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강 태평양전쟁과 일본 군국주의
만주사변
중일전쟁과 루거우차오(蘆溝橋)사건 1936년 12월 12일 시안(西安)사건 발생: 내전정지, 일치항일 등을 주장한 동북군의 장쉐량(張學良), 서북군의 량후청(楊虎城) 등이 공산당 토벌을 먼저 주장한 장제스(蔣介石)를 시안에서 체포, 구금한 사건 중국 공산당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조정으로 해결 ->항일 민족통일 전선 형성 계기 마련
1937년 7월 7일 밤 10시 40분께, 베이징 서남 교외에 있는 루거우차오(일명 마르코 폴로 다리)에서 총성 울려 ->일본군은 노구교 인근에서 소련을 가상 적국으로 야간연습 중 발포가 불분명한 이 총격을 중국군의 도발로 간주하고 보복공격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 麿)내각은 중국침략의 빌미로 삼아 전면전 선포—중국은 9월 국공합작으로 반일투쟁 연합전선 형성 ->중일전쟁의 시작
1937. 12월 중순 수도 난징(南京)함락->난징대학살; "부두에는 시커멓게 탄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일본군은 시체를 한 구씩 강물에 내던지고 있었다. 신음소리, 시뻘건 피, 경련하는 손발···.” "넓은 강 위엔 온통 시체였다. 강변에도 시체가 높이 쌓여 끝이 안 보였다. 시체 중에는 군인은 물론 일반 백성, 어린아이까지 있었다. 시체는 강물을 따라 하류로 흘러내려갔다.“(아사히 신문)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후 오늘에 이르러 처음으로, 병사들이 웃는 얼굴로 어린아이를 공중으로 던졌다가 떨어져 내려오면 날카로운 총검의 끝으로 받아내고는 그것을 스포츠라 부르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포로가 눈이 가려진 상태로 참호 옆에서 총검술 등과 같은 훈련의 표적으로 사용되었다...’(임어당) -->유럽 열강이 히틀러의 팽창정책 저지에 골몰하고 있을 때 일본은 중국 대륙 침략
일소분쟁과 노몬한Nomonhan 사건(1939.5~9) -일, 만주국 성립(왕극민->왕조명 괴뢰정권 수립), 관동군의 북만주 제압 ->소련과 일본, 국경 대치 -1939년 5월, 만주국 서북지역 외몽고와의 국경지대인 ‘노몬한’에서 일본군-소련군 격전->일본 관동군 대패 -독소불가침조약(1939.8.23)과 유럽 정세 급변으로 일-소 정전협정 체결(1939. 9. 15) ->대소 개전론 포기, 남진론으로 궤도 수정
3국 동맹 (1940.9.27) 과 남진론 독일의 잇따른 승전과 동아시아의 힘의 공백; --프랑스의 항복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공백 상태 --네덜란드의 항복으로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 인도네시아의 공백 -->일본 육군은 3국 동맹 체결하고 무력으로 이들 남방 자원 획득 주장
1940년 7월 제2차 고노에 내각 출범; ‘세계정세 추이에 따른 시국처리 요강’ 결정 --중국 문제 해결과 남진 목적으로 독일, 이탈리아와 제휴강화, 소련과 국교 비약적 조정 결정 --미국에 대해서는 공정하고 의연한 태도 견지하며 마찰회피 전략 --무력 행사 대상은 영국에 한정 ->독일에 ‘3국 동맹’ 제의(베를린에서 체결)
3국 동맹 내용 -i)일본은 독일,이탈리아가 유럽에서 신질서를 건설하는데 지도적인 지위에 있음 인정 -ii)獨,伊는 일본이 대동아 신질서 건설에 지도적인 지위에 있음 인정 -iii)3국 중 한 나라가 현재의 전쟁당사국이 아닌 국가로부터 공격받을 시 상호 원조 -iv)이 조약은 소련관계에 하등 영향 없음 =>이 조약은 미국 견제 아닌 미국 자극
일•소 vs 독•소관계 독소불가침 조약->독일의 소련침공 계획(바르바로사 작전,1940.12.18) 전환 배경? --독일은 소련을 끌어 들여 4국 동맹 구상 --소련은 3국 동맹에 불안감 증폭 =>독-소 베를린 회담(1940.11.12~13), 결렬 -->일본은 독, 소 관계 조정 역할 자청; 독일은 소련과 협력 거부,일-소관계정상화도 반대 -->하지만 ‘일-소’ 양국은 중립조약(’41.4.13) 체결; “제3국과 전쟁 시 중립을 지킨다”(vs 3국동맹)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1940년 8월 마쓰오카 요스케 외상 이래 외교정책의 기본 표어가 대동아공영권:3단계 -i) 1938년 11월 3일, 12월 22일 고노에 수상의 선언: ‘동아신질서’를 통해 항일전선을 붕괴시키고 일본이 중국을 배타적으로 지배한다는 구상(=중국 지배 이데올로기) -ii) 1940년 봄 프랑스, 네덜란드의 패망 위기로 그 식민지(인도차이나, 인도네시아)도 ‘동아신질서’에 포함된다고 밝혀
