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현 시대 역사학자였던 아놀드 토인비는, 10권의 <역사학> 연구책을 내면서 마지막에 이런 말을 했다. "이 역사는 다 기울어지고 잘못 되었을 때도, 그것이 바로 잡혀지고 또한 거기에서 새롭게 되어진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극소수의 사람일지라도 그들은 내면적 영감(internal spirituality)을 가졌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썼다. 그것을 받은 소수의 사람 creative minority에 의해서 역사는 새롭게 되어지고 전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수자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한 소수자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교회 안에 있어야 한다.
평안한 침대에서 잠을 잘지라도 내 마음대로 꿈을 꾸지 못하며 내 속으로 낳은 자녀라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고 나 자신의 생각조차 통제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한계인데 전지 전능 하신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오만 방자히 사는 인생의 어리석음 하나님 앞에 죄를 산처럼 쌓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교만함이 우리 속에 가득하다. 어느 한 순간 평안함과 만족함을 누리며 살아 본 날이 얼마나 되며 세상의 향락의 날은 얼마나 있었는가? 세상의 기쁨도 만족함도 한 순간의 찰라에 지나지 않은 것인데 왜 이리도 욕심만 가득하여 하나님 앞에 죄를 더하며 사는가? 하나님 떠난 이들에게는 만족함이 없고 마음에 평화가 자리 잡을 공간은 없다. 하나님 만난 인생만이 꿈이 있고 족함이 있으며 그분이 인생의 해답이다. 나의 부족을 능히 채워 넘치게 해 주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 만이 인생의 참된 길임을 속히 깨닫는 자가 복이 있다. 세상의 것으로는 절대로 인생의 만족함을 찾을 수 없다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제목 : 남은자(Remmnant) (롬9:15,16)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 구시대에 남겨진 자들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의 가족 아브라함과 롯이 있을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롯을 제치고 아브라함을 쓰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있는데 이스마엘을 제치고 이삭을 통해서 거룩한 역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에서와 야곱 가운데서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택하시며,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도 요셉을 사랑하시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저들이 해방되어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도 여호수아와 갈렙 등의 소수의 사람을 택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셨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를 아는 것이 생명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씨로 남겨진 백성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존재의 의미이다
누가 의인이고 누가 하나님의 백성들인가? (왕상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요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2. 이 시대에 남은 자들 (롬9:27)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남은 자만 구원 받는다’는 것은, 소수만 구원받았다는 뜻이다. 신앙은 ‘다수, 교세, 주류’ 이런 것도 필요하지만, 절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히틀러에 의하여 600만명의 유태인이 죽임을 당하였다. 오늘도 한국에 천만에 가까운 신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 모두가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오직 남은 자만 구원 받을 것이다.
3. 믿음으로 의(義)로워진 자 (롬 9:30~3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았던 이유는 - 행위의 법에 따라 갔기 때문이었고,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았던 이유는 - 믿음을 통한 은혜의 법을 의지한 연고였다. 원래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스스로 혈통적으로 의롭다고 교만했다. 스스로 자기들을 높이며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하며 무시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며, 할례를 받았다고 스스로 교만했다. 행위를 붙든다는 것은, 다른 말로 자기를 높임이요, 교만한 자세이다. 반대로 은혜를 붙든다는 것은, 철저히 자기를 낮춤이요, 겸손한 자세이다. 오늘도 은혜로 구원 얻기 원하는 사람은... 자기를 죄인으로 인정하고 철저히 낮아진다.
모태신앙인으로 몇 대째 신자 가문이요, 주초를 금하며, 교회 봉사경력 몇 년 등이다. 조상 적부터 정통 기독교를 믿어왔다고 자부한다. 그런 것들이 ‘겸손히 예수를 붙드는데 장애’가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을 떠난 자 첫번째 : 간절함이 없어집니다. 두번째 :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세번째 : 아픔이 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