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사 1940~1944 정헌이
1942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파르티잔 리뷰>의 편집자들이 마르크스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미국 아방가르드의 비정치화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된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수많은 초현실주의자들이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망명한다. 뉴욕에서 개최된 두 전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런 망명의 상황을 반영한다.
1943 할렘 르네상스가 인종적 자각과 그 유산에 대한 인식을 고취시킬 무렵, 제임스 A. 포터는 미국 흑인 미술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근대 니그로 미술>을 뉴욕에서 간행한다.
1944 피에트 몬드리안이 <승리 부기- 우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피에트 몬드리안이 <승리 부기- 우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이 작품에서 회화를 통해 파괴라는 관념을 추구했던 몬드리안 고유의 기획이 실현된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마티스, 피카소, 브라크, 보나르 같은 근대미술의 ‘거장’들은 야만성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나치에게 점령된 프랑스를 떠나지 않은 채 그대로 머문다. 전쟁 중에 거장들이 발전시킨 양식이 전후에 알려지면서 신세대 예술가들을 자극한다.
1942: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파르티잔 리뷰>의 편집자들이 마르크스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하면서 미국 아방가르드의 비정치화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된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수많은 초현실주의자들이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망명한다. 뉴욕에서 개최된 두 전시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런 망명의 상황을 반영한다. Frederic Keisler, Art of This Century, 1942 Marcel Duchamp, Sixteen Miles of String, First Papers of Surrealism, 1942
Wolfgang Paalen (오스트리아/멕시코) (1907~1959) 멕시코에서 발간된 국제적 잡지 <DYN> 1942~1944. 제 1호.
Wolfgang Paalen (Austrian/Mexican, 1907–1959), Ciel de Pieuvre, 1938 Wolfgang Paalen (Austrian/Mexican, 1907–1959), Ciel de Pieuvre, 1938. 90x120cm. Fumage (훈연) 기법: 채색한 화면을 촛봇로 그을려 완성. 자동기술법
The Exposition Internationale du Surréalisme (January 17 to February 24, 1938), Galérie Beaux-Arts (run by Georges Wildenstein), Paris. 기획: André Breton, Paul Éluard 큐레이터: Marcel Duchamp as curator 테크니컬 어드바이저: Salvador Dalí and Max Ernst 라이팅 테크니션: Man Ray Wolfgang Paalen as "expert for water and foliage"
초현실주의 내부의 갈등 볼프강 팔렌, “초현실주의여 안녕”, <Dyn>, 1호, 1942. 1942년에 변증법적 유물론은 참혹한 패배를 맛보았고, 모든 이즘은 점진적으로 해체됐다. 더 이상 초현실주의가 마르크스와 헤겔의 ‘교조주의적 개념’의 일부를 너무 쉽게 수용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팔렌은 인간 행위, 특히 창조적 행위의 주요 동기가 무의식적인 욕망이라는 프로이트의 원칙에 대한 초현실주의의 맹목적인 지지를 철회했다. 팔렌은 미술이 물리학의 ‘성과 및 방법론’과 더 많은 유사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질문>, <Dyn>, 2호. 변증법적 유물론은 정말로 변증법적 과정에 대한 과학인가? 헤겔이 공식화한 변증법적 방법론은 과학적이었나? 그렇다면 과학의 중요한 발견들은 이 방법론에 빚지고 있는가? 변증법적 방법론의 토대가 되는 헤겔의 <논리학>에서 확립된 법칙들은 보편적으로 타당하며 유효한 것인가?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혹은 그 무엇을 위한 3차 선언문의 서언, 1940. 모든 이론 체계에 대한 맹목적인 헌신을 거부, 언제나 초현실주의를 자극한 것은 반항의 정신이었음을 분명히 했다. 마르크스주의건 정신분석학이건 “해방의 도구”가 얼마나 쉽게 “억압의 도구”로 탈바꿈할 수 있는지 강조 미국 미술계에서 아카데미즘화하고, 패션계 및 영화 산업계에서 상업화된 초현실주의를 강력 비난 (살바도르 달리의 철자를, Avida Dollars 로 명명)
Wolfgang Paalen, Untitled (Composition), 1951. Combat des Princes Saturniens III, 1939
미국미술가 협회 메이어 샤피로의 입장변화 모더니즘 미술 (추상)의 개인주의는 새롭게 등장한 부유한 딜레탕트 후원자 계급에 영합하는 정치적 도피주의인가? 추상미술이 그 어떤 예술 형식보다 역사적 문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역사적으로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가? 그린버그, “트로츠키주의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는 반-스탈린주의가 어떻게 ‘예술을 위한 예술’로 변형됐으며, 결과적으로 대담하게도 이후에 올 미술 운동에 길을 열어주게 되었는지 언젠가 얘기해야 할 것이다.” 1st American Artists' Congress New York: privately published, 1936 Black wraps. 104 pp. Partisan Review 재발간 1937, 12월.
