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장 북한의 대남전략 대남혁명 전략 및 전술 대남사업기구 대남전략 전개과정
1. 대남혁명전략/ 전술 대남혁명전략 대남전략 기조 대남혁명전술
A. 대남혁명전략(남조선혁명론) 북한의 관점 : ‘선(先) 남조선혁명 후(後) 조국통일’, 전국적으로 혁명과업 완수해야 한다는 인식(한국이 아직 혁명 이전의 단계에 있다는 상황판단) 북한의 혁명전략 :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 당면목표 : 외세 축출, 국내의 봉건제도 타파 노동자 계급 영도하의 노 ∙ 농 동맹군을 주력군, 각계각층을 동맹세력으로 포섭 외세 / 국내 반공세력 타도에 우선순위, 양자를 격리 /고립, 각개 격파
B. 대남전략 기조(1) ① 북한사회주의 혁명역량 강화 개요: ’64년 ‘3대혁명역량 강화’를 제시 ~ ~ ~북한 ∙ 남한 ∙ 국제사회주의 혁명역량 강화 ① 북한사회주의 혁명역량 강화 정치적 역량 강화 : 북한 인민들을 철저히 주체사상으로 무장시켜 혁명화, 노동계급화, 프롤레타리아 독재 강화 경제적 역량 강화 : 자급자족주의체제 강화, 3대 기술혁명(사상, 기술, 문화)을 철저히 수행 군사적 역량 강화 : 자력국방의 원칙에 따라 4대 군사노선 실천
대남전략 기조(2) ② 남한사회주의 혁명역량 강화 남한에서의 민주세력(용공세력, 반정부세력) 지원, 남한 인민의 사상적 각성, 통일전선 형성, 국군의 와해, 반혁명역량 약화 통일전선 형성 : 남한 내 혁명 주력군인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진보적 엘리트 포섭하여 반파쇼 민주연합전선 / 반미 구국통일전선 형성 ※한국의 정치적 민주화 이행 및 경제발전에 따라 북한의 공작 목표의 성공 여부 불투명(한국의 민주화 이행으로 북한의 포섭 대상층이 얇아짐)
대남전략 기조(3) ③ 국제혁명역량 강화 ※ 3개 혁명역량 강화 중 ‘북한 내의 사회주의 혁명역량 강화’의 지속성 여부? 사회주의국가/제 3세계국가의 인민들과 유대 강화, 자본주의국가 내의 노동운동세력과 단결 전세계 반제평화애호세력 지원 등 ※’90년대 들어서 공산권 국가들의 몰락, 현실적으로 북한은 국제혁명역량 강화 기대 곤란 ※ 3개 혁명역량 강화 중 ‘북한 내의 사회주의 혁명역량 강화’의 지속성 여부? 김정일/김정은 체제하 근본적인 구조적 변화 기대난, 단, 부분적 / 기술적 변화에 한정 하 혁명역량 지속 강화
C. 대남혁명전술 지하당 구축전술 통일전선전술 민족공조론 대중투쟁전술 국군와해전취전술 * 교재: 4,5번 미 언급
지하당 구축전술 남한 내 조선공산당의 전위대 역할을 수행하는 조직 건설 ’60년대 통일혁명당, 인민혁명당 ’70년대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80년대 한국민족민주전선, ’90년대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남한에 구축 시도 지하당 구축 이유 : 혁명 주력군의 거점 및 혁명이 일어나는 경우 이를 남한자체의 혁명 위장
통일전선전술 공산주의자들의 전통적 / 전형적인 조직전술 정면 공격이 불가능 시, 상대편 내부의 갈등 / 대립을 이용, 동맹 가능한 부동층과 타협 / 협조 공산당세력만으로 주적 타도 불가시 필요한 동조세력 획득, 잠정적인 동맹체 형성/투쟁 동 전술 적용 원칙 : 하층 통일전선을 기본으로 상층 통일전선을 유기적으로 결합, 부분적인 연합→ 전면적인 연합으로 발전 ’80년대 통혁당 후신인 “한국민족민주전선” 위장 출범 /’90년대 이후 범민련(조국통일 범민족연합), 범청학련(조국통일 범민족청년학생연합) 등을 결성, 활동 중
민족공조론 북한이 ‘민족공조’를 주장하게 된 계기 : 2000.6월 남북정상회담시 채택된 ‘6.15 남북공동선언’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갈 것’ (선언 1항) ‘우리 민족끼리’라는 표현을 ‘민족공조’로 개념화 2002. 10월 북핵문제의 재대두 : 북은 민족공조를 본격적으로 제기 ‘민족공조를 통해 미국의 대북압살책동을 분쇄해 나갈 것’ 주장 ※정치-군사적 쟁점에서는 민족공조를, 경제적 실리를 위해서는 남북한 교류협력에 의존하는 전술 구사
