 민족(프랑크족)’이라는 생각 하에 하나의 단일체로 발전해 나갈 수 있게 됨

11 1. 가톨릭과 왕정 Gallicanisme 프랑스교외 독립주의
- 프랑스는 한편 기독교 국가로서 정체성을 확립해 가면서 로마 교황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려 했다. 미남왕 필립4세는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 로마교황과 직접적으로 충돌함, 그는 1305년 프랑스인을 교황으로 선출하도록 압력을 행사해서 그를 아비뇽에 거주하게 함. 이는 1370년 까지 계속되었다. - 하지만 군주정과 교회는 서로 지원하며 권력과 영향력을 나눔, 교회는 이 시기 출생, 결혼, 사망과 관련된 행정업무와 교육 등 사회적인 기능을 관장함 미남왕 필립4세

12 1. 가톨릭과 왕정 “Paris vaut bien une messe - 파리는 미사를 거행할 만한 가치가 있다” (앙리4세)
이러한 ‘하나의 믿음, 하나의 국왕’ 즉 가톨릭국가라는 프랑스의 전통은 16세기 종교개혁과 종교전쟁으로 흔들리기 시작함 1598년 낭트칙령으로 프랑스의 위그노(신교도)들은 종교의 자유와 시민으로 권리를 회복했으나 신교는 쇠락함 - 특히 루이 13세 이후의 ‘역종교개혁 Contre Réforme’ 운동과 1685년 루이 14세에 의한 ‘낭트칙령의 철회’는 신교의 종교 활동을 금지시킴으로 약 20만명의 위그노들이 영국,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로 망명. 이후 프랑에서 신교는 법적으로 존재하지 못함

13 2. 공화정과 교회 18세기 계몽주의자들은 철학적인 입장에서 종교 그 자체를 문제 삼음
계몽주의의 전파는 무신앙과 무신론이 프랑스에 퍼지게 함. 이는 반 교권주의와 연결됨 프랑스 대혁명의 주도자들은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국가 전체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교회의 재산을 국유와 함. 그리고 성직자의 신분을 국가의 봉급을 받는 세속관리로 만드는 법을 가결시킴 1801년 나폴레옹 1세에 의한 ‘화친조약 (콩코르다 Concordat)’으로 ‘대다수 프랑스인의 종교’로 가톨릭에 대한 입지 회복

14 2. 공화정과 교회 나폴레옹 루이 18세 루이 필립 나폴레옹 3세 페텡 1792년에서 1945년 사이 프랑스 공화정의 역사는 대체로 반 교권적이었으며, 반면 제1제정(나폴레옹), 왕정복고(루이 18세, 샤를르 10세), 7월 왕정(루이 필립), 제2제정(나폴레옹 3세) 그리고 20세기의 비시정부(페텡)는 교회에 우호적이었음 이러한 정황에서 교회는 1945년까지 정치적인 우파와 동일 시 됨. 1890년 교황이 프랑스 가톨릭 신자들에게 공화정을 지지할 것을 공식적으로 권고하였으나 이 시기 프랑스에서 군주제는 완전히 사라졌음

15 3. 가톨릭 이념의 변화 그러나 보편성을 내세우며 ‘총체적’인 종교를 지향했던 로마교회는 근대화에 적대적이었고 종치와 종교의 분리에 첨예하게 강등함. 반면 신교는 다양한 종파를 인정할 뿐 아니라 근대화에도 상대적으로 순조롭게 진행됨. 신교국가는 전투적인 용어인 ‘라이시테’보다는 사회에 대한 종교의 영향력의 약화를 뜻하는 ‘세속화 sécularisation’을 사용함. 즉 ‘라이시테’는 프랑스에서 종교를 대체하는 개념으로 사용된 면이 있음 제2차 바티칸공의회 ( )에서 엄숙한 대미사, 거리행진, 라틴어 사용 포기 년 좌파 이념에 동조하는 신부들이 생김. 분배와 평등, 약자에 대한 사랑이라는 가톨릭의 근본정신과 좌파의 이념이 만남 제2차 바팅칸공의회

16 III. 교육과 종교 - 앙시엥레짐의 교육 학교교육 문제의 의미심장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번 더 역사를 참조해야 한다. 앙시앙 레짐 (‘하나의 믿음, 하나의 왕’ 절대왕정) 하에서 가톨릭교회는 교육을 전담하고 있었다. 주로 개신교 신자인 아이들을 개신교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교단이 예수회였다. 프랑스대혁명 동안 콩도르세Condorcet가 공교육 개혁안을 제안했지만 혁명가들은 국가 교육제도를 세우지는 못했다.