세계 정세 1936 스페인 내전 발발 (프랑코의 파시스트 정권 등장) 1937 중일전쟁 발발 1936 스페인 내전 발발 (프랑코의 파시스트 정권 등장) 1937 중일전쟁 발발 1938 히틀러의 독일이 오스트리아 침공 병합 1939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 합병, 폴란드 침략을 앞두고 소련의 스탈린과 독소불가침 조약을 체결. 폴란드 침공 1940 독일이 네덜란드, 벨기에를 침략하고 곧이어 프랑스 점령 스탈린에 의해 공산당에서 축출되고 추방된 트로츠키가 멕시코에서 암살당함 1941 독일이 소련을 기습 침공, 일본은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 1944 노르망디 상륙작전. 파리 탈환. 1945 4월 히틀러 자살, 5월 8일 독일의 무조건 항복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뉴욕에 재집결한 초현실주의자들 Tves Tanguy, (1900, 프랑스~1955) Mama, Papa is Wounded, 1927 Roberto Matta (1911 칠레~2002 이탈리아), Rocks, 1940 96.8 x 152.7 cm.
Max Ernst (1891-1976), Robing of the Bride, 1940 André Masson (1896 –1987) Andre Masson, Paysage Iroquois (인디언 풍경), 1941. André Masson, Dark Forest, 1937
Gorden Onslow Ford (1912-2003) 영국 태생 초현실주의자 Baziotes, Kamrowski, and Pollock, Collective Painting, 1940~1941 캔버스에 유채와 에나멜, 18.9x64.8cm Cycloptomania, 1940
트로츠키: “예술은 과학처럼 질서를 추구하지 않으며, 본성상 질서를 견디지 못한다 … 예술이 스스로 확신을 가질 때만이 혁명과 강력하게 연대할 수 있다.” <파티잔 리뷰>, 1938. 8-9월 “예술에서 혁명적 사고를 성취하려면 우선 예술적 진리에 도달해야 한다. 이것은 어떤 유파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술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변함없는 신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모두를 지지?) <파티잔 리뷰>, 1938 10월 Gerome Kamrowski(1914~2004), The Urgent Hour, 1949, 121.9 x 91.4cm William Baziotes (1912~1963) , Dwarf, 1947
마타는 1942년 <초현실주의 1차 서류>전이 끝나자마자 작업실을 마련, 바지오츠, 마더웰, 폴록 등에게 수개월 간 회화적 자동기술법을 전수. Roberto Matta, Snail’s Trace , 1937 Roberto Matta, A Grave Situation , 1946 앙드레 브레통은 젊은 세대가 보여주는 미술이 탕기의 가상의 풍경이나 마송의 자동기술법적 제스처를 추종하는 아류라 보고 실망했지만, 1937년 26세의 건축학도였던 마타를 초현실주의의 새로운 희망으로 간주 그러나 1942년 이후 마타를 경계하고 아쉴 고르키를 지지하기로 결심
Roberto Matta, Years of Fear (공포 시대), 1941~1942, 111.7x142.2cm.
흥분의 도가니이자, 에너지가 방출되며, 밝은 적색과 황색이 어두운 회색에 맞서고, 유기적이고 기계적인 힘의 새로운 미래주의의 장소가 캔버스라는 고르키의 생각은 마타에게 유래한 것. Arshile Gorky, The Liver is the Cock’s Comb (간은 수탉의 볏이다), 1944, 186x249cm.
Arshile Gorky (1904~1948) Arshile Gorky, Artist and His Mother, c. 1926~1936. 152.4x1127cm
Arshile Gorky, Agony, 1947
앙드레 브레통은 고르키를 초현실주의로 규정했지만, 폴록이나 뉴먼 같은 화가들에 의해 그의 작품은 추상표현주의 운동의 맹아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고르키는 초현실주의 회원으로 가입해 달라는 브레통의 초대를 거부했고, 1947년에는 마침내 브레통과 결별. 이는 초현실주의의 종말을 의미했다. 피카소, 미로, 칸딘스키, 마타의 영향 Arshile Gorky, How My Mother's Embroidered Apron Unfolds in My life, (우리 엄마의 수놓인 앞치마가 내 인생에 펼쳐진 방법), 1944.
