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조선과 동아시아 박 범 2018.12.27 한국역사입문Ⅱ
아편전쟁과 난징조약 해금정책 유지, 광둥에서 공행무역 서양은 무역제한 철폐와 외교 교섭권 요구 영국은 차 수입에 따른 은을 마련하기 위해 면직물을 대신할 아편 판매 1830년대 아편 중독자가 200만명 중국에서 임칙서 파견 → 아편전쟁 난징조약 → 중국 입장에서 당면한 위기 회피, 기존의 조공무역 유지 이렇게 적어서 놓으면 슬라이드를 켜면?
페리 함대와 일본의 개국 19세기 초까지 막부는 외국 선박 격퇴 명령 아편전쟁을 전해듣고 연료, 물, 식량을 희망할 경우 한하여 전달하고 퇴거 1853년 페리 함대가 무력시위를 하자 미일화친조약 체결 서양은 무역제한 철폐와 외교 교섭권 요구 서양-청의 조약보다는 유리, 전쟁 vs 교섭 막부는 독립된 외교기관인 ‘외국봉행’설치 막부-미국 조약에 유구왕국의 항구도 거론 이렇게 적어서 놓으면 슬라이드를 켜면?
제2차 아편전쟁과 양무운동 제2차 아편전쟁으로 북경 함락 1861년 함풍제는 양무사업+외교 전담기구인 총리각국사무아문(총리아문) 설치 단, 동아시아 각국의 업무는 예부가 그대로, 조약은 서양에 한정 국제법 이론가 휘튼의 <국제법 원리>를 선교사 마틴이 <만국공법>으로 번역 <만국공법>으로 청의 권익 보장 주장 : 1864년 프로이센과 덴마크 분쟁 톈진조약 개정 시기가 다가오자 외교사절을 서양에 최초로 파견 청의 대외정책 담당자로 李鴻章이 주도 이렇게 적어서 놓으면 슬라이드를 켜면?
존왕양이운동과 메이지 유신 막부가 천왕 허락없이 조약 체결하자 존왕양이 발생 조슈번의 존왕양이 운동:천왕의 명령, 외국의 보복으로 攘夷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바쿠후 타도로 전환 영국 함대가 영국인 살해를 명목으로 사쓰마번(가고시마)를 공격하자 막부 타도로 전환 조슈번과 사쓰마번의 동맹 결성:왕정복고 쿠데타로 권력 장악 1869년 6월 막부 세력과의 전쟁에서 승리:개국을 적극 추진, 천황의 친정 실시 → 메이지유신 메이지정부의 과제 : 불평등조약 개정 → 이와쿠라 사절단 파견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 : 15만부 판매, 문명. 이렇게 적어서 놓으면 슬라이드를 켜면?
흥선대원군의 부국강병책 동아시아 질서의 변화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음 → 제2차 아편전쟁 이후 변화 세도정권은 사회변화에 크게 무관심 대원군 정권은 종친세도(宗親勢道) 러시아를 처음 조선 국경 수비대가 목격한 것은 1861년 → 대원군 집권 초기 대단한 위기감 형성 러시아로 많은 조선인들이 월경하는 문제 → 지방관을 통해 처리 국법을 어기지 않는 한 외국인 문제는 최대한 관용을 베푸는 것이 원칙 대원군은 부국강병, 재야 유생들은 성리학적 질서 서양의 침입을 경제적 이윤 실현으로 판단, 그래서 쇄국(鎖國)하면 조선을 침입하지 않을 것 1873년 최익현의 대원군 비난 상소 : 철전 유통, 부국강병 비판(正學에 대한 이견) 이렇게 적어서 놓으면 슬라이드를 켜면?
고종의 친정과 부국강병책 고종의 친정 기반은 취약 대원군의 향배에 따라 정국이 불안 : 아버지에 대한 효심 부족 여흥 민씨 등 유력 가문을 배경으로 권력 정악 국방력 강화보다 군사 통제권 확보에 주력 : 정국불안 + 재정 부족 정책적 전환 : 대외정책, 서양목(西洋木)의 수입 일본과의 관계 재정립 : 만국공법 질서 1868년 일본에서 왕정 복고를 일리는 국교 수립 요청, 書契 접수 문제 전통적 교린체제 내에서 새로운 관계 모색, 일본은 국제법에 근거해서 부정 1871년 廢藩置縣으로 쓰시마번의 업무가 외무성으로 전환 이렇게 적어서 놓으면 슬라이드를 켜면?