17 III. 교육과 종교 - ‘화친조약’과 교육 나폴레옹 통치 하에 ‘화친조약’은 종교의식의 자유를 인정했지만 "사도전승의 로마 가톨릭교회가 대다수 프랑스 시민의 종교"라는 것도 인정했다. 가톨릭 신앙은 더 이상 프랑스의 공식 종교는 아니었지만 프랑스인들의 종교였던 것이다! 국가는 주교를 임명하고 사제들에게 봉급을 주었고 사제들은 당국에 충성 서약을 해야 했고. 가톨릭교리를 공립학교에서 가르쳤다.

18 III. 교육과 종교 - 19세기의 상황 학교교육 문제는 19세기 내내 (정교분리적인) 공화주의자들과 (혁명에 반대하는) 가톨릭교회를 대립시켰다. 교육부장관 쥘 페리는 종교단체들이 초등교육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는 초등교육을 의무교육, 무상교육, 정교분리교육으로 만들었다. 1880년 1881년 ~1882년 기조(Guizot)법은 종교단체가 공립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도록 허가했다. 여전히 현행법인 팔루(Falloux)법은 사립학교들이 시, 도나 국가로부터 장소와 지원금을 받는 것을 허가했다. 제 2 제정 하에서 공립학교의 선생님들은 공화정에 찬동한다고 박해를 받았다. 모든 분야에서 가톨릭교회의 간섭 의지를 종식시키려 했다. 특히 교육 분야에서. 왜냐하면 교육은 공화국 시민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장소로 여겨졌기 때문이다(선생님들은 '공화국의 검은 경기병'이었다). 1833년 1850년 제2제정 제3 공화국 종교 교육은 도덕 교육과 시민 교육으로 대체되었고 교리는 학교를 벗어나서만 (목요일 학교 쉬는 날- 한참 후에 수요일로 바뀌었다-은 아이들이 교리를 들으러 갈 수 있도록 마련되었다) 가르칠 수 있게 했다. 정교분리된 학교는 공화주의의 가치관들을 결정적으로 공고히 해야만 했다.

19 ‘정교분리법’과 교육 '두 개의 프랑스'의 전쟁은 1905년 법과 함께 절정에 달했다. 이 법은 교황이 금지령을 내렸고 수 십 년 동안 프랑스 가톨릭 신자들이 투쟁을 벌였다. ‘화친조약’을 폐지하면서 국가는 종교의식을 행하는 성직자들에게 봉급을 지급하는 것을 그만두고 1905년 이전에 세워진 종교 건물들을 국가 소유로 돌렸다. 종교의식들에 대해 말하면서 분리법은 종교적 다원주의를 법적으로 인정했다. 수세기 동안의 비관용주의를 거친 후 기독교와 유대교는 마침내 인정을 받았다.

20 ‘정교분리법’과 교육 그러나 그 당시는 이슬람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이슬람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알제리의 프랑스 행정구역들에는 많은 이슬람 신자들이 있었지만 이 법은 그 곳에서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이 법은 알자스로렌 지방에서도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지역이 프랑스 영토가 된 것은 1918년 말이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여전히 콘도르세법의 체제 하에 있었다. 주교, 목사와 랍비들은 프랑스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았고 공립학교에서는 종교 교육을 행하고 있었다. 20세기 동안 내내 학교에 대한 분쟁은 끊이지 않았다. 한편에는 공화국의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단일 교육제도를 원하는 정교분리자들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자유 학교라 불리는 사립학교의 발전을 통해 교육에서 중요한 자리를 반드시 계속 유지하려는 가톨릭교회가 있었다.

21 비시정부 비시 정부는 정교분리 선생님들에게 1940년 패배의 책임 일부를 물었다. 해방 때 비시 정부가 가톨릭 교육에 준 지원금이 폐지되었다. 1959년, 드브레 Debré법은 '국가와 계약을 맺은' 사립학교들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선생님들은 국가에게서 봉급을 받았고 그 대가로 국가 교육제도의 커리큘럼을 준수해야 했다.

22 좌파정부 1981년 좌파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논쟁이 다시 벌어졌다. 왜냐하면 미테랑의 커리큘럼은 '국립 교육의 공적이고 통일되고 정교분리된 큰 서비스'를 이룰 것을 계획했기 때문이다. 1984년, 1백만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파리 거리에서 시위를 했다. 교육부 장관 알랭 사바리가 만든 교육제도의 통일안에 대해 사립학교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10년 후인 1994년, 우파가 다시 정권을 잡아 사립학교에 준 지원금 분야를 늘리려 했을 때 정교분리자, 공립학교 지지자들이 모여 엄청난 시위를 벌였다.

