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의 리더십 (Barack Obama’s Leadership) 경영학과 1 조 [ 윤수형, 윤현산, 이의섭, 신동우, 조경민 ]
버락 오바마에 대해서
버락 오바마는 이번 대통령으로 선출되기전 상원에서 활동중이던 유일한 흑인이었습니다. 버락 오바마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파병 초기부터 줄곧 반대했습니다. “흑인 케네디”라고 불리기도 하는 오바마는 친근하면서도 카리스마가 있으며, 대중을 감동시키는 뛰어난 언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바마는 아프리카 케냐 출신인 흑인 아버지와 미국 출신의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1961년 하와이에서 출생하였고, 그가 두살되는 해에 부모가 이혼하게 되어 어머니와 살게 되었습니다. 인도네시아인 양부를 따라서 인도네시아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10대에 들어서는 어머니를 따라 미국의 조부모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참 굴곡이 심한 인생입니다.) 오바마는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였으며, 민간기업에서 근무후 철강산업의 쇠퇴로 슬럼화된 시카고에 서 교회를 기반으로 하는 시민운동가로 활동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의 낙후된 주거환경, 범죄와 실업의 증가등 지역의 문 제 해결에 노력하여 주목할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오바마는 사회 문제들의 궁극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지역적이고 일시적인 방안을 넘어서는 국가적이고 법적 인 방안의 마련이 요규된다는 판단에 따라 하버드대학교 법학대학원에 진학하여 법률을 공부하였습니다. 하버드대학에서 법률학술지인 “Harvard Law Review”의 백년이 넘는 역사상 최초의 흑인 편집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던 오바마는 졸업후 자신이 활동하던 시카고로 되돌아와 시카고대학에서 헌법학을 강의하면서 동시에 시민들의 권리를 대 변하는 인권변호사로서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오바마는 1997년에서 2004년까지 일리노이주 의원으로서 성실한 의정을 수행하였으며, 2004년에 흑인으로서는 그리고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후보로서는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미국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하여 압도적인 득표로써 당선 되었습니다.
버락 오바마에 대해서 오바마는 외교위원회 소속 상원의원으로서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방지와 아프리카에서의 기아 해결에 노력하였으며,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에 후세인 대통령의 위협이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그것을 잘못된 전쟁으로 규정하였고, 전쟁의 장기화와 엄청난 인적 물적 비용,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결과에 대해 경고한 바 있습니다. 오바마는 가난한 계층을 위해 자신의 사회운동가로서의 과거 경험을 토대로 직업훈련과 취업 알선, 자녀들의 방과 후 교육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수백만명의 가난한 미국인들이 자녀들이 아파도 병원에 데려가지 못하는 현 미국사회의 문제점과 관련하여 의료보장 범위의 확대와 질적 강화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오바마는 아홉살과 여섯살 두 딸을 둔 자상한 남편이며, 기독교적 신앙과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현재의 미국을 번영으로 이끈 노인세대와 관련된 공경과 봉사의 정책을 적극 주장하는 정치지도자이기도 합니다. 오바마의 저서로는 어린 시절을 회고한 “Dreams from My Father, 내아버지로부터의 꿈”, 그리고 미국정치에 관한 그의 분석과 희망을 담은 “The Audacity of hpe, 담대한 희망”등이 있습니다.
버락 오바마의 리더십 리더십 1. 말과 감정에 대한 컨트롤 리더십 2.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리더십 3. 도전정신과 실행력 리더십 4. 포용과 휼륭한 인재의 활용
버락 오바마의 리더십 리더십1. 말과 감정에 대한 컨트롤 오바마는 과묵하지만 부드럽고 신중하지만 단호하다. 사색이 많지만 내용은 간결하다. 오바마는 고민거리가 있어도 그런 걱정을 다른 사람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한다. 그는 쉽게 동요하지 않고 늘 침착을 유지한다. 제례미아 라이트 목사 발언의 여파로 인디애나와 노스캐롤라이나 경선에 큰 타격을 입었을 때였다. 캠프는 정말로 침울했다. 이때에도 오바마는 오히려 관계자들을 격려하며 “다음 웨스트 버지니아 경선이 일주일 남았으니 어떻게든 좀 휴식을 취하라”고 하는 모습을 보였다.