잡지<바리에테>에 처음 게재된 <초현실주의 시대의 세계> The World in the Time of the Surrealists, 1929. <초현실주의 시대의 세계>에서 대륙의 크기는 실제 크기와 상관없이 초현실주의자들이 느끼는 예술적 공감 정도에 따라 할당. 부족미술의 발원지인 알래스카와 남태평양 지역은 광대하지만, 아프리카 지역은 실제보다 작게 표시; 러시아는 거대하지만 미국은 존재하지 않고,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유럽을 차지. <초현실주의 국제전> (1938) 전시작품이었던 마르셀 장의 <천궁도>는 밑동과 어깨를 회반죽으로 장식한 재단사용 마네킹으로 머리가 없는 윗부분에는 시계가 장착; 윤이 나는 파란색으로 칠해진 마네킹은 금회색의 지도와 해골 형상이 덥고 있다 1929년의 지도와 1937년 제작된 <천궁도> 모래시계는 상이한 시대를 반영한다. 전자가 세계에 대한 하나의 상상적인 전유이자, 초현실주의적 시각으로 재해석한 세계상이라면, 후자는 종말이 입박한 암흑세계를 예견 Marcel Jean, Horoscope, 1937. 채색된 재단용 마네킹, 회반죽, 시계
초현실주의 오브제 전, 1936 파리 Exhibition of Surrealist objects at Charles Ratton"s, May 1936.
제 1회 초현실주의 국제전, 런던, 1936 The First International Exhibition of Surrealism, 1936, New Burlington Galleries in London, England .
Fantastic Art: Dada and Surrealism, 1937 Fantastic Art: Dada and Surrealism, 1937.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초현실주의 국제전, 1938. 1. 17. 갤러리 보자르, 파리 The International Exhibition of Surrealism, 1938
Salvador Dali (1904~1989), Rainy Taxi, 1938. The International Exhibition of Surrealism. 전시 기획자인 앙드레 브레통과 폴 엘루아르는 이 전시를 제 개의 구획으로 꾸몄다. 백화점 문을 연상시키는 회전문을 열고 갤러리에 들어서면 관람자는 마치 다시 실외로 나온 느낌을 받게 된다. 로비에는 살바도르 달리의 <비에 젖은 택시>가 설치되었는데, 낡은 택시를 담쟁이 넝쿨로 장식되고, 안에는 상어 머리에 검은 고글을 쓴 운전자와 살아 있는 달팽이로 뒤덮인 여성 승객으로 보이는 두 마네킹이 놓여 있었다. 전시 기간 내내 택시에는 물이 적셔졌다. 달리는 노골적 상업성과 나치 동조로 곧 초현실주의에서 제명되었다. The Rainy Taxi from the Dali Museum, Figueras
매춘의 주제는 전시실 로비에서 2 개의 전시실로 연결되는 복도에서 계속됐다. “초현실주의 거리”로 꾸며진 복도에는 가공의 이름을 단 거리 표지판들과 16개의 여자 마네킹이 전시됐다. 달리, 미로, 에른스트, 마송, 탕기, 만 레이 , 뒤샹 등의 이 마네킹 작업에 참여했다. The next room was a large hallway, “The most beautiful streets in Paris,” filled with more mannequins and street signs
Masson Duchamp Man Ray 달리는 무용수 헬렌 바넬을 고용해 <이루지 못한 (미수의) 행위Unconsummated Act>라는 퍼포먼스를 공연. 히스테리 상태를 흉내 내는 이 공연에서는 정신병자들의 웃음 소리와 독일 군악이 울려퍼졌다. 당시는 나치가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에 폭탄을 투여하고 있던 시기였다. 한 때 낯선 두려움의 대상이던 마네킹은 이제 상투적인 표현이 되었고, 심지어는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도입하여 어렴풋한 욕망을 환기시켰던 패션 분야의 마네킹과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초현실주의는 기묘하게도 하나의 유행이 돼 버렸다. 초현실주의는 정치적 참여에서 예술적인 구경거리로 후퇴한 것일까? 실내와 실외,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주관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구분을 모호하게 했던 것은 아닌가?
Man Ray,1938 만 레이는 이제 막 Vanity Fair 같은 패션 잡지의 사진을 찍기 시작하던 중이었다. 이 전시가 있기 1년 전 나치의 퇴폐미술전, 위대한 독일미술전, 파리 만국박람회, 뉴욕 MoMA의 Dada and Surrealism 전시가 열렸고, 1939년 나치는 파리를 점령
뒤샹이 디자인한 주 전시실 바닥에는 낙엽, 이끼, 흙, 갈대와 양치류로 둘러싸인 작은 연못 하나가 있고, 각 코너에는 실크 시트가 덮인 2인용 침대가 놓여 있었다. 한 침대 발치에 <천궁도>가 서 있고, 주변 벽에는 다양한 회화작품이 걸려 있었다. 여기서 성격이 다른 산업 노동의 공간과 예술적 유희의 공간이 결합하며, 그 결합은 상하가 역전된 천장의 석탄 자루로 인해 더욱 복잡해진다. Marcel Duchamp, 1,200 Coal Bags Suspended from the Ceiling Over a Stove, 1938. 전시 다음 해인 1939년 파리는 나치에 함락되고 작가들의 도피와 망명이 본격화 된다.