강화도 조약과 청일수호조규 1875년 운요호 피격 조선의 입장 : ‘欲重修舊好‘, 일본의 입장 : 조선은 자주국 명시 조선이 일본과의 협상을 정치적 입장이 아닌 교린 약조 원칙 고수 불평등 조약에 대한 불만보다 무력 충돌 위기 해결 분위기 무관세 독소 조항은 1883년에 수정 일본은 조선에 사신 파견 요청 : 수신사 김기수는 통신사의 연장선상으로 이해 깨달음 : 두모포 세금 부과 시도 사건 → 조약 위반 1871년 청일수호조규 : 조공관계가 아닌 새로운 형태의 동아시아 외교 이홍장은 일본이 조공국이 아니라고 판단, 서로 일방적 불평등 제시 청과 일본은 만국공법을 점차 이해, 조선은 …. 상호보장, 실효성 회의, 독립 근거 이렇게 적어서 놓으면 슬라이드를 켜면?
고종의 개화정책 추진 일본의 류큐 병합 : 중화제국의 조공권 붕괴 <조선책략> : 조선은 청과 가까이, 일본과 제휴, 미국과 손을 잡고→미국에 문호개방 조미수호통상조약 : 이홍장과 슈펠트의 협상(가조약문 작성) 청은 조약에 “조선이 청의 속국이지만 내정과 외교에서는 자주권이 있다“ 포함요구 → 미국 거절 조선국왕이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이 청의 속방임을 인정하는 조회문을 보내는 것으로 타협 사대관계와 만국공법 질서를 병존시키려는 : 兩截정책 → 조선의 희망고문 이렇게 적어서 놓으면 슬라이드를 켜면?
임오군란과 3국관계 <조선책략>에 대한 입장 차이 : 지방유생의 위정척사론 서양과 일본이 다르다던 정부 입장에서 <조선책략>과 조미수호조약은 수용불가 고종의 개혁정치에 대한 불만 → 1882년 6월 구식군대의 폭동 구식 군인은 대부분 도성 내 하층민들 → 대원군 추대, 목표는 명성황후 고종은 대원군에게 국정 위임, 명성왕후는 충주로 피신 고종은 스스로 자책하는 교지 반포, 통리기무아문+신식군대 폐지 대원군 정권 재탄생 인상을 주는 조치 → 강화도조약과 조미조약 준수 공식 표명 33일만에 청군 3,000명 개입, 대원군 납치 일본은 군함 4척+육군 1개 대대 파견 → 일본 공사관에 군대 주둔(제물포조약)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 청의 속국 명문화(청의 북양대신과 조선 국왕을 같은 지위로) 일본의 조선중립화 논의 구상 이렇게 적어서 놓으면 슬라이드를 켜면?
갑신정변과 서구열강의 개입 제국주의 논리 : 문명론(문명+야만)으로 세계 구분 → 후쿠자와 유키치 조선의 문명개화론자들은 독립론을 수용 : 조선을 야만으로 규정, 개화의 대상 → 유교 지식인들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엎는 것 1884년 베트남을 둘러싸고 청-프랑스 전쟁 1884년 12월 급진개화파의 갑신정변 정변 주도세력 : 의회구상과 民權 이해 없음, 권력 장악한 개혁이 우선 → 일본 개혁 모방 일본과 한성조약 : 일본 피해 배상 요구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청의 리훙장이 교섭을 벌여 양국 군대를 조선에서 공동 철수, 파병 시에 사전 통보 → 톈진조약 러시아 남하를 걱정한 일본은 청국에 협조 정책으로 전환 이렇게 적어서 놓으면 슬라이드를 켜면?
거문도사건 1885년 3월 1일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 1884년 이전부터 조선은 러사아와의 교섭을 비밀리에 추진 고종은 러시아에 밀사를 파견하고 교섭 시도 갑신정변 이후 미국과의 접촉 시도 → 실패 → 러시아 접촉으로 선회 1884년 함경도 경흥에 러시아가 조차지 획득 3월 3일 청과 일본에 점령 사실 통보, 조선에는 4월 6일에 통보 청국의 중재로 일본에서 영국과 외교 교섭 아프가니스탄 협상과 거문도의 군항 평가 결과로 영국 내에서도 부정적 청국의 중재로, 러시아가 조선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거문도 철수 1886년 10월 29일 청국에 철수 의사 통보, 조선에는 11월 28일에 통보 완전 철수는 1887년 2월 5일, 조선은 2월 7일 거문도에 관원 파견 이렇게 적어서 놓으면 슬라이드를 켜면?