->육군 압력으로 요나이 내각이 물러나고 들어선 ‘제2차 고노에’ 내각은 무력에 의한 남진론 결정 ->미국과의 대립 첨예화 -iii)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대동아공영권’은 아시아전역은 물론 대양주 까지 포함하는 방대한 지역의 일본 지배 표방하는 이데올로기로 선전
일본과 미,영은 왜 적이 되었나? 프랑스의 패망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대한 일본의 야심 표출 ->1940.9.19. 프랑스의 저항에 일본 정부의 최후통첩—>일•프 군사협정 체결->북부 인도차이나에 일본군 진주 ->일본군의 남진은 미, 일 자극 ->영,미는 유럽 전쟁 대비로 인해 일본의 남진을 실력 저지할 형편 못됨
일본은 독일의 승전으로 연합국 측 일원이 소유하고 있는 동남아시아에서의 식민지 획득 용이 ->영,미와는 적대. 독일과는 더욱 밀착 ->일, 더 적극적인 남진 정책 주장 -> ‘1941.6.22 獨蘇開戰’ 계기로 일본은 중대 결정: 3대 기본 원칙 결정(7.2 어전회의; ‘정세의 추이에 따른 제국정책요강’)?
1. 일본은 당분간 소련에 대한 공격에 참가하지 않는다 2. 미국의 참전을 적극 저지하지만 만일 미국이 참전하는 경우 일본은 3국 동맹에 기초하여 행동한다<->참전할 경우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행동하겠다는 것 --미국에 대한 적대 노선 최초 공개 표명 3. 일본은 인도차이나 전역의 지배를 확보하고 남방진출을 계속한다
=>1941년 7월 23일 일본군의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 ->미,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 내 일본 자산 동결령 발표(7/25) ->영국과 네덜란드도 자국 내 일본 자산 동결 조치 ->고노에, 루스벨트에 직접회담제의 ->독일, 일본의 대미 관계 정상화 교섭 항의 ->독일의 거듭된 승전에 일본 육군은 미•일 교섭 중지 및 강경정책 채택 ->8월 2일, 미국은 대 일본 석유 수출 금지
일본, 어전회의에서 ‘제국국책수행요강’ 결정 (1941.9.6) -1. 일본은 對 미∙영 戰을 불사한다는 각오로 10월 하순까지 전쟁 준비를 완료한다 -2. 일본은 전쟁 준비와 아울러 미∙영에 외교 적 수단으로 일본의 요구 관철에 노력한다 -3. 10월 초순까지 외교적 수단에 의한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 對 미∙영 개전을 결정한다
미∙일 외교 교섭의 내용; 헐C. Hull 국무장관이 일본에 전달한 각서의 핵심 - >일본 육군의 반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육상은 중국 주둔 문제는 결코 양보할 수 없다 주장 ->전쟁이냐, 교섭이냐 격론: 고노에 수상 사임(10.16)---도조 히데키 수상 임명
도조 내각의 등장과 태평양전쟁 도조 내각, 새로운 ‘제국국책수행요령’ 결정(1941.11.2) -1. 일본은 對 미∙영 戰을 결정하고 육해군은 12월초까지 무력발동을 위한 작전준비를 완료한다 -2. 독,이탈리아와의 제휴를 강화한다 -3. 개전 前 태국과 긴밀한 군사관계 수립한다 -4. 대미교섭이 12월 1일까지 성공하면 무력발동 중단한다 --->미 일 교섭 결렬--전쟁으로…
12월 1일 日 어전회의, 對 미영 개전 결정 1941년 12월 2일, 12월 8일을 기하여 진주만(Pearl Harbor) 공격 명령 결정 12월 6일, ‘도고 시게노리’ 외상, 미국 시간으로 7일 오후 1시를 기하여 진주만 폭격 계획 전달하라는 전문, 주미 일본 대사관에 발송(폭격 30분 전) 노무라 주미 대사의 폭격 사실 문서 수교시간은 미국 시간 오후 2시 20분(진주만 폭격 이후)
진주만 기습 공격한 일본은 승전 거듭; 홍콩, 싱가포르, 마닐라…동남아, 태평양.. 제해, 제공권 장악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대패—태평양 지역 제해 제공권 상실, 패색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테헤란 회담에서는 소련의 對 일본 참전 결정 1944년 일본 패전 거듭하며 도조 내각 실각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 원폭