Art of This Century Gallery, 1942 미궁으로서의 전시 Art of This Century Gallery, 1942 추상미술 전시실 초현실주의 전시실 추상 전시실은 구겐하임의 요청대로 파란색 벽과 옥색 바닥으로 꾸며졌다. 철선에 걸린 그림, 컨베이어 벨트, 기울어진 벽, 생물 형태적으로 디자인된 조각 받침대, 2분마다 한번 씩 벽을 비추는 조명; “당신의 피처럼” 고동치는 전시장
자궁으로서의 공간: ‘두려운 낯섦음’에서 ‘거주 가능하면서도 상상 가능한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신화로의 이동 살바도르 달리, 트리스탕 차라, 로베르토 마타는 1930년대에 “자궁 intrauterine”건축의 초현실주의적 비전을 제안 차라: “평안은 태아기적 욕망을 간직한 유일무이한 기관, 그 어둡고 깊숙한 곳의 부드러운 촉감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이해할 때 비로소 원형, 구형, 비정형의 집들은 다시 지어지게 될 것이다. 자궁 속에 머물렀던 자신의 삶에 대한 상상 속에서 인류가 간직해 온 이런 형태의 집들에 대한 환상은 태어날 때부터 지속된다. 그 환상은 소위 근대적인 거세의 미학이 간과해온 것이기도 한다.” <미노토로>, 1933 마타: “우리에겐 젖은 종이처럼 형태가 제거된, 우리의 심리적 공포와 일치하는 벽이 필요하다.” <미노토르>, 1938 <금세기 미술>의 초현실주의 전시실에는 환상과 현실, 이미지와 배경 같은 인위적인 구분이 해소된다…. 비로소 예술, 공간, 삶 사이에 존재하는 틀과 장벽이 모두 사라진다. 이렇게 틀이 제거되면서 관람자는 보는 행위 과정에 개입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미술관 건축가인 프레데릭 키슬러 (Frederic Kiesler)는 관람자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심리적 반응을 유도하기 위한 무매개적 전시실을 의도했다. 액자, 파티션, 받침대 같은 관습적인 지지대들이 제거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렇게 모든 것이 뒤섞인 전시 디자인은 망명의 아노미 상태를 반영한다.” (데모스)
초현실주의 1차 서류전, 1942. The First Papers of Surrealism Exhibition Marcel Duchamp, Sixteen Miles of String, 1942
미궁으로서의 공간 뒤샹이 설치한 <초현실주의 1차 서류>전은 프랑스 구호협회가 후원하는 전쟁 포로를 위한 자선 전시로, 미국 시민권 신청 서류 양식을 뜻하는 “1차서류”라는 전시명은 새로운 삶에 대한 낙관이자, 당시 세계대전 중 요구되던 모든 신분 증명에 대한 씁씁할 조롱이기도 했다. 뒤샹은 두려운 낯섦의 공간도, 집과 같은 공간도 아닌, (“초현실주의에 반하는 것도, 초현실주의적인 것도 아닌”) 또 다른 세계를 제시했다. 뒤샹은 주전시실 전체를 약 26킬로미터 길이의 실로 휘감아 그림을 가리는 동시에 그림 주변으로 접근하는 것마저 방해했다. 실은 이 공간을 점유하는 동시에 훼방한다. (회화적, 건축적 공간을 가로막는 실이 회화와 갤러리라는 주어진 틀(frame)을 강조하는 동시에 방해한다. 이 엉킨 실에 대한 반응은, 모더니즘의 모든 곤란을 형상화한 것이라 해석되기도 했고, 거미줄 같은 당대에 대한 하나의 비유로 간주되기도 했다. 이 전시는 초현실주의자들을 매료시킨 무의식의 형상인 미궁을 기본으로 했지만, 여기서 그 형상은 현대사, 특히 전쟁과 망명으로 점철된 역사적 단절에 대한 알레고리로 변형된다.
--continue 개막식 행사동안 아이들이 전시실에서 공놀이를 했던 이 전시 전체의 부정적인, 허무주의적 제스처;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미궁을 탈출할 길이 없어 헤매는 동시대의 아리아드네 같다. 키슬러가 틀을 제거하여 초현실주의 미술이 관람자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유도했다면, 뒤샹은 그 틀을 과도하게 강조하여 전시 공간을 말 그대로 미로처럼 만들어 제도에 순응한 모든 종류의 미술에 저항했다. 데모스는 ‘망명 중인 초현실주의’가 키슬러처럼 ‘보상의 집’을 모색할 것인가, 아니면 뒤샹처럼 집이 없다는 사실을 불가피한 상황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선택을 두고 헤매고 있다고 지적했다. 종전 후 키슬러와 뒤샹은 1947년 파리로 돌아와 <초현실주의 국제전>의 전시 디자인을 공동 기획했다. 1938년 전시에서 사용된 흐트러진 서사를 모델로 한 이 전시에서 관람자는 공간을 연속적으로 통과하면서 일련의 테스트를 거쳐야만 전시물을 볼 수 있었다. 즉 1947년의 전시는 보상의 집도, 영원한 집 없음도 아니었고, 그것은 귀환에 대한 제의였고 그 서사는 제의를 통한 귀속에 관한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초현실주의가 가진 것이라곤 이런 제의밖에 없었고 이후 초현실주의는 와해되어 다를 운동으로 통합되고 자신들의 지도에서조차 사라지게 된다.
