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l. 중세는 암흑의 시대였던가 ! 1. 기독교의 문화 지배
1314 년, 템플회의 마지막 수장이었던 쟉 드 몰레는 동료 몇 몇과 함께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파리의 노트르 담 앞마당에 마련된 화 형대에서 불길에 휩싸여 죽어가며 그는 템플회를 파탄으로 몰아 넣은 프랑스의 왕 필리프 4 세 르 벨과 이것이 모함임을 알면서도 도와주지 않은 교황 클레멘 5 세 에 대해 이렇게 저주했다. " 필립 4 세와 클레멘 5 세는 일년 안에 죽 을 것이고, 그 자손 대대로에게 까지 화가 있으리라 "
신전 ( 神殿 ) 기사단 · 기사수도회라고도 한다 년 샹파뉴 기사인 위그 드 파양스가 순례보호를 목적으로 결성하고, 성 베르나르두스의 후원으로 1128 년 수도회로서교황의 공인을 받았다. 예루살렘의 솔로몬 신전 터를 본거지로 삼아 시리아 · 팔레스타인 각지에 성을 쌓고 성지 방어의 주력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성지순례를 가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기부로 받은 토지가 많았으며, 금융업으로 거액의 부를 축적하였다. 템플 기사단이란 ?
필리프 4 세 즉위 당시 프랑스는 ? 서유럽에서 11 세기 말부터 13 세기 말 까지 두 세기 걸쳐 집단 광기와도 같이 감행되었던 십자군전쟁은 8 차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나면서 그 종말을 고하였다. 십자군 원정의 실패는 이를 주도해온 교황권을 크게 손상시켰다, 원정을 통해 야기된 사회적 혼란과 새로운 문물의 유입, 종교를 탈피한 사상의 발전 등은 가톨릭으로 통합되어 있던 서유럽 사회의 분열 을 가져왔다. 각국의 왕 중심으로 이뤄진 독립적인 국가 체계로의 이행은 중세시대의 해체를 알리고 있었다. 프랑스의 카페왕조 ( 카롤링거왕조를 무너뜨린 위그 카페 에 의해 시작된 왕조 ) 의 11 대왕 필리프 4 세는 이러한 시대 적 배경 하에 왕위에 올랐다.
필리프 4 세가 템플기사단을 박해한 이유는 ? 필리프 4 세가 즉위하던 당시는 프랑스가 봉건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던 시대였던 만큼 한 나라의 왕이라고 하여도 국가 전체를 다스리는 것은 아니었다. 왕의 영지는 나라의 일부분 이었고 때에 따라서는 왕의 봉신인 공작이나 백작이 더 큰 영지를 가지고 왕보다 더 큰 힘을 휘두르는 경우도 있었다. 필리프 4 세는 십자군전쟁이 끝난 후 더 이상 종교에 기대할 것 없는 시대를 왕권강화의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영토와 경제력 확보가 우선이란 것을 알았다. 그가 눈을 돌린 것은 당시 상당한 재산을 가진 유태인과 십자군전쟁 동안 엄청난 부를 가지게 된 성전기사 단이었다.
박해 과정 필리프 4 세는 성전기사단에 대한 묘한 소문을 끄집어내어 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성전기사단은 그 입회식이 매우 신비롭고 비밀 스러워 여러 가지 소문들이 있었다. 필리프 4 세는 이단 심문 시에 익명의 증언을 채택할 수 있다는 법을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성전 기사단은 입회식에서 반 ( 反 ) 그리스도교적 맹세와 악마 숭배 등을 하며 동성애 집단이라는 이유로 고발되었다. 필리프 4 세는 교황에 게 그들을 이단으로 몰도록 종용했다. 교황 클레멘스 5 세는 필리프 4 세의 의도를 분명히 알았지만 이미 그의 손아귀에 놓여있었기 때 문에 왕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 결국 템플기사단은 해체되었으며 그들의 마지막 수장 쟉 드 몰레는 화염 속에서 저주 를 뱉는다.
몰레 저주의 결과 1 클레멘스 5 세 쟉 드 몰레가 죽은지 꼭 한달 인 4 월 19 일 밤에 사망 필리프 4 세 같은 해 11 월 20 일에 뇌졸증 으로 갑자기 사망
몰레 저주의 결과 2 * 루이 10 세 르 위 땅 (Louis X le Hutin): 필리프 4 세의 장자, 즉위 2 년만에 사망 * 졍 1 세 (Jean Ler): 루이 10 세의 아들 즉위 5 일만에 사망 * 필리프 5 세 (Philippe v): 필리프 4 세의 둘째 아들, 5 년간통치 후 네 딸을 남기고 사망 * 샤를 4 세 (Charles IV): 6 년간 통치 후 후손 없이 사망 → 필리프 4 세를 포함, 이들을 일컬어 저주받은 왕들 (Les Rois maudits) 이라 불렀다.
프랑스 왕위 다툼 이로써 카페 왕조의 모든 남성 직계 혈통이 사망하고 다음 왕위를 놓고 논란이 생긴다. 그리고 다음 왕에 오를 명분을 가진 두 사람 이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다. 필리프 6 세 필리프 4 세의 조카 에드워드 3 세 필리프 4 세의 딸이 영국 에드워드 2 세에게 시집을 가서 낳은 아들 → 영국 출신의 왕이 자신들을 통치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프 랑스인들은 살리카 법을 앞세워 에드워드 3 세의 즉위를 반대했다.
살리카 법이란 ? 클로비스 ( 재위 말년에 유럽의 중세를 연 프랑크 왕국의 창시자 ) 가 정복자인 게르만족의 법률을 성문화 시킨 법이다. 살리카 법전은 크리스트교나 그리스 로마법에 영향을 받지 않았고 게르만족, 그 중에서도 최고 정복자인 살리족에게 만 적용되었다. 살리카 법전은 주로 형 법과 소송법에 관한 법전으로 각종 규칙 위반과 범죄에 대한 벌과금 목록을 자세 하게 싣고 있다. 살리카 법전은 중세를 거쳐 근세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는 데 특히 유럽의 왕위계승문제에 살리카 법이 종종 인용되었다.
필리프 4 세가 즉위하게 된 명분으로써의 살리카 법 살리카 법의 민법 규정 가운데 딸은 토지를 상속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 장이 있다. 이것이 여성의 왕위 상속권을 명시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것을 명분으로 모계 혈통인 영국의 에드워드 3 세 대신에 필리프 6 세가 왕 위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빌미 삼아 영국은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백년전쟁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따로 첨부한 QnA 를 참조해 주세요. Merc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