대중투쟁전술 각종 투쟁의 유형 / 방법을 상황에 따라 잘 배합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전술 합법 / 비합법 / 반합법 투쟁의 배합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배합 노동자 / 일반민중들의 대중성 확보 위해 임금 인상, 노동환경 개선 등의 구호를 내세워 경제투쟁 전개 대규모 파업, 시위, 폭동, 무장봉기 등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적절히 배합 폭력투쟁과 비폭력투쟁의 배합
국군와해전취전술 북한, 국군을 미제 식민지통치의 무력적 기초/ 반동통치의 중추세력이라 규정 → 혁명 성사를 위해서는 반혁명 무력을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 이를 위해 국군을 와해전취하는 사업 추진, 그들을 민족군대, 인민군대로 전환 지침 전취대상 : 병사대중과 중하층장교, 그들을 계급적 / 민족적으로 각성시키는 정치사상사업 전개 조직화 강조 : 남한 혁명가들은 국군 내 혁명조직을 확대, 지하투쟁/무장투쟁 등 투쟁형태를 배합, 혁명역량 강화 국군, 상관의 명령기피, 도주에서 병변, 폭동으로 발전
3. 대남공작기구 개 관 대외연락부 통일전선부 35호실 작전부 정찰국 개 관 대외연락부 통일전선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 ∙ 태평화위),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35호실 작전부 정찰국
대남공작기구(1) <개 관> 당비서국에 대남공작을 총괄하는 대남사업담당 비서, 그 휘하에 대외연락부(구 사회문화부), 통일전선부, 35호실(구 대외정보조사부), 작전부, 인민무력부 정찰국 각자 독립성 유지 하 독자적인 대남사업 수행, 중요 공작사안에 대해서는 각 공작부서에서 특급 공작요원을 차출 특별팀 구성 기타 국가안전보위부/사회안전부에도 자체 대남공작 전담조직 편성
비서국, 대남사업담당비서
대남공작기구(2) 대외연락부 구(舊)연락부를 확대 개편한 대남공작의 주무부서, 공작원 밀봉교육, 남파, 남한 내 지하당 구축 / 해외공작 전담 남한지역담당, 남한사회지도층담당, 해외담당, 대성총국 통일전선부 ’77년 김일성 교시에 따라 신설된 대남사업부서, 남북대화 주관, 조총련 및 해외교포 공작사업, 대남심리전/통일전선공작(대남사업담당비서가 통일전선부장 겸임, 핵심적인 대남공작부서) 한국 내 상주간첩에 대한 지도, 반정부조직/사람들에 대한 직간접 지도 및 자금지원 직접침투과(간첩우회침투공작), 남북회담과, 해외담당과, 남조선연구소(심리전, 남한관련 정보/자료 분석, 연구) 외곽단체 :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한국민족민주전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 민족화해협의회
대남공작기구(3) <통일전선부 산하 주요 외곽단체> 대남공작기구(3) <통일전선부 산하 주요 외곽단체>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남한 4.19 혁명 직후 제기된 ‘남북협상론’ 대응 위해 ’61.5월 급조된 단체, 위장평화통일정책 선전 기구 ’90년대 초 남북고위급회담 시 이 단체의 구성원들이 북한측 대표로 대거 참여, 역할 크게 부각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 북한이 남한 내 조직한 지하당으로 주장하고 있는 위장단체, 목표는 한국의 친미정권 타도 후 민족민주정권 수립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49년 창설, 대남적화혁명을 위한 북한의 위장평화통일 선전을 전개하는 통일전선의 총괄체(남한 통일전선 형성)