1943: 할렘 르네상스가 인종적 자각과 그 유산에 대한 인식을 고취시킬 무렵, 제임스 A James A. Porter, Woman Holding A Jug, 1932. James A. Porter, Family, 1940
흑인의 경험을 다양한 예술 형태로 드러내고 찬양하였다. 남부 농촌에서 북부 도심으로 흑인들이 대규모로 이주 할렘 르네상스 흑인의 경험을 다양한 예술 형태로 드러내고 찬양하였다. 남부 농촌에서 북부 도심으로 흑인들이 대규모로 이주 흑인들의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촉구 (부커 워싱톤)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는 실천주의 (마커스 가비) 흑인들이 공유한 아프리카 유산을 강조하고 흑인의 인종적 자긍심과 단결을 주장 (듀보이스) 로댕의 조수로 일하기도 했던 메타 복스 위릭 풀러는 아프리카 조각에 기초를 둔 미학과 아프리카적이면서 동시에 미국적인 흑인 주제를 다루었다. 이집트 조각 전통을 따르고 있는 이 청동상은 긴 잠에서 깨어나려는 여성을 형상화한 것으로 미국 흑인에게는 노예제도와 억압의 세기 이후 도래할 흑인 문화의 재탄생을 촉구하는 작업으로 해석되었다. Meta Vaux Warrick Fuller (1877~1968), The Awakening of Ethiopia, 1914
James Van Der Zee Basquiat, Jean Michel (1960-1988) in 1982 반 더 지는 새로운 니그로의 이미지 창조를 위해 할렘 거주민을 찍으면서 미국 흑인의 고양된 이미지를 드러낼 수 있도록 사진을 연출, 보정했다. 새로운 정체성과 연관된 낙관주의, 품격, 자부심, 교양 James Van Der Zee, Family Portrait, 1926
Aaron Douglas, The Creation, 1935 Lois Mailou Jones, Les Fetiches, 1938 애런 더글러스: 흑인을 아르데코풍 실루엣으로 묘사하는 독자적인 흑인 미술을 창조 1세대 할렘 르네상스의 유산은 민족주의, 원시주의, 원시적인 상태로의 회귀 등을 포함한다. 로이스 메일로 존스의 <물신>은 이런 사상을 초현실주의 렌즈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The Migration of the Negro, panel 1, 1940-41. 상당 수의 할렘 르네상스 미술가들이 WPA,의 원조를 받았다. 제이콥 로렌스는 미국 흑인들에게 영향을 끼친 사회 문제나 역사적 사건을 주로 다룬 화려한 색채의 독특한 구상 양식을 발전시켰다. Jacob Lawrecne(1917~2000), Pool Parlor, 1942 <승리를 위한 예술가들>전의 수상작, 메트로폴리탄 The Migration of the Negro, panel 3, 1940-41. Casein tempera on hardboard
Norman W. Lewis, The Lady in the yellow hat,1938 Alizabeth Catlett, Tired, 1942 엘리자베스 캐틀렛, “예술은 사람에게서 나와야 하며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지금의 예술은 사람들의 필요에서부터 발전해야 한다. 그것은 질문에 답을 주거나, 누군가를 일깨우거나, 우리의 해방이라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어야 한다. “ * 무엇인 흑인 미학을 구성하는가, 흑인 미술을 만드는 ‘흑인 미술가’가 돼야 하는가, 아니면 흑인인 미국 미술가가 돼야 하는가?