왕실 주도의 근대 국가 수립 정책 갑신정변 실패 이후 청국은 정변 진압 명분으로 내정 간섭 강화 청국은 그들의 동아시아 정책을 위해 조선이 희생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종에게 각인 고종이 설치한 내무부는 황제 직속 기구로 궁내 사무를 전담하는 청국의 내무부를 모방 내무부(부국강병)와 의정부(국가운영)의 이원화 고종의 정치적 세력 기반 : 여흥 민씨 戚族 세력 새로운 정치 구조를 지향하지만 현실적으로 기존 정치세력 의존 → 허약한 정치기반 청의 내정 간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밀약 추진 청은 袁世凱를 파견하고 대원군을 還國시켜 고종을 견제 원세개의 독선적인 내정 간섭의 배후에는 일본의 默認이 존재 일본은 청국과의 공존을 통해 동아시아의 안정을 도모하는 입장으로 전환 → 內治 이렇게 적어서 놓으면 슬라이드를 켜면?
1894년 농민전쟁의 배경 고종 친정 체제의 문제점 : 기구를 운영할 관료 부재, 재정 조달 능력 부족 새로운 세입원 : 화폐 주조 이익과 관세 수입 농민전쟁 : 고종의 내무부 체제에 대한 농민들의 총체적인 저항의 의미 포함 고종은 1893년 보은집회 단계에서 청에 군사 지원 요청하는 이중적인 태도 고종은 청에 원세개가 전주에 내려가 조선 병사들을 지휘해 줄 것을 요청하려 함 고종의 착오 : 청에 대한 파병 요청을 上國-小國의 전통적 屬邦 체제로 인식, 일본이 간섭할 것이라 판단 안함 → 당시 국제 정세에 무지 조선후기 三政의 문란, 지주와 소작인의 관계 대립이 개항으로 심화 농민항쟁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상이 東學 동학 교세의 급격한 확산에 당황한 조선 정부는 敎祖인 최제우를 惑世誣民으로 처형 이렇게 적어서 놓으면 슬라이드를 켜면?
1894년 농민전쟁의 과정 고부의 농민 봉기 : 지방 수령의 불법 행위, 전봉준이 지휘, 조병갑의 파면, 농민 해산 안핵사 이용태 : 동학농민군을 가혹하게 처벌, 농민의 반발 백산 봉기 : 백산에서 지휘부 구성, 황토현에서 관군 격파, 전주성 점령 청국은 아산만에,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 전주화약 : 동학농민군과 조선정부의 화해 → 양국군대 철수 요구 → 일본 거절 1894년 6월 일본군은 기습적으로 경복궁 점령 → 동학농민군이 다시 창의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격전 → 농민군의 후퇴 이렇게 적어서 놓으면 슬라이드를 켜면?
청일전쟁의 원인 임오군란 이후 일본은 청과의 전쟁 준비 청은 조선에 직접 개입 1890년 일본의 야마가타 아리토모 수상은 주권선과 이익선의 개념 설정 이익선으로 한반도 설정, 일종의 과잉보호 동학농민의 봉기를 못 막자 청에 출병요구 일본군은 6,000명 파병, 청군은 2,100명 파병 이렇게 적어서 놓으면 슬라이드를 켜면?
청일 공동 개혁 제안 전주화약으로 농민군이 해산하자 청일 주둔 명분 상실 일본은 청에게 조선 내정 공동 개혁 제안 청은 청일 동시 철군 요구 일본은 청의 회답을 무시하고 철군하지 않겠다고 통고 일본은 영국과 조약 개정 중 영일통상항해조약을 체결하고 청과 전쟁 결정 → 영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을 보장 이렇게 적어서 놓으면 슬라이드를 켜면?
청일전쟁의 전개 일본공사가 조선에 내정 개혁 제안 조선이 거부하자 경복궁 점령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추대하고 섭정, 일본군은 청군을 공격 “청과 일본의 전쟁은 문명과 야만의 싸움“ 평양 전투에서 청이 패하자 서구 열강은 충격을 받음 영국은 중국이 혼란에 빠져 중국과 무역 이익이 위협받을 것이라 우려 이렇게 적어서 놓으면 슬라이드를 켜면?
시모노세키 조약과 3국관계 1895년 3월 강화 교섭 시작 청은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 랴오둥 반도, 타이완을 일본에 할양 -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질서는 붕괴 러시아가 랴오둥 반도 영유 중지 제안 - 독일과 프랑스가 동의 영국은 일본의 세력 확대로 정세가 변하는 것을 원하지 않음 결국 일본은 전면적으로 포기, 러시아 적개심이 고조 이렇게 적어서 놓으면 슬라이드를 켜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