대남공작기구(4) <통일전선부 산하 주요 외곽단체(계속)> 대남공작기구(4) <통일전선부 산하 주요 외곽단체(계속)>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 ∙ 태평화위) ’94.5 아시아태평양 지역 미수교 국가들과의 정치. 경제. 문화교류 확대 /강화 목적으로 설립 미.일 등 대서방국과 관계개선 위한 창구역할 및 남북교류 조정/통제 외국인사 방북 초청/해외 학술회의 참가(북한의 폐쇄적/호전적인 이미지 불식 활동에 주력) ’98년 리틀엔절스 예술단의 방북 공연,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방북 초청/금강산 관광사업, 각종 언론/종교단체의 방북 등 민간교류 주관(2000년 남북정상회담 개최 과정에서도 많은 역할 수행)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 ’98년 구성된 민간단체(정계, 사회/문화계, 종교계 등 각계 단체 및 인사)
대남공작기구(5) 35호실 주로 대외(미국, 일본)/대남 정보수집, 해외간첩공작 및 국제/대남 테러공작 전담(모스크바, 베이징, 베를린, 도쿄, 마카오, 싱가폴, 홍콩. 아바나 등에 지부) 단기공작과 (공작원 남파 및 정보수집 수행), 해외담당과(해외공작 및 테러 전담) ’87년 대한항공기 공중폭파 테러 / ’78년 최은희/신상옥 납치공작 자행 작전부 공작원들에 대한 기본 교육훈련, 침투공작원 호송/ 안내/ 복귀, 대남 테러공작 / 침투루트 개척 김일성 정치군사종합대학, 육상(2개) /해상(4개)연락소
대남공작기구(6) 정찰국 인민무력부 총참무부 소속, 간첩 양성, 남파, 요인암살, 파괴, 납치 등 게릴라 활동, 대남군사정보수집 정찰국 예하 부대 : 7개 정찰대대 ’83.10월 버마 아웅산 암살폭파사건 자행 전두환 전 대통령의 버마 순방 중, 아웅산 국립묘지 참배 2분전 테러 한국 각료 4명, 수행원 17명, 버마인 4명 사망 북한 공작원 2명, 아웅산 묘소 천장에 폭탄 장치
4.북한의 대남전략의 전개과정 개 관 김일성 시대의 대남정책 김정일 시대의 대남정책 대남정책 평가 / 전망
개 관 (대남전략) 한국전쟁을 통한 무력적화통일 달성에 실패 이후 형식적으로 정전체제 구축에 참여, 실제적으로 군사적 대결/긴장 계속 고조 군사적 긴장 조성으로 대내적으로는 김일성 독재체제의 정당성 확보 대남면에서는 한국을 정치.사회적으로 불안을 조성하여, 남한정부의 정통성 약화 시도 남 ∙ 북한간의 긴장은 “주한미군의 존재로 야기되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 국민들에게 인식, 주한미군의 조기철수를 유도, ‘결정적 시기’ 조성 기도 ☞미군 철수 주장 – 북에 동조/ 대변
김일성 시대의 대남정책 해방 후 ~ 휴전회담 이전 휴전회담 이후 ~ ’50년대 말 ’60년대 ● ’70년대 ’80년대 ’60년대 ● ’70년대 ’80년대 ’90년대 (‘94.7.8 사망)
김일성 시대의 대남정책(1) 해방 ~ 휴전회담 이전 : 무력통일정책 휴전 이후- ’50년대 말: 소극적 대남정책 미군철수 유도, ‘민주기지론’에 입각한 군비증강 등 무력통일 준비(’49, ’50년 방소, 남침 승인 및 지원 획득) ’50.6.25, 남침, ’53.7. 27 휴전, 무력통일정책 실패 휴전 이후- ’50년대 말: 소극적 대남정책 전후 복구사업 급선무, 대남정책 소극적 불가피 소수 간첩 남파 등 대남공작 전개(개별적인 밀봉교육) ’50년대 후반 남한의 정치정세 혼미 : 이를 이용, 소규모 간첩단 남파(학원/군대/정부기관 은밀 침투) ’58년 부산 출발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소속의 KNA 1대 6명의 무장괴한에 납치, 평양 강제 착륙(승객 28, 미군장교 1, 승무원 3명 탑승 / 국제여론 굴복, 승객만 귀환)
김일성 시대의 대남정책(2) 1960년대 : 공세적 대남정책(남조선 혁명을 통한 통일전략 적극 모색) 한국 내의 정치상황 : 4.19 혁명 전후감상적 통일논의 만연, 이에 편승 혁신계 정치인들 목소리 높아지고 국민의 안보의식은 거의 와해 상태 ⇒이를 이용, 북한은 모든 수단을 동원 대남적화공세 감행 5.16 군사혁명은 북한으로 하여금 대남전략의 기본 방향을 대폭 수정(남한, 정치사회적 혼란이 사라지고 경제발전 / 베트남전 참전으로 국력신장 여건 마련 및 반공태세 / 사상무장 강화)