1944: 피에트 몬드리안이 <승리 부기-우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이 작품에서 회화를 통해 파괴라는 관념을 추구했던 몬드리안 고유의 기획이 실현된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마티스, 피카소, 브라크, 보나르 같은 근대미술의 거장들은 야만성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나치에게 점령된 프랑스를 떠나지 않은 채 그대로 머문다. 전쟁 중에 거장들이 발전시킨 양식이 전후에 알려지면서 신세대 예술가들을 자극한다. Piet Mondrian (1872~1944)
그림 속으로 Mondrian’s Studio, 1944
검은 색 선을 비롯한 모든 선들의 제거; 곧 붕괴될 것 처럼 보이는, 조그만 직사각형 색종이들의 배열 18개월간 이 작품만을 가지고 씨름; 1942년, 1943년 겨울 완성했다고 사진까지 찍었으나, 마무리한 것을 지우고 다시 시작; 이 작품을 자기 생애의 최후의 작품으로 간주. “내가 원하는 것은 그림이 아니라 해답의 발견이다.” 몬드리안 미학의 핵심은 위계와 중앙집중성, 그리고 ‘특수성’을 폐지하는 것; 오랜 기간 동안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몬드리안이 추구했던 것은 바로 ‘파괴” Piet Mondrian, Victory Boogie-Woogie, 1942~1944. 캔버스에 유채와 종이, 126x126cm
몬드리안의 ‘파괴’ 몬드리안은 형태의 파괴, ‘특수한 것’의 파괴, 개체성의 파괴에 대해 초창기부터 언급하고 있었다. 이는 주변 환경에 용해되는 미술 작품을 제작한다는 유토피아적 이상을 위한 것: “내가 보기에 미술에서 파괴적인 요소는 지나치게 간과돼 왔다.” 변증법적 구성 체계: 한 요소가 다른 요소를 ‘지양 negation’하는 그의 회화에서 중심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됐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던 ‘특수한 것’의 파괴에 도달했다. 그러나 고요한 평형 상태의 구성에 도달하자 그는 이런 구성이 자신의 변증법적 사유의 핵심이 되는 역동적인 진화에 대한 감각을 환기시키지 못하고 있고, 결국 그간의 성과가 실패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6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몬드리안은 자신이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파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회화의 언어, 심지어는 자신의 언어 그 자체를 파괴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용해’해야 할 첫 번째 대상은 평면; 이를 위해 몬드리안은 ‘반복’이라는 요소를 재도입; 그에게 그저 하나의 자연 현상에 불과했고, 그래서 금기시됐던 ‘반복’은 이제 정체성을 제거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 재등장 그는 여러 개의 선을 반복함으로써 평면의 경계를 한정하고, 그 평면들을 연결; 그 결과 “평면 (그 자체)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오로지 리듬만 남게 된다.” 고전적 신조형주의에서 부차적인 요소였던 선들이 이제 가장 강력한 요소이자 중요한 파괴의 요소로 떠올랐다. 선을 중복시키기만 하면 평면은 반드시 ‘개체성’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여러 윤곽선을 가진 하나의 평면을 구분해 내기는 매우 어렵다) 심지어는 그 선들마저 정체성을 잃게 됐다.
이중선의 도입: 평행하게 놓인 두 줄의 검은 색선과 그 사이 하얀 틈으로 이루어진 선을 사용 Mondrian, Composition B, with Double Line and Yellow and Gray, 1932 Composition with Yellow and Blue, 1932 Composition with double line and yellow, 1932 미학적 파괴 행위 이중선의 도입: 평행하게 놓인 두 줄의 검은 색선과 그 사이 하얀 틈으로 이루어진 선을 사용 이 이중선은 수직으로 교차하는 검은 선과 같은 두께이나 이후 점점 넓어져 “평면에 가까워”진다.
Mondrian, Composition with Double Line, 1934
Composition with Blue and Yellow, 1935 Composition (No. 1) Gray-Red, 1935
수평 분할선 사이의 하얀 틈이 그림의 두 평면보다 더 넓은 간격을 갖는 이중선 Composition C, 1935
Composition with Yellow, 1936 Composition with Yellow, Blue and Red, 1937~1942 이중선이 아니라 캔버스를 분할하는 다중선들이 등장 TV의 주사선처럼 사용된 선들은 캔버스 전체에 불규칙한 리듬을 준다. 신조형주의 체계의 금기를 위반하는 두 가지 변화 1917년 이래 그가 금기시한 중첩 효과의 재등장; 검은 선의 두께를 다양화하여 이 효과를 심화시켰다. 다중선들이 교차하면서 그의 작품은 1919년 이후 그가 의도적으로 회피했던 시각적으로 깜박거리는 효과를 다시 내게 됐다.환영 환영주의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이런 금기들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모든 것이 결코 안정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 다양한 두께의 선, 토막난 선들의 상호작용으로 눈 앞에서 형성되는 동시에 사라지는 덧없는 가상의 평면이 만들어졌다.
Mondrian, Composition with Yellow Lines, 1933 Lozenge Composition with Two Black Lines, 1931
뉴욕에 도착한 몬드리안은 1936년 이후 제작한 자신의 작품을 다시 제작하기로 결심; 중앙에 텅 빈 공간을 포함했던 작품들의 재-제작 선이 더 이상 부차적인 요소가 아니라서 선과 평면을 구분할 결정적인 단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검은 색이 아닌 색선은 어떻게 되는가? 중첩된 분할선, 깜박거리는 효과, 가상적으로 중첩된 직사각형들을 정체불명으로 만드는 길이가 다른 검은 선, 조그만 수평선 더미를 가로지르는 색점 Composition No. 9, 1939~1942
색점들의 수가 더 많아지고 길이도 길어진다. Trafalgar Square, 1939~1943 Place de la Concorde, 1938~1942 색점들의 수가 더 많아지고 길이도 길어진다.