버락 오바마의 리더십 리더십2.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첫번째 경선인 아이오와주에서 9% 격자로 힐러리를 따돌린 오바마캠프는 승리의 축제 분위기 였다. 하지만 곧이어 있은 뉴햄프셔, 오하이오, 텍사스에서 연달아 힐러리에 패하면서 오바마 캠프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시카고 본부에서 오바마 후보가 직접 참가한 긴급전략회의가 열렸다. 오바마는 우선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고 모두의 책임이라고 강조하면서 침울해진 전략팀 분위기를 바꾸려 노력했다. 오바마의 캠페인 매니저인 데이빗 플라프는 “오바마만큼 타인을 배려하는 정치인을 만난 기억이 없다.”고 말할 정도이다. 참모들과 직원들로부터 오바마는 가장 존경 받는 후보라고 입과 입을 통해서 선거판에 흘러 들어가고 있다. 캠프전략회의에서 가장 조용한 사람은 오바마라고 한다. 그는 말수가 적은 사람의 의견에 더 주목한다. 그래선지 오바마 캠프의 전략회의는 늘 조용하다. 오바마는 회의 중에 이너서클이 아닌 사람들을 늘 끌어들인다고 한다. 그리고는 끝까지 경청한다. 전체의 논의 방향을 결정하지 않고 모두의 생각을 듣는 것을 목표로 한다.
버락 오바마의 리더십 리더십3. 도전정신과 실행력 오바마 상원의원실 법률고문인 루치 보미크는 오바마 상원의원은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싫어 했고 항상 전진하는 방향으로 일한다고 말한다. 회의에서 누가 전례( 前例 )를 얘기하면 오바마는 늘 “왜 우리가 꼭 그렇게 해야 하나요?”라고 되묻는다고 한다. 오바마는 포용의 사람이라고 늘 부드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의 또 다른 진면목은 단 3년 만에 대선후보에 도전장을 냈던 일인데, 이는 18년이 걸린 매케인과 비교될 수 밖에 없는 특별한 일이었다. 언론에서 끊임없는 오바마에게 ‘검은 케네디’나 ‘정계의 타이거 우즈’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이는 관용과 포용의 부드러움 이면에 이러한 승부사적 기질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꿈을 위해 수시로 변신( 變身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소수 민족 거주지와 아버지 고향 케냐를 다녀온 후, 자신은 사회활동가가 되기로 결심한 후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과 동시에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며 정계( 政界 )입문의 꿈을 키워 왔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치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여 어느덧 상원의원으로까지 성장했다. 2008년 일생일대의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다. 친한 친구들과 보조관까지 아직 미국은 흑인대통령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말렸지만, 그는 지금 준비가 안 되었다면 죽을때까지도 될 수 없을 것이라며, 모든 사람의 선입견( 先入見 )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냈다. 어느 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그는 리더십의 조건으로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감정이입, 자신의 한게에 대한 도전 그리고 역경에 맞서는 인내라고 말했듯이, 그는 자신이 어릴때부터
버락 오바마의 리더십 리더십3. 도전정신과 실행력(계속) 겪었던 고통을 타인을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했고, 더불어 환경에 순응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므로 최대약점이었던 한낮 흑인( 黑人 )의 검은 꿈은 화려하게 검은 케네디가 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버락 오바마의 리더십 리더십4. 포용과 휼륭한 인재의 활용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자와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매케인 상원 의원은 대선일전 ‘엉터리 같은 이상한 사람’, ‘위험한 애송이’처럼 거친 표현들을 써가면서 대통령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사이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와 매케인 상원 의원은 대선이후 공동 성명에서 “(경제위기등) 당면문제를 풀려면 미국의 모든 정당과 지도자들이 하나가 돼 워싱턴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아야 정부에 대한 국민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며 초당적( 超黨的 ) 협력을 다짐했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막판까지 경쟁했던 힐러리 상원의원에게 국무장관직을 제의했고 이를 받아드렸다. 두사람은 미국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길고도 치열한 경합을 벌였었다. 오바마 당선자가 내년 내년 1월 20일 취임에 앞서 잇따라 정치적 경쟁자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당파를 뛰어넘어 함께하자’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지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 내부 분열이나 정쟁( 政爭 )은 나라 전체를 위협할 만큼 치명적이고, 초당적 협력없이는 ‘대통령 오바마의 성공’도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승자인 오바마가 먼저 몸을 낮춰 손을 내밀자 정적들도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 것입니다. 6살 때 재가( 再嫁 )한 어머니를 따라 간 인도네시아에서 오바마는 동네에서는 유일한 외국인인 된 셈이었다. 어느 날 아이들은 그러한 오바마를 신기해하며 떼로 몰려들어 저수지에 빠뜨렸지만, 그는 가까스로 물에서 나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동네 아이들에게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웃음을 보냈다고 유명한 일화가 있다
버락 오바마의 리더십 리더십4. 포용과 휼륭한 인재의 활용(계속) 오바마는 이렇게 어린 시절 인도네시아와 하와이에서 다른 인종과 어울려 살면서, 어려움도 많이 겪었지만 적( 敵 )도 친구로 만들 줄 아는 포용의 리더십을 자연스럽게 터득했던 것이다. 이렇듯 어릴 적부터 힘겨웠던 삶을 인생의 큰 자산( 資産 )으로 바꾸었듯이, 변화무쌍( 變化無雙 ) 한 자신의 남다른 삶은 신으로부터 관용과 포용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그래서 오바마를 표현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바로 관용과 포용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라이벌이었던 힐러리나 공화당의 매케인에 비( 比 )한다면 오바마는 한낮 어린아이 에 불과하다고 말할 정도로 신출내기에 불과하지만, 기존 정치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 유의 그만의 성품을 신선함으로 받아들이며 그를 선택하고 환호했던 것이다. 정치인에게는 최대 약점이 될 수 있을법한 관용과 포용력이 이제는 최대 무기( 武器 )로 탈바꿈 하게 된 것이다.