김일성 시대의 대남정책(3) 1960년대 : 공세적 대남정책 (계속) 북한, ’61년 제 4차 당대회 시 강경노선의 통일전략 채택, 대남공작기구 통합/ 승격 조치, ’62년 4대 군사노선 채택 ’60년대 중반부터 게릴라를 직접 침투, 요인 / 양민학살 기도 군사분계선 근방 아군 습격 11건/ 무장간첩 남파 17건, 어선 강제납치 7건 남한의 해군함정 PCE-56함 피격(사망40, 실종 30명) 미군의 전자정찰함 푸에블로호 납치 ’68.1.20일, 북한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의 청와대 기습 기도(1명 생포) → 향토예비군 창설
김일성 시대의 대남정책(4) ※ ’60년대 도발 특징 ’68.11.13일, 124군부대 소속 120명, 울진/삼척 무장공비침투(생포2, 사살59, 아군8 / 민16명사망) ’69.12.11일 강릉출발,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소속 YS-11기가 북한 간첩에 의해 납치, 원산에 강제 착륙(총 51명의 승객 중 39명만 판문점 통해 귀환, 승무원 3명과 8명의 승객 강제 억류) ※ ’60년대 도발 특징 ’50년대와는 달리 무장간첩/게릴라의 직접침투양상 / 정면 군사도발 위협의 정도면에서도 평시 상황하에서는 심각한 형태의 도발 자행
김일성 시대의 대남정책(5) 1970년대 : 대결관계 / 대화전략 병행 남한의 경제성장/정치안정에 의해 남북한간 국력격차가 좁혀짐 ’60년대의 직접적인 게릴라 침투전술 결과 → 한국민의 안보의식 강화 계기만 제공/북한은 남한이 제의한 남북대화에 응함(7.4공동성명) ’73.8월 북한은 대화로서는 혁명역량의 신장을 기대할 수 없음을 인식 → 대화단절성명 발표 김정일이 등장하면서 대남공작기구 강화 / 대내외공작역량 총동원(’77년 당연락부 내에 대성총국 신설 대남공작 관장, 일본을 간접침투 기지화)
김일성 시대의 대남정책(6) ’70년대 도발한 위기사건 요인암살 기도 : ’70.6.22일 북한에서 남파된 무장공비 3명이 국립묘지에 시한폭탄 장치(6.25 동란 20주년 기념일에 국립묘지를 참배할 대통령 및 정부요인 암살 목적, 폭탄설치 중 실수로 공비 1명 사망, 2명 도주 중 김포에서 사살) ’74.8.15일 북한의 지령을 받고 침투한 문세광이 8.15 해방 29주년 기념식장에 잠입, 연설중인 박대통령을 저격했으나 미수, 육영수 여사 서거(조총년계 공작 지시, 최초 3.1 절 목표)
김일성 시대의 대남정책(7) 남침용 땅굴 발견 ’76.8.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74.11.15일 고랑포지역(DMZ남쪽 1.2km 통과, 90cm/122cm, 시간당 1개 연대병력 통과 가능) ’75.3/’78.10/’90년에 대규모의 제2, 3, 4땅굴 발견 ⇒ 북한 전면전 계획 증명 ’76.8.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UN군측 보니파스 대위는 9명의 군인/5명의 노무자 인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UN군측초소 남방 30m, 시계 정리차 미루나무 가지를 치던 중 북한 경비병 30명 출현, 고의적 시비를 걸어 UN군측 노무자의 도끼 탈취, 보니파스 대위와 바래트 대위 살해, 경비병 8명 중상, 한국측 5명 중경상 한∙미측, 단호한 대응태세에 김일성 유감 메시지로 종결
김일성 시대의 대남정책(8) 1980년대 : 대결관계 / 대화전략 병행 군사력을 제외한 국력에서 한국이 북한을 능가, 북한은 권력이양 등 정치적으로 민감 북한, 남북대화의 무드를 이용하여 화전양면전술 구사(한국민의 정신적 해이 조장 목적) ’83. 10월 버마 아웅산 테러사건 자행 ’87.11.29일 대한항공 여객기 공중폭파(버마 상공) ←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 위상 제고에 상대적 열세 인식