New York City I (미완), 1941. 캔버스에 유채와 채색된 종이 테이프, 119x115cm. detail 화면을 분할하는 색선이 색점과 함께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후 검은 색을 완전히 제거하는 일이 시작된다.몬드리안은 <뉴욕시>를 계기로 망막에 생긴 잔상이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무수한 선들의 박동에서 기인한 어쩔 수 없는 부산물이라 생각했던 환영을 피할 수 있는 해법을 발견했다. 그 해법은 회화 언어의 파괴라는 자신의 기획을 훨씬 더 진전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30년대 초 다수의 선들을 교차시켜서 직사각형의 평면을 용해시켰다면, 30년대 후반에는 한층 더 강도 높은 반복을 통해 선 자체의 정체성 마저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선과 평면이 머물고 있는 바탕은 기본 요소들과의 이런 한판 승부에서 여전히 살아남았다. 이제 몬드리안은 기하학적이고 물리적 실체인 바탕을 소거하는 일에 주력했다.
바탕/표면 이 새로운 시도 이면에는 모든 현상을 변증법적으로 환원하는 몬드리안 특유의 논리가 작용한다. 이 새로운 시도 이면에는 모든 현상을 변증법적으로 환원하는 몬드리안 특유의 논리가 작용한다. 바탕이 시각적으로 텅 빈 무언가일 때만 환영주의는 가능하다. 따라서 출발점이 되는 바탕 혹은 기하학적으로 연속적인 표면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런 환영주의도 불가능한 것이다. <브로드웨이 부기 우기>조차 몬드리안이 보기엔 실패작이었다. 그는 이 작품에는 “과거의 것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 왜냐하면 여기에는 <뉴욕시>의 직물 같은 조직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뉴욕시>에서 다수의 색선들이 교차하면서 예기치 못한 동시대비 효과 (깊이감의 환영을 만드는 보색 대비)가 유도됐다면 <브로드웨이 부기 우기>에서 몬드리안은 그런 효과를 수정하기보다는 그것에 형태를 부여했다. 그는 화면을 지배하는 황색 선 위에 서로 다른 색의 사각형 색점을 찍어서 선불을 분해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그림에서 바탕은 강력한 통합의 위력을 발휘하며 재등장했다.
Mondrian, Broadway Boogie-Woogie, 1942~1943. Oil on Canvas, 127x127cm.
유령 같은 바탕 몬드리안은 ‘완성된’ 상태의 <승리 부기-우기>에서도 이런 문제로 곤혹스러워 했던 듯하다. 그래서 그 붙인 자국을 금세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거칠게 색종이 조각을 작품에 덧붙였던 것이다. (환영이 아닌) 실제 공간을 칼로 베어 낸 듯아 이 콜라주에서 두껍게 직조된 모든 요소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따라서 이 작품의 바탕은 그 존재 양태가 떠도는 것일 수밖에 없는 유령이 되며, 그렇게 형상 위로 출몰한다.
1944b: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마티스, 브라크, 피카소, 보나르 같은 근대미술의 ‘거장’들은 야만성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나치에게 점령된 프랑스를 떠나지 않은 채 그래도 머문다. 전쟁 중에 거장 들이 발전시킨 양식이 전후에 알려지면서 신세대 예술가들을 자극한다. Picasso (1881~1973), Wounded Bird and Cat, 1939 Braque (1882~1963), Vanitas, 1939
Henry Matisse (1869~1954), Music, 1939, 115 x 115 cm. Pierre Bonnard (1867~1947) , The Terrace at Vernonnet, 1939
마티스는 1950년 25회 베니스비엔날레 회화 대상을 받았다. Music, 1910 Blue Window, 1913 Matisse, Still Life with Magnolia, 1941. 74x101cm. 마티스는 1950년 25회 베니스비엔날레 회화 대상을 받았다. 야수주의 관에 12점, 프랑스 관에 23점 (조각 3점 드로잉 6점 포함) 전시 이중 1896년에서 1917년 사이에 제작된 회화가 22점, 1940년에서 1948년 사이에 제작된 작품7점 20-30년대 작품은 오직 6점 베니스 비엔날레는 1942년 중단되어 1948년 재개되었다.
Red Studio, 1912 이탈리아는 20년대와 30년대의 악몽 같은 기억을 지우고, 무솔리니 시절의 하이퍼내셔널리즘 및 반-모더니즘 운동을 속죄하고자 했다. 현대판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전략은 이런 목적에 가장 부합했다; 마티스 작품 세계의 전개 양상은 비엔날레의 역사와 거의 완벽한 평행 관계를 이루었기 때문에, 집단적 기억 상실을 조작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재개된 비엔날레가 조심스럽게 새로운 국면으로의 전환을 꾀하자, 마티스는 이런 사업에 동참하게 된 것을 기뻐했다. 그는 근작을 통해 미학적 혁신의 뿌리로 되돌아갔고 새로운 싹을 틔웠다. 유럽 전체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재건의 정치학에 깊이 공감하며, 예술 소비 영역에서 가장 눈에 띠는 거점이었던 베니스 비엔날레가 하나의 이데올로기 프로그램이 됐다. Matisse, Large Red Interior, 1948. 146x97cm.