1 힐러리의 세계적 명성과 능력을 잘 활용하면 미국 외교의 지평이 넓어질 수 있다고 판단 2 경제학계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고, 행 정 경험도 많은 서머스의 지혜를 빌리는 게 현재의 위기 상황에선 더 중요하다. 개성 강한 인물 기용
의 회 존 중 *조지 W 부시 집권 초기 -> 의회를 무시하고, 독선적인 통치행위를 한다는 비판 *오바마 집권 초기 ->의회를 존중한다는 인상. 민주·공화 양당의 여러 의원에게 이매뉴얼을 보내 차기 행정부의 구상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함 *정치전문지 폴리티코 : “의회에 대한 오바마의 태도는 부시와 많이 다르다”고 보도 의 회 존 중 *조지 W 부시 집권 초기 -> 의회를 무시하고, 독선적인 통치행위를 한다는 비판 *오바마 집권 초기 ->의회를 존중한다는 인상. 민주·공화 양당의 여러 의원에게 이매뉴얼을 보내 차기 행정부의 구상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함 *정치전문지 폴리티코 : “의회에 대한 오바마의 태도는 부시와 많이 다르다”고 보도
흑백혼혈로 태여나 외조부모 슬하에서 성장했고 고교시절에는 정체성으로 고민하다가 마약에 손대기도 하였던 버락 오바마의 미국 대통령 당선 은 어느 드라마보다 더 감동적인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두고 두고 승리비결과 리더십이 논의 되겠지만 선거 과정을 종합하여 볼 때 다음의 7 가 지 핵심사항으로 압축되어진다. 1. 결점을 자산으로 바꾸는 탁월한 능력 영화배우 출신이라 전문지식이 부족하다는 약점을 친화력과 소통능력으로 극복하였던 레이건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흑인이라는 결점을 오히려 역경때마다 극복하여 자산으로 바꾸어놓았다. 2. 자신의 한계를 인정치 않는 도전정신 선거 기간 내내 얼마나 지치지 않는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나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3. 적을 만들지 않는 포용의 리더십 어린 시절 하와이와 인도네시아에서 다른 인종 집단과 어울려 스스로 터득한 경험적 리더십이다. 4. 실패에서 배우고 다시 일어서는 끈기 2000 년 연방하원선거에 실패한 그는 잘못을 시인하고 전략을 완전히 바꿔서 다시 성공을 거둔다. 5. 일단 결정하면 밀고 나가는 실천적 리더십 바이든으로 결정한 뒤 페일린 열풍이 불었지만 당초의 선택을 밀고 나가는 뚝심을 보여 주었다. 바이든의 경륜이 정치 신인인 자신의 부족함을 채 워줄 것으로 기대했고, 공화당 우세지역에서 펜실바이니아지역 태생인 바이든의 영입을 통해 반전을 노릴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6. 철저한 분석을 통한 기획적 리더십 그는 철저하게 2007 년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면서 세운 계획대로 움직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7.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신중한 성품의 리더십 미국 경제전문 방송 MSNBC 가 제시하는 CEO 오바마의 7 가지 성공요건의 한가지이다. 버락 오바마의 리더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