김일성 시대의 대남정책(9) ‘90년대 : 사회주의체제붕괴 /수세적 대남정책 냉전체제 붕괴 → 3대 혁명역량 약화 경향 김일성, 대남정책의 목표인 ‘한반도 공산화’보다는 당면목표인 ‘대내 체제유지’ 에 주력 ’90.4월 남북고위급회담 시작(대결상태 해소 / 다각적인 교류∙ 협력 문제), ’91.9월 남북유엔동시가입 수용 등 남북관계 개선 모색 ’92.2월 ‘남북한 비핵화 공동선언’과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 협력에 관한 합의서’ 발효 <남북기본합의서> (남한 미국 핵무기 철수, 체제인정 및 불가침 보장) ※ 북, 남한과의 관계개선에 소극적 태도(내부 동요 우려) 핵무기개발 문제를 협상 지렛대로 북미회담 진전(벼랑끝 전술) 김일성은 남북정상회담 제의(7.25-27) → ’94.7.8 ‘김’사망으로 무산
김정일 시대의 대남정책 적극적 남한배제정책 대화 가능성 탐색 및 제한적 대남접촉 정상회담 개최와 적극적 대화 참여 남북대화 중단과 재개의 반복
김정일 시대의 대남정책(1) 적극적 남한배제정책 김일성 사후 대미관계정상화를 추구한 김일성의 정책 계승,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주력 남한 당국과의 직접적인 대화 거부,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 전개 : 체제 및 정권유지 차원에서 대남 적대관계 유지, 남한을 배제시킨 채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치중 ’94.10.21일 제네바 ‘북 ∙ 미 기본합의문’ 체결 미국으로부터 핵안전보장 공식 확보, 경수로 지원 / 중유공급, 무역 / 투자제한 완화 미국, 북 ∙ 미관계 진전의 전제조건으로 남북관계 개선 요구 → 북한도 남한과의 접촉을 무조건 거부는 한계
김정일 시대의 대남정책(2) 적극적 남한배제정책(계속) 북한의 경제난 해결에 남한이 큰 몫을 담당하고 있는 것도 남한과의 관계개선 불가피 ’95년 식량확보를 위해 남북접촉 시도, 북한은 쌀회담을 공식회담이 아닌 민간 수준의 교류로 의미 축소 ’96. 4월 한∙미는 한반도 평화체제구축을 위한 4자회담 제안 → 김정일은 딜레마 속에서 수용 ’96. 9.17 북한의 상어급 잠수함 강릉 침투(1명 생포, 1명 도주, 그외 자살/사살) ’97. 12월 4자회담 개최(북, 체제유지 차원에서 대남관계에 소극적)
김정일 시대의 대남정책(3) 대화 가능성 탐색 및 제한적 대남접촉 김정일, ’97. 8월 남한이 “반북대결정책” → “연북화해정책”으로 변환 시 대화도 가능하다고 언급 ’98. 2월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북한은 대화의 가능성을 탐색 전제조건 : 국가보안법 철폐, 안기부 해체, 한미합동군사연습 중지, 군사장비도입 금지 ’98. 4월 베이징에서 '남북당국대표(차관급)회담’ 개최 남, 비료지원/ 이산가족문제 토의 주장 반면 북은 비료지원에만 합의 ∗ ’98.6.22일 유고급 잠수정이 남한어망에 나포 ’99. 6-7월 남북차관급회담 개최(이산가족-비료지원 상충)
김정일 시대의 대남정책(4) 정상회담 개최와 적극적 대화 참여 2000. 3. 9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선언 남북당국에 의한 경협(대북 농업구조 개혁 및 사회간접자본 확충 지원 등), 이산가족문제 해결, 한반도 냉전종식/ 평화정착, 남북대화 재개 등 4개과제 제안 북, ‘새로운 것이 없다’고 언급 및 ‘남한이 긍정적인 변화를 보인다면 대화에 응할 수 있다’는 반응(경제적 지원 기대 시사) 2000.6.14-16 남북정상회담(1차) 개최, 남북간 ‘6.15 공동선언’ 발표(5개항 합의)
김정일 시대의 대남정책(5) ※ 6.15 공동선언 내용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추진 ※ 6.15 공동선언 내용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추진 양측 통일방안에 공통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 이산가족방문단 교환 및 비전향장기수 등 인도적 문제 조속 해결 경제협력을 통한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 및 사회.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분야의 협력과 교류 활성화 남북 당국간 회담 조속 재개