23 현재의 상황 정교분리자들과 가톨릭 신자들 간의 '교육 분쟁'은 지금으로서는 진정된 듯하다. 드브레 Debré 법은 여전히 현행법이다. 국가와 계약을 맺은 가톨릭 학교들은 그들의 '고유한 성격'을 간직했지만 종교적 차별 없이 모든 학생을 받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 가톨릭 학교들은 더 이상 성직자들이 지도하지 않고 정교분리자들이 지도한다. 사립학교(가톨릭 학교가 95%)들은 15%의 비가톨릭 학생을 받는다. 그곳에 아이들을 보내는 부모들은 종교적 이유에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가까운 공립학교가 평판이 좋지 않거나 아이들이 유급을 했거나 공립학교에서보다는 사립학교에서 더 잘 교육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4 IV. 이슬람과 정교분리원칙 1989년, 크레이Creil에서 '첫 번째 스카프 사건'이 일어났다. 세 명의 이슬람 여아가 반에서 히잡을 벗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중학교에서 쫓겨났다. 학교에서 이슬람 히잡 착용은 교사들에게는 학교의 정교분리원칙에 어긋나는 것이고 남녀평등을 부인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몇 년 전부터 학교교육 문제는 이슬람의 정교분리원칙 준수로 옮겨갔다. 이슬람은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혼자 사는 이민자들의 종교였고, 그들은 차고나 지하창고에서 기도를 했다. 지금은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있는 프랑스 국적의 가족의 종교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전 세대의 은밀하고 절제된 이슬람에 비해 훨씬 더 정치 종교적으로 눈에 띄고 더 권리를 요구하는 이슬람으로 발전했다.

25 IV. 이슬람과 정교분리원칙 이런 사건들이 여러 해 동안 거듭됨으로써 2004년, 위원회가 프랑스에서의 정교분리원칙의 현실화에 대해 검토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연구 결과 Stasi 위원회는 공공의 질서와 개인의 자유에 가해지는 위협이라는 조서를 작성했다. 좀 더 명백한 법제에 의한 경고를 제안했다. 2004년 3월 15일, '정교분리원칙'에 명백하게 따르는 법을 의결했는데, 그 법은 공립학교에서 "종교적 소속을 표현하는 상징물의 착용이나 의복 착용"을 금지했다. 즉 이슬람 스카프뿐만 아니라 큰 십자가인 키파를 금지시키면서 눈에 띄지 않는 종교적 표식은 허용한다고 밝혔다. 자주 '히잡 착용 금지법'이라 불리는 이 법은 프랑스의 이슬람 신자들에게 낙인을 찍을 위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결 후 1년이 조금 지난 후, 이 법의 적용에 대한 종합 평가는 오히려 긍정적이었다. 히잡 착용은 학교에서는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소녀들의 소외를 초래했던 분쟁 사례도 제법 줄어들었다.

26 IV. 이슬람과 정교분리원칙 이슬람교는 다른 종교들처럼 국가, 즉 내무성과 대화할 자격을 갖춘 공식적인 대표가 없었다. 왜냐하면 종교의식은 내무성이 담당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교육, 문화 종교 부 ministere de l'Instruction publique, des Beaux-Arts et des Cultes가 담당했었다). 2003년 이후로 '이슬람 공동체'의 대변인이 생겼고 모스크에 다니는 프랑스무슬림평의회(CFCM)가 선출되었다. 2004년 법의 가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평의회 의원들이 인질로 잡혀 있는 프랑스인 신문기자 두 명의 석방을 요구하러 이라크에 갔다. 공화주의 가치관에 대한 그들의 지지와 프랑스식 정교분리원칙의 존중을 밝히면서. '교회의 맏딸'을 자처한 프랑스에서 정교분리법은 가톨릭 신앙의 지나친 힘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가톨릭교회가 광화국의 가치관들을 받아들이는 데 거의 1세기가 걸렸지만 이제는 끝난 일이다. 개신교와 유대교는 정교분리화 덕분에 프랑스 사회에 동화될 수 있었다. 최근까지도 이슬람의 문제는 다루어지지 않았다.

27 IV. 이슬람과 정교분리원칙 2005년 12월, 프랑스가 프랑스식 정교분리법의 100주년을 기념하는 바로 그 때 몇몇 정치인들은 완곡하게 문화적 다양성이라 불리는 것의 상황에 맞도록 이 법의 '부분적 개정'을 제안했다. 동화의 문제에 대해서처럼 정교분리원칙에 대해서도 국가가 다양한 공동체의 문화적 독립주의들을 이제부터 고려하기를 원하는 프랑스 사람들과 정교분리원칙이 하나의 보증이 되는 공화주의의 평등주의에 고수하는 사람들의 갈등이 맞서고 있다.

28 참고문헌 http://ko.fotopedia.com/items/flickr-3482120475
Baubérot, Jean, Histoire de la laïcité en France, PUF, 2000. Mauchamp, Nelly, La France d'aujourd'hui : Civilisation, Cle international, 1991. _________________, Les Français : Mentalité et comportement, Cle international, 1998. _________________, Les Français : Histoire et civilisations, Le Chevalier Bleu, 2006. 서울대학교 불어권문화연구소, 『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 강,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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