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유교정치
조선왕조의 유교정치와 왕권 1. 머리말 ○ 조선시대의 정치사는 당파성론의 극복이라는 차원에서 연구되기 시작 ○ 연구경향 ㆍ탕평책(蕩平策)에 관한 연구 ㆍ왕권보다는 신권(臣權)쪽에 치우친 연구 다수 ○ 문제의식 ㆍ왕조시대의 정치는 제왕에 의해서 시작되고, 최종 책임도 제왕이 지는 것이므로 제왕권에 대한 이해 없이는 바른 체계를 세울 수 없다. ㆍ조선시대의 정치는 유교정치를 표방하여 왕조가 망할 때까지 한차례도 포기하지 않았고, 시기에 따라 왕권의 위상도 달라졌으므로 이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
조선왕조의 유교정치와 왕권 2. 초기의 왕정과 관료제 ○ 조선왕조의 건국 : 1392년 7월의 역성혁명(易姓革命) ㆍ도평의사사의 명의로 된 권유문을 통해 조선 건국 ㆍ다른 어떤 초월적 권위의 가탁이 없이 인심과 천심을 강조 cf) 중국 : 중국 황제는 하늘의 아들이라는 인식 틀에서 권력이 유지 삼국 : 중국의 황제처럼 하늘의 자손이라 칭하고, 불교가 수용된 이후로는 왕=부처라고 인식 고려 : 고려의 왕권도 불교로부터 뒷받침 하는 비중이 높음, 그러나 부처로 자처되지는 않음 ○ 조선왕조의 유교정치 표방 ㆍ불교를 배격하고 유교정치를 표방한 것은 불교가 지금까지 왕정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획기적인 변화 ㆍ중국의 황제처럼 초월적 권위에 가탁하지 않은 것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편입되면서 황제라고 일컬을 수 없는 외교적 현실에서 비롯된 면도 있음
조선왕조의 유교정치와 왕권 ○ 조선왕조의 왕정(관료제) cf) 중국의 황제정은 관료제와 환관제 두가지로 뒷받침 된다. 황제권의 수행을 위한 장치가 두가지라는 것은 그만큼 권력유지에 유리. 한쪽으로부터 견제를 받게되면, 다른 한쪽을 통한 입장관철이 가능하기 때문 ㆍ경연(經延) : 국왕이 학식과 덕망이 있는 신하들과 강학을 함께하는 자리(환관과의 접촉 최소화) ㆍ과전(科田) : 국왕이 벼슬하는 자에게 내리는 世祿으로 국왕에 대해 충성을 할 사대부의 생계를 유지하고 체모를 유지할 수 있게 주어진 토지(녹봉과는 별도의 개념) 경연과 과전제는 관료제적 왕정체제의 유지의 필요한 군신의리를 확실하게 보장하는 바탕
조선왕조의 유교정치와 왕권 3. 중기의 붕당정치와 왕권 ○ 조선 초기는 왕권과 관료제 두가지를 기본구성으로 하는 정치체제 확립 ○ 15세기 말엽 붕당의 형성 ㆍ16세기 사화(士禍)의 정치적 파란이 거듭하는 속에서 조금도 꺾이지 않고 오히려 점차 강해져 왕조의 정치체제를 관료제로부터 붕당정치로 바꿈 ㆍ붕당정치의 정치체제는 왕권의 위상도 바꿈 ○ 붕당정치의 성립 ㆍ지주-전호제의 발달을 배경(향촌사회의 중소규모의 지주들의 수적 확대) ㆍ향촌운영을 담당하기 위해 향당(鄕黨)을 결성하는 움직임이 발생 ㆍ향당을 배경으로 중앙에 진출한 자들이 학연을 매개로 붕당 형성 ㆍ과전제의 수조권의 분급 원칙 자체가 붕괴(과전제→직전법→녹봉제) ㆍ士林의 등장 : 군신공치주의(君臣共治主義)를 지향, 경연제도의 정비(세종대를 제외하고 조선전기 경연을 기피하다 성종대 사림이 등장하면서 활발하게 이루어짐)
조선왕조의 유교정치와 왕권 ○ 사림이 추구하는 군신공치주의적 정치지향에 따른 국왕의 반응 ㆍ 성종 : 빠른 적응을 보인 군주 ㆍ 중종 : 적응과 거부를 번갈은 경우(士禍발생) 4대사화 : 무오사화 ·갑자사화 (연산군), 기묘사화(중종), 을사사화(명종) ㆍ 선조 : 왕권의 입지를 찾아 신하들의 세력관계를 이용하려는 의도에서 정권교체를 자주 되풀이 ㆍ 연산군 : 공치주의뿐 아니라 관료제가 주는 구속까지 거부한 유일한 사례 ○ 붕당정치는 인조반정을 계기로 안정적인 기반을 확보 ㆍ 인조반정 : 1623년(인조 1)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 ㆍ인조, 효종, 현종 3대의 왕정은 외침으로 불안한 정국이었으나, 정치이념상 성리학적 공치주의가 확립