김정일 시대의 대남정책(6) 남북대화 중단과 재개의 반복 북한, 2001년 신년 공동사설에서 ‘6.15 공동선언’의 후속조치를 적극 추진 강조 불구, 3월 제 5차 장관급회담에 ‘여러 가지 고려’를 이유로 불참 북한,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적대정책’이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대화중단 책임을 미국에 전가(한.미공조에 불만, 외세로 인해 민족공조 달성 불가 주장) : 한.미공조를 빌미로 대화 중단 2002.4월 임동원 특사의 방북, 김정일과 면담 2002.8월 이후 장관급회담, ’04.6월 군장성급 회담, 2007.10월 남북정상회담(2차) 개최
최근 북한 도발 사례 연 월 일 내 용 ‘99. 6. 15 북한 경비정 NLL월선, 선제공격으로 제1연평해전 ‘02. 6. 29 ″ 제2 ″ ‘09. 11. 10 ″ 대청해전 ‘10. 3. 26 백령도 서남방 2.5km 해상에서 천안함이 북한 어뢰 공격에 의해 침몰(46명 전사) ‘10. 11. 23 북한 제 4군단 해안포 및 방사포, 연평도에 화력도발 (군인 2명 전사∙ 16명 중경상, 민간인 2명 사망∙ 다수인원 부상)
최근 북한 도발 사례(1) 제 1 연평해전 : 1999. 6. 15 충돌작전에 대응 ‘함미 충돌에 의한 밀어내기 작전’ 실시, 북한 경비정의 선제사격에 해군 경비함정 대응사격 한 해전 북한, 어뢰정 1척 격침, 경비정4척과 어뢰정 1척 손상, 다수의 사상자 발생, 도주 남한, 고속정 5척 경미한 손상. 9명 가벼운 부상 제2 연평해전 : 2002. 6. 29 북한 경비정의 선제사격에 해군 경비함정 대응사격 한 해전 북한, 경비정 1척 대파, 30여명 사상자 발생 남한, 고속정(참수리-357) 1척 예인 중 침몰, 6명 전사, 18명부상
최근 북한 도발 사례(2) 대청해전 : 2009. 11. 10 대청도 동방11km 북한 경비정을 퇴거하는 과정에서 북 경비정의 조준사격에 우리 고속정이 대응사격 한 해전 북한, 경비정 1척 손상, 다수의 사상자 발생 추정 남한, 참수리-325정의 선체에 탄흔 23개 천안함 피격사건 : ’10. 3. 26 백령도 인근 해상 연평도 포격 도발: ‘10. 11. 23 , 170여 발 포사격, 군인 2명 전사, 16명 중경상, 민간인 2명사망, 건물 133동 파손
대남정책 평가 북한의 대남정책 변화 김정일 시기의 대남정책 추진고려사항 냉전 시기 : ‘대남혁명’이라는 목표 하 추구 냉전 종식 : ‘체제유지’라는 당면목표 치중 김정일 시기의 대남정책 추진고려사항 체제 및 정권안보 유지 체제/정권유지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시 남북대화 거부 또는 소극적 태도 견지 체제안보를 위해 북∙미관계 개선을 최우선시(통미봉남) 경제적 실익 : 북한이 남북대화 참여 큰 이유, 경제난 해결 남한의 대북정책 방향에 대해 한미공조/흡수통일/북한체제 인정 여부에 민감한 반응
북한의 대남정책 방향(전망) 북한, 향후에도 체제 및 정권안보 우선 정책 지속 선(先) 미국, 후(後) 남한 정책도 지속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 및 핵 위기가 관건,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 주목 북, 남북대화와 북미대화 병행하되 북미관계에 정책적 초점 유지(남북대화는 북미관계의 진전에 필요한 만큼, 대화 회피 비난을 받지 않을 정도로 제한 가능성 큼) 남북관계에서 경협 중시, 군사문제 회피 ‘민족공조’의 필요성 더욱 강조 한미공조에 대항 논리( 미국의 전쟁위협과 미국의 대북정책이 남북관계 진전 방해 집중 부각)
감사합니다 See You Next Week
수고했습니다
북한의 대남 비난 북한의 대남전략 56
김양건 당 대남담당비서 겸 통일전선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