Matisse, Themes et Variation, 1943 오직 본능에 이끌려 거의 무아지경 상태에서 수정의 여지가 없는 드로잉을 마티스는 “무의식에 의지한” 드로잉이라 명명. 프로이트적 무의식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반사작용’에 해당/
이를 통해 구상한 것과 실제 구현된 것 간의 간극을 소멸하고자 하는 마티스 일생의 목표가 성취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Small Blue Interior, 1947 Red Interior, Still Life on Blue Table , 1947 수많은 양의 용해제가 바로 이전까지 실현된 단계를 지워가면서, 지우고 반복하는 과정을 거쳐 마티스는 새로운 회화적 자동기술법을 고안했다. 이를 통해 구상한 것과 실제 구현된 것 간의 간극을 소멸하고자 하는 마티스 일생의 목표가 성취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80세가 되면서 쇠약해진 마티스는 또 다른 혼합 언어인 색종이 그림을 시작. 회화적 자동기술법처럼 색종이 작업도 마티스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해결하고자 했던 딜렘머의 해법을 제시. 그것은 구상한 것과 구현된 것 사이의 간극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간극의 결과인 “드로잉과 색채 사이의 영원한 갈등”에 대한 것이었다. “직접적으로 색채를 드로잉” 함으로써 마티스는 수십 년간 자유자재로 구사해 온 두 가지 힘의 원천을 극대화; 선 드로잉을 생동감 있게 만드는 흰 바탕과 놀랍도록 충만한 색채 사이의 거리를 조율 Henri Matisse, 다발( La Gerbe) 1953. 도자기 그림을 위한 견본, 컷아웃 구아슈, 294x350cm
모더니즘 거장들의 ‘말년’ 양식 Picasso, Studio at ‘La Californie’, 1955. Picasso, Women of Algiers (version H), 1955. 130x162cm.
Delacroix. Women of Algiers, 1834 Matisse, Odalisque, 1927 Picasso, Women of Algiers, 1955
Picasso, The Studio of "La Californie" at Cannes". 1956
표준적인 입체주의의 색채와 형태의 분리, 다시점, 투명성, 대상을 여러 면으로 분해하기 1948년 베니스 비엔날레 표준적인 입체주의의 색채와 형태의 분리, 다시점, 투명성, 대상을 여러 면으로 분해하기 물질성 강조 18세기 샤르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프랑스 정물화의 전통을 부활시킴. 이젤화에서 벽화의 공적 규모로 전환 George Braque, Interior with Palette, 1942 The Billiard Table, 1945
George Braque, The Billiard Table, 1944, 95x130cm.
윤곽이 불분명해지면서 전반적으로 형태가 흐려진 대신 강도 높은 색채의 울림을 더욱 강조. 자유로운 붓놀림 윤곽이 불분명해지면서 전반적으로 형태가 흐려진 대신 강도 높은 색채의 울림을 더욱 강조. 그가 수십년 동안 묘사해 온 가정적인 세계를 몽환적인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Pierre Bonnard, Studio with Mimosas, 1939~1946. 126x126cm
“회화란 그 자체만으로는 사라질 운명이며 회화의 생존은 (건축을 포함하여) 다른 매체와 어떻게 융합하여 새로운 단계의 감각을 발전시킬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레제 Leger (1881~1955), Divers on a Yellow Background, 1941 Acrobat and his Partner, 1948. Acrobats in Grey, 1942
Joan Miro, Constellation: The Morning Star, 1940 Constellation: Awakening at Dawn, 1941
1948: 카를로 카라, 조르조 데 키리코, 조르조 모란디—형이상학 회화에 대한 경의, 1950: 마티스 Giorgio Morandi, 1890~1964 Still Life, c. 1946 베니스 비엔날레 1948: 카를로 카라, 조르조 데 키리코, 조르조 모란디—형이상학 회화에 대한 경의, 1950: 마티스 : 막스 에른스트, 장 아르프 1958: 마크 토비, 에두아르도 칠리다 1960 : 한스 아르퉁, 장 포트리에
단색조 회화;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논쟁적인 수사학과 페이소스가 사라지고, 작품을 오래 응시해야만 비로소 작품의 의미가 전달되기 시작한다. 관객이 모란디의 고요한 작품 세계를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 볼로냐의 은둔자는 후배 미술가들에게 회화가 여전히 해볼 만한 작업이라고 설득하는ㄷ ㅔ, 전후 피카소보다 더 많은 공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