조선왕조의 유교정치와 왕권 4. 후기의 왕권과 탕평책 ○ 17세기 공도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붕당의 공존원리가 깨지기 시작 ○ 일당전제적 성향으로 정국파탄 ㆍ예송논쟁(1차, 2차 예송논쟁) ㆍ환국 : 경신환국(숙종 6년), 기사환국(숙종 15년), 갑술환국(숙종 20년), 신임사화(경종 1년), 정미환국(영종 3년) ㆍ이인좌의 난 : 영조의 왕위에 대해 불만을 품은 남인과 소론계의 사대부들이 일으킨 사건
조선왕조의 유교정치와 왕권 ○ 영조의 탕평책(탕평 완론:온건적 타협론자 중심) ㆍ탕평은 요순의 시대처럼 군주가 선정을 베풀고, 신하들이 당이 없는 경지를 이름 ㆍ인재를 각 붕당에서 고르게 등용하여 서로의 불만을 해소시킨다는 것 ㆍ국왕이 명실상부하게 정국을 주도하는 주체라는 것 ㆍ영조는 성군정치를 위해 경연제를 선택(52년간 3,400회) ○ 정조의 탕평책(탕편 준론:명절과 의리를 준절하려는 급진론자 중심) ㆍ정도는 왕위 회복을 위해 전각제도를 채택(규장각 창설) ㆍ전각제도 : 호아제의 어진, 어제, 어필 등을 보관하는 곳 ㆍ경연제도가 신권신장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전각제도는 황제권 선양 ㆍ정조 사망후 정조로부터 강한 거부를 받던 정순왕후 계열이 순조초에 신유사옥을 일으켜 정조가 규장각의 운영을 통해 닦았던 기반을 무너뜨리며 세도정치 구축 ㆍ세도정치 아래에서는 유교의 왕정론을 살펴보기 힘들며, 오로지 공리적 이익 추구
한국의 유교문화
양반 양반의 의미 1) 우리는 양반의 후손이다. 긍지를 가져야 한다. 2) 그 사람 참 양반이네 3) 우리 집 바깥 양반이 서울 갔어 4) 야, 이 양반이 눈깔없어! 양반의 다양한 말들:선비,사대부,사족,사림,유자,유생,학생,처사,유학
선비 “떳떳한 생업이 없으면서도 떳떳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오직 선비만 가능하다” 일정한 수입이 없어도 떳떳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조선시대의 선비:개별적 존재가 아닌 혈연집단의 한 구성원 선비의 집단:士林 소외된 선비:處士-선비라는 이름에 더 고상하고 의미심장한 의미를 부여
과거급제 – 가문의 영광
出處, 退去 이황 : 28세 진사시 入格, 34세에 문과에 及第, 대과 급제하는데 15년 걸림, 50세 이후 벼슬에서 물러남 이후에 성균관대사성,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우찬성, 판중추부사에 제수 – 모두 거부하고 사직(21년동안 53회) “내가 불민하고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부족하여, 전부터 여러 번 불렀으나 늘 늙고 병들었다고 사양하니, 나의 마음이 편치 못하다. 그대는 나의 지극한 심정을 알아주어 속히 오라!” – 명종이 내린 교지 넷째 형 이해가 이귀의 모함으로 유배,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 을사사화 – 명종은 이귀 등의 간신등에 의존 “선비가 가난하여 벼슬에 나아가고자 하나 임금이 임금답지 않으면 어찌해야 합니까”, “나아가서는 안된다” 인조에 대한 사림들의 태도.
유교에서의 삶과 죽음 인간 : 心性과 身體로 구성 하늘로부터 성품을 부여받고, 부모로부터 육신을 부여받아 탄생 죽은 이후 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魄은 땅으로 돌아간다 죽음을 회복시키는 의식-招魂, 皐復 자신의 신체적 분신인 자손의 생명을 통해 유지계승 양반들의 가장 큰 불효 : ? 조상에 대한 존중은 곧 자기 존재의 존중
三年喪 유교 상례의 특징 부모상 외에 長子나 남편이 죽었을때 부모와 아내가 하는 것 次子 이하나 아내의 상은 1년상 남자, 맏아들 중심세계 시묘살이 – 禮書에 없는 예절, 반드시 하지는 않았으나 효의 실천으로 이해 형식만 갖추고 평시와 같이 행동하는 것이 일반적
후손의 책무 – 奉祭祀 기제사:조상이 돌아가신 날 하는제사 시제:4계절에 하는 제사 절사:설,한식,단오,추석의 명절에 하는제사 기제사와 절사:사당제사 시제:묘소제사 윤회봉사,외손봉사->장자봉사 나의 자손->남의 